119화 전설의 시작 (1)
아미산은 사천성에서 가장 높고 큰 명산으로 크고 작은 사찰만 수십여 개가 있다.
정상인 금정봉은 여승들로만 이루어진 아미파의 차지였으며, 다른 곳은 무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찰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금각사(金閣寺)였다.
깊은 밤. 평소 인적이 드문 이 사찰에 삼백여 명의 아이들이 들이닥쳤다.
이곳의 스님들은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머리를 맞대었다.
“아미타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야밤에 어디서 저렇게 많은 애들이…….”
“쫓기고 있다고, 좀 숨겨 달라고 합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무림의 아이들입니다. 함부로 숨겨주었다간, 우리 사찰이 큰 화를 당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그냥 모른 척하자는 말씀입니까?”
“주지스님께서 오고 계시니 물어봅시다.”
승려들이 상의하고 있는 사이 염주를 움켜쥔 늙은 승려가 다가왔다.
이미 상황 파악을 끝낸 듯 그는 당황하지 않고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들을 도와주다가 죽을까 봐 두렵더냐.”
“그, 그건 아니지만…….”
“저 가여운 것들을 내치면서까지 얻는 목숨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말해 보거라.”
승려들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저희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주지스님이 인자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재차 말했다.
“선(善)을 행하다 죽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면 기쁘게 그 길을 가야겠지. 하지만 그리될 것 같지는 않구나.”
오로지 무예에 중점을 둔 아미파와는 달리, 무림의 세계와는 전혀 상관없는 선승들이었다.
다른 승려들도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런데 저 아이들을 어디에 숨겨줄 수 있겠습니까?”
“대웅전이 있지 않느냐.”
대웅전은 사찰에서 본존불상(本尊佛像)을 모시는 가장 큰 법당으로 신성한 곳이었다.
욱여넣으면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숨는 공간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수색이라도 당하면 바로 들통나지 않겠는지요?”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면 되느니라. 부처님의 뜻이 어떤지 지켜보자꾸나.”
이미 결정 난 이상 더는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주지스님에게 합장을 한 승려들이 아이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어서 저곳으로 들어가거라.”
“서두르거라. 어서!”
아이들은 고마움을 표시하며 대웅전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이곳에 숨는다고 안전하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유진산이 주변을 쓱 살펴보더니 스님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사찰의 모든 불을 꺼 주십시오. 어서요!”
“그, 그래. 알겠다.”
암중 산속의 밤에 사찰의 불이 계속 커져 있다면 당연히 의심받을 터였다.
불빛을 모두 차단하자, 사찰 전체가 암흑에 휩싸이며 고요해졌다.
일단은 한숨을 돌린 상황이었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빽빽하게 숨은 아이들은 기척을 죽인 채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고강도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인지 경거망동하는 녀석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유진산은 홀로 다음 행보를 고심했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숨어 있을 수는 없겠지. 동이 트기 직전에 이동해야 한다.’
지금쯤이면 아미산의 입구가 전부 봉쇄되었을 터. 그나마 포위가 가장 느슨해질 시간을 노려 돌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생각처럼 쉽겠는가. 도혜사태가 가장 큰 문제였으며, 어쩌면 소장까지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고민해도 희생 없이는 방도가 없었다.
‘우선 다른 산길이라도 있는지부터 물어봐야겠구나.’
이 또한 부질없는 일임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산길이 있다면 아미파에서 모를 리가 없을 테니.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든 해봐야만 했다.
대웅전을 나가려던 유진산이 돌연 걸음을 멈춘 상태로 경직되었다. 창문 너머로 불빛이 보였기 때문이다.
일렁이는 움직임을 보니 횃불이리라.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곧이어 그것은 수십 개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아이들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밖의 대화를 엿들어 보았다.
“금정봉의 비구니들께서 이 시각에는 어인 일이신지요.”
“혹시 아이들을 못 봤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구려.”
기어코 아미파의 여승들이 찾아온 것이리라.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도혜사태는 저들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그녀가 있었다면 대웅전에 숨어 있는 자신들을 단번에 감지했을 테니까.
이곳을 찾아온 비구니들을 처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즉시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될 터였다.
“수색을 좀 해 봐도 되겠는지요?”
“둘러보시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무기는 모두 맡겨 두셔야 합니다.”
“그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무기를 소지하고 법당에 들어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기어코 강행하시겠다면, 금각사의 이름으로 아미파에 항의할 것입니다.”
아미파 또한 불가의 문파였기에 비구니들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지겠는가. 무림의 명문정파로서 평판에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이어 비구니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는 듯했다.
“사저. 보통 애들이 아니라는데, 무기 없이 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해요.”
“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아무래도 사부님들의 허락을 받고 다시 와야겠구나.”
“예, 급할 것도 없습니다. 아미산에서 지들이 숨어 봤자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니까요.”
잠시 후 비구니들이 돌아가자 아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겨우 한 번의 고비를 넘겼을 뿐이었다.
“일삼칠번. 다시 돌아온다는데 어떡해?”
“여기서 기다렸다가 싸울까?”
어느새 모두가 유진산만을 의지하고 있었다.
주저앉아서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잠시 생각 좀 해봐야겠으니, 다들 기다려 봐.”
농성하고 싸운다면 결국에는 전멸일 터.
현재로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무리를 여러 개로 나눠서,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일부라도 탈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죽어 나가겠는가.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
모두가 침묵을 지킨 채 일삼칠번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한참이 지나도 유진산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귀만 쫑긋거리고 있을 뿐.
‘뭐지?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데?’
어디선가 환청이 들려오는 듯했다.
분명히 귀에 익은 작은 목소리가 점점 커져 오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다른 아이들도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지진이 일어나며 대웅전이 무너질 듯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아이들이 두리번거릴 무렵. 돌연 어디선가 고막을 찢을 듯한 거센 사자후가 이곳으로 메아리쳐왔다.
【할배에에에-!!!】
산사태가 일어날 정도로 무지막지한 내공이 담긴 일갈이었다. 그런데도 어디서부터 시작된 메아리인지 진원지를 알 수가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 낸 소리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유진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었다.
“설이 왔다!”
자신이 기억하는 손녀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아이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크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응?”
“설이가 누구야?”
유진산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콰앙-!
대웅전의 마당에 우뚝 선 그는 호흡을 끝까지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있는 힘껏 내공과 함께 고함을 발산했다.
“아가, 할배 여기에 있다!!!”
쩌렁쩌렁한 그의 한마디는 아미산의 먼 곳까지 메아리치며 쭉쭉 뻗어 나갔다.
난데없는 돌발 상황에 대웅전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다급히 뛰쳐나왔다.
“일삼칠번, 너 왜 그래?”
“미쳤어?”
“어쩌자고 우리 위치를 노출한 거야?”
아이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행동은 지금 우리가 이곳에 숨어 있으니 와서 죽여달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유진산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불안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새 뒷짐을 진 그가 갑자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고생 많았다, 얘들아. 이제 걱정 안 해도 되니, 어서 할아버지를 따라서 내려갈 채비나 하거라.”
난데없이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갑자기 달라진 일삼칠번의 분위기와 태도에 모두가 안절부절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네 이놈들!!”
금각사의 입구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등을 움켜쥔 도혜사태와 자리를 비웠던 소장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둘의 뒤로는 교관들과 아미파의 늙은 원로들까지 보였다.
기세에 눌린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유진산을 제외한다면…….
“이 이럴 수가…….”
“소, 소장님도 같이 왔어.”
이들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이 순간에도 근처를 수색하던 비구니들이 속속들이 합류하고 있었으니.
절망에 빠진 아이들을 향해 도혜사태가 앞장서서 다가왔다.
미간을 찡그린 그녀는 오직 한 아이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삼칠번, 너 이리 안 와? 오늘 곱게는 못 죽을 줄 알아라.”
유진산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그의 태도는 어색하기가 그지없었다.
“타락한 비구니 주제에 어디서 어른한테 오라 가라야? 오늘 아주 호되게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이거 정말 미치겠네. 어디 잠시 뒤에도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도혜사태가 검을 비틀어 쥐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움직이던 그녀는 갑자기 어딘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자신의 기세에 짓눌려 주춤거릴 법도 했건만 아직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다니? 게다가 한눈까지 팔고 있지 않은가.
그때 갑자기 금각사의 마당에 때아닌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휘이이잉-!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날에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가 없었다.
- 왜 머뭇거리는 거야? 일삼칠번은 직접 손봐 줘야 한다더니.
소장이 뒤에서 자신의 연인인 도혜사태에게 전음을 보내며 재촉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춘 그녀는 꿈쩍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싹한 한기(寒氣)가 전신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
모두가 어리둥절하며 도혜사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뭇거리는 모습이 이상해 보일 수밖에.
그때 어디선가 청량한 아이의 음성이 다가와 모두의 귓가를 진동시켰다.
“쟤야?”
틀림없이 유설의 목소리였다.
나직한 한마디였지만, 바로 옆에서 들려온 것처럼 알 수 없는 웅장함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믿을 수 없게도 이곳에서 삼십여 장이나 떨어진 절벽 아래였다.
그곳에선 창을 사선으로 꼬나쥔 유설이 홀로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었다. 눈썹이 가운데로 모아진 것을 보니 몹시 성이 난 듯했다.
한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삼 장씩 쭉쭉 가까워지는 모습이 기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 모습에 넋 놓고 있을 무렵, 유진산이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이 기억하는 손녀의 모습이 분명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와 찰랑거린다는 것뿐.
“그래, 맞다. 저 몹쓸 것이 그동안 할아버지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그리고 또 누구.”
오랜만에 손녀를 보자 그동안 이곳에서 겪은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유진산의 눈가는 빗물이 들어간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버렸다.
그는 곧이어 검지를 치켜들고는 소장부터 시작해서 교관들을 하나씩 지목했다.
“이놈하고 그 뒤에 서 있는 똘마니들 보이지? 그리고 저쪽에서 버르장머리 없이 눈을 치켜뜨고 있는 비구니 넷도 나를 괴롭혔다.”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유설은 이미 지척까지 접근해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보법이었다.
어느새 이곳에 들이닥친 인원이 백 명이 넘었지만, 모두가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짓눌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푸욱-!!
용화창이 땅속 깊이 틀어박히는 소리였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지목한 자들을 맨손으로 때려잡겠다는 의미이리라.
화경의 고수가 둘이나 있는데도 무기를 내려놓다니. 그야말로 무신(武神)의 패기가 아닐 수가 없었다.
그때 유설의 시선이 왼손으로 등을 움켜쥐고 있는 도혜사태에게 고정되었다.
“꼽추, 너부터 이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