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전설의 시작 (3)
“우리는 지금 호현으로 갈 거야.”
“백규 삼촌네?
유진산이 손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응. 우선 그곳으로 가보자꾸나.”
훈련장에서 탈출한 이 아이들은 무림맹의 추격을 받게 될 터.
사파의 성지 중 한 곳이자 우호세력이 가득한 호현이 현재로선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어쨌거나 이번 일로 무림맹주가 길길이 날뛰겠군.’
맹주의 사문인 아미파의 원로들을 쓸어버리고, 심혈을 기울여 양성하던 창룡대의 차기 기수들을 빼돌렸다. 그녀가 이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보고 싶을 정도였다.
모처럼 이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가문을 몰살시킨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누명을 씌운 무림맹이 아니었던가.
노쇠한 몸으로 손녀를 업고 도망자 신세로 살아온 유진산이었다.
이제야 처음으로 그들에게 한 방을 먹인 것이다.
“할배, 기분이 좋아 보여.”
“그럼~ 당연히 좋지. 우리 설이가 이렇게 크게 성장했는데 말이다.”
“할배도 불문사자신공을 익혀봐. 내가 도와줄게.”
유진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사래를 쳤다.
이 무공을 익히기 위한 첫 번째 전제조건은 신체에서 양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익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설령 그리한다고 해도 아무나 익힐 수 있는 무공도 아니었다. 손녀처럼 선음지체의 체질을 타고났다면 모를까.
화경에도 도달하지 못한 자신이 시도한다면, 죽을 때까지 동굴에 틀어박혀 수련해도 안 될 확률이 높았다.
“그건 할아버지하고는 맞지 않는 무공이야. 나중에 백보신권이나 좀 알려주거라. 나도 소림사의 무공 한번 써보자꾸나.”
유설이 배시시 웃으며 할아버지의 팔짱을 꼈다.
“알았어. 호현에 도착하면 내가 가르쳐줄게.”
유진산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오랜만에 손녀와 재회했으니 기쁠 수밖에.
그리고 또 한 가지.
어제까지만 해도 훈련장에서 숨죽이고 버텨왔던 자신이 당당하게 아미산을 걷고 있었다.
하산할 때까지 그 누구도 앞을 가로막는 이가 없었다. 곳곳을 경계하던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모조리 도망친 것이리라.
더는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기에 유진산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미산을 벗어나 대열이 한적한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잠시 쉬고 있는 틈에 유설이 아이들에게 살랑거리며 다가갔다.
“얘들아~”
미소와 함께 건넨 한마디였지만, 삼백여 명의 아이들은 동시에 흠칫거리며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
호랑이처럼 사납고도 무서운 교관들을 맨손으로 때려잡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겉모습은 그저 작고 예쁘장한 여자아이였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할배가 같이 갈 건지 물어보래. 갈 곳이 없으면 호현에서 살게 도와준대.”
“호현……?”
누군가가 호기심을 보이며 물어보자, 유설의 입가가 더욱 큰 미소를 그렸다.
“응. 거기 가면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삼촌들이랑 대련도 하고 재밌게 놀 수 있어. 같이 갈래?”
자신들이 어디서 잡혀 왔는지는 물론이고,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처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유진산은 손녀를 통해 아이들의 의사를 물었다.
깨닫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을 할 수 있고, 사람처럼 살 수 있음을.
아이들이 하나가 되어 고개를 끄덕이자, 유설의 얼굴에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히히. 그럼 우리 도착할 때까지 이름 짓기 놀이할까?”
그렇게 유설은 섬서에 도착할 때까지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만들어주었다.
대부분 단순하면서도 이상했지만, 다들 좋아하는 눈치였다. 번호로 불리는 것보다 백배는 나았으니까.
사천에서 섬서로 넘어오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닷새에 불과했다. 하나같이 일류고수의 경공을 펼칠 수 있는 아이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 *
유진산은 아이들의 인솔을 손녀에게 잠시 맡기고 한발 빠르게 호현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크고 작은 사파의 문파가 여럿 존재한다.
그가 먼저 찾아간 곳은 당연 호현의 대장이자 의형제가 있는 패도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마주치는 패도문의 대머리 무사마다 깍듯이 인사를 해왔다.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아우는 지금 자리에 있는가.”
앞서 이곳을 방문했을 때 백규는 무림맹의 섬서분타를 공격한다고 했다. 지금쯤이면 일을 마치고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예, 어르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예상대로 자리에 있다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차선책을 사용해야 했을 테니까.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백규가 먼저 문 앞에 나와 마중했다.
“형님, 설이는 어쩌고 혼자 오셨소? 사천에 가신 일은 잘 풀리신 거요?”
“지금 오고 있어. 그전에 긴히 상의할 일이 좀 있네.”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나도 할 얘기가 많으니.”
잠시 후 둘은 집무실의 탁상에 마주 앉아 머리를 맞대었다.
“먼저 얘기해보시게. 무림맹의 섬서 분타를 공격했던 일은 어찌 되었는가. 사파의 고수들이 총출동했으니, 손쉽게 쓸어버렸겠지?”
“처음엔 우리도 그렇게 될 줄 알았소. 그놈들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놈들이라니? 설마 패배라도 했다는 얘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흑묘파의 문주는 물론 사도련주까지 직접 나서지 않았던가.
무림맹의 분타가 아니라 총타를 공격하더라도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전력이라 예상했다.
어이가 없기는 당사자인 백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처음엔 계획대로 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듣도 보도 못한 고수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소. 그 때문에 제대로 붙어보지도 못하고 퇴각했단 말이오.”
“설마, 창룡대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건가?”
“맞소. 복면을 쓰고 모가지에 도롱뇽을 새겨넣은 새끼들. 도대체 정파 놈들이 그런 전력을 왜 지금까지 숨겨놓고 있었는지…….”
궁지에 몰리자 기어코 음지에서 활동하던 창룡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리라
그들의 목적은 사파 따위가 아니었다.
소림사의 참회동에서 만났던 원강대사의 말대로라면, 천축에 있는 모종의 세력을 막기 위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천축 따위는 유진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 녀석들은 우리 차지니까 놔두시게. 모조리 찾아내어 괴멸시킬 테니까.”
“형님이 같은 편이라 든든하지만, 아무튼 조심하시는 게 좋소. 아무리 우리 예쁜 조카가 천하의 음괴라도, 놈들이 여럿이면 감당할 수 없을 거요. 우리 련주께서도 고작 세 놈만 잡고 물러섰으니까.”
유진산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나직이 답했다.
“이제부터 조심해야 할 건 바로 그놈들이다. 예전의 설이가 아니니까.”
백규가 놀라는 시늉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사이 더 강해졌다는 말이오?”
“아주 많이. 그런데 그곳에 몇 놈이나 나타났던가.”
“열두 명이었는데, 한 명 한 명이 어지간한 문파의 장문인쯤은 되는 수준이었소.”
“음. 정식대원들이라면 그 정도는 되는 게 맞겠지. 열 살도 안 된 예비 창룡대원조차 일류의 수준이었으니.”
백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놈들도 골치가 아픈데, 예비 창룡대가 따로 있다는 말씀이오?”
“맞네. 무림맹에서 비밀리에 양성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지. 정파의 이름으로 독사 같은 짓을 벌이고 있었더군.”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왜 이제야 말해주오?”
“얘기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네. 소림사의 참회동에서 만난 승려에게서 알아낸 정보였는데,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확신할 수도 없었고.”
“어서 자세히 좀 말씀해주시오. 궁금해 죽겠으니.”
유진산은 지금껏 아미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처음 잠입했을 때부터, 유설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던 과정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규가 배꼽을 잡았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도련의 총사로서 무림맹의 불행은 곧 그의 기쁨이었으니.
“푸하하! 하하하하!! 내 평생 이렇게 통쾌한 얘기는 처음이오. 간만에 정파놈들의 코가 납작해졌겠구려.”
“음. 뭐 그렇겠지.”
“그런데 설이가 정말 도혜사태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단 말이 사실이오? 정파의 망나니로 소문난 그 미친 비구니를?”
“내가 지금껏 자네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는가. 아미파의 원로들까지 모두 묵사발을 만들어버렸네.”
백규는 움켜쥔 양손을 흔들며 좋아했다.
“하하! 드디어 우리 사파에도 희망이 생긴 것 같소. 그간 정파의 위세에 숨 막혀 죽기 직전이었는데 말이오.”
언제 자신의 손녀가 사파의 일원이 되었단 말인가.
열 살도 채 안 된 여자아이가 사파의 희망이라니. 그야말로 웃길 노릇이었다.
‘하긴, 자기 입으로 자신이 사파라고 떠들고 다녔으니, 꼭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유진산은 그저 피식 웃고 넘겼다.
“어쨌거나 지금 설이가 그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네.”
“형님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데리고만 오시오. 내 패도문의 장원을 확장해서라도, 그 아이들을 전부 받아줄 테니.”
패도문의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비록 아이들이었지만, 하나하나가 일류고수에 버금가는 실력자들이었다.
식객으로 받아주더라도 문파에 손해가 될 만한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아직 그 아이들을 패도문에 맡긴다고 얘기하지 않았네. 어찌 아우에게 그런 큰 부담을 안겨주겠는가.”
“그게 무슨 소리요, 형님? 호현에서 패도문이 아니면, 도대체 어느 문파가 그 아이들을 정파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겠소? 무조건 여기로 데리고 오시오.”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며, 자신이 유도한 상황이었다.
백규의 위치는 호현의 사파 세력을 통솔하는 대장이자, 사도련의 총사였다. 자신의 인맥이 닿는 한도에서는 패도문만큼 안전한 곳이 없었다.
“그전에 부탁이 하나 더 있네.”
“우리가 남이오? 부탁이고 뭐고 그냥 말씀만 해주소.”
유진산은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의든 타의든 한번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는 곳이 무림이지 않은가. 그 아이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험한 일을 겪지 않게 돌봐주었으면 하네. 가족들조차 없는 불쌍한 아이들이라 말일세.”
“형님과 설이가 패도문에서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아직도 날 모르오?”
그저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노쇠한 자신과 아기였던 손녀가 이곳에서 오 년 이상을 숨어 지내오지 않았던가. 되돌아보면 패도문에서의 일상은 근심 없이 행복하게 보낼 수 있던 나날들이었다.
그러한 세월 동안 백규는 단 한 번도 전투를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정파의 침공 때는 오히려 먼저 도망치라고 하던 인물이었다.
“내 어찌 자네를 모르겠나. 그래서 이곳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마침 우리 애들도 외로웠는데 잘된 일이오. 짝을 지어서 가족을 만들어 줘도 괜찮을 거 같고.”
패도문의 독문 무공인 귀두공(鬼頭攻)의 부작용 때문인지, 이곳의 무사들은 아이를 가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손녀를 조카처럼 잘 대해 주었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그럼 자네만 믿고 맡기겠네.”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쇼. 그나저나 밖이 소란스러운 걸 보니 도착한 모양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백규 삼촌!!”
유설이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달라진 모습에 놀랄 틈도 없이 백규는 양손을 들어 방어 동작을 개시했다. 유설이 파고들며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얍얍!”
투타타타탁-!
평소와 다름없는 장난질이었다.
내기가 실려 있지 않았기에 타격은 없었지만, 백규는 적지 않게 놀랐다.
한 호흡에 무려 수십 번이나 주먹을 내지르다니. 화경에 도달한 자신조차 엄두를 내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독특한 인사방식이 끝나자 백규가 유설의 옆구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어이쿠, 이제 설이랑 대련하면 삼촌은 맞아 죽겠구나.”
“히히. 삼촌, 나 친구들 데려왔어.”
“그래, 잘했다. 어서 나가서 따듯하게 맞아주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