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26화 (126/238)

126화 어디 올 테면 와봐 (1)

“안서도호부?”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어디인가. 둔황에서 시작되는 무역로를 관장하며, 서역에 대한 감시와 방어를 수행하는 중요한 군정기관이다.

그곳의 책임자인 도호와 그의 수족들이 모두 창룡대원이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백규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않소. 도대체 창룡대가 무슨 꿍꿍이로 변방에서 서역을 감시하고 있는지 말이오. 게다가 고위관료들이라니…….”

“놈들의 임무 따위는 중요하지 않네. 상대가 관료이든 황제이든, 내 자식새끼들을 죽인 놈들과 연관되어 있다면 모두 때려죽일 거니까.”

“그래도 직접 부딪치는 것은 좀 위험하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어떻소. 형님도 알다시피 무림인은 관군과의 마찰을 피하는 게 원칙이지 않소?”

백규가 망설이는 것은 당연했다. 무림맹에 압도적으로 열세인 사도련이 군부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전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떠한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은 음양쌍괴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행동함에 있어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무림맹도 적으로 돌린 마당에 변방의 관군을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더는 손녀와 함께 도망쳐다니는 신세가 아니었다. 누가 되었든 앞을 막는다면 다 때려눕힐 작정이었다.

“사도련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게. 어차피 둘이 움직이는 게 더 편해.”

“……정말 괜찮겠소? 그곳에 배치된 병사들만 만 명이 넘을 텐데.”

“이제 아우도 알지 않는가. 우리 손녀는 백만대군이 몰려와도 어찌할 수가 없다는 걸. 그런데 이런 정보는 어떻게 입수했어? 사도련의 정보력이 그 정도였던가?”

“당연히 흑야방이죠. 형님이 이곳에 있는 걸 알고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답니다. 지금도 전서구가 계속 날아들고 있고.”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흑야방은 지금 개방에 필적하는 최대의 정보조직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관료들과의 인맥도 상당했다.

‘풍호 녀석, 시키지도 않은 짓을.’

양주산에서 시작된 인연으로 자신에게 협조하는 그들의 마음에 가슴이 따듯해졌다.

유진산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백규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품속에서 밀봉된 서신을 하나 꺼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흑야방에서 이것을 형님한테 전해주라고 했소.”

유진산은 밀봉을 뜯어 내용을 천천히 확인해보았다.

대부분이 자신과 손녀의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끝부분에 이르렀을 때쯤 시선을 이끄는 문구가 보였다.

‘파계승 정혜가 섬서로 넘어갔으니 조심하라고?’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어찌 그를 잊을 수 있겠는가. 소림사의 제일고수인 혜광대사의 사부이자, 주화입마에 빠져 미쳐버린 고수였다.

음양쌍괴가 섬서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불문사자신공의 비급을 빼앗기 위해 찾아온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 절세신공을 익히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이제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손녀가 그것을 익힌 순간 비급의 진본과 해독본을 전부 불태워버렸으니까.

사천성의 현자인 사마현의 조언 때문이었다.

유진산이 생각하기에도 그냥 놔두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비급이었다. 심성이 악한 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세상이 피로 물들 테니.

“서신의 내용이 뭔지 좀 물어봐도 되오? 형님 표정을 보니 그냥 궁금해서 말이오…….”

“숭산을 떠돌던 파계승이 섬서로 넘어왔다는군.”

“역근경을 익힌 그 미친 땡중 말이오? 그놈이 여기까지 쫓아왔다는데, 어찌 그리 평온하오?”

백규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도련의 모든 고수를 통틀어도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사도련주 정도일 테니.

그러나 유진산의 얼굴에선 공포나 두려움의 감정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당장 도망쳤겠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잠시 멍한 얼굴로 있던 백규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긴, 뭐 땡중이 아무리 강해봤자 설이를 이길 수는 없을 거요. 그러고 보니 요즘 강호에서도 음괴에 대한 소문으로 난리가 났던데.”

“소문이라니?”

“아직 못 들었나 보오. 요즘 사파인들은 무림십대고수의 명단에 음괴를 올려놓고 있소.”

그 순간 유진산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무가(武家)의 가주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비록 정파가 아닌 사파였지만, 손녀가 강호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니 할아버지로서 뿌듯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림십대고수라. 순위는 어떻던가.”

“아직 우리 조카의 무공 수준이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은 모양이오. 가장 말단에 있는 걸 보니.”

그들이 손녀의 무위를 어찌 짐작하겠는가.

이미 유설은 불문사자신공의 제8식(第八識)인 아라야식(阿羅耶識)을 깨우쳐,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잠재의식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경지인 현경(玄境)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비급의 내용에 따르면 아주 적은 확률로 제9식인 여래식(如來識)에 도달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이 단계는 어디까지나 추측과 이론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사실상 지금 상태로도 무림십대고수 중 두 명이 함께 덤벼도 무서울 게 없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출발할 채비부터 해야겠군. 이곳에 더 남아있다간 파계승이 호현으로 쫓아올지도 모르니 말일세. 이동하면서 녀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주겠네.”

비록 정혜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지만, 유진산이 느끼기에 그리 성품이 잔인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판단이었을 뿐. 만에 하나 그가 이곳을 들쑤신다면 패도문에도 피해가 적지 않을 터였다.

* * *

이번 목적지는 꽤 먼 곳에 있었다.

장안을 거쳐 고비사막을 지나 둔황으로 가야 한다.

먼 여정이었기에 처음부터 급하게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지나는 곳마다 유명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다면 놓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유설은 여행을 하듯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월병이 그리도 맛있느냐.”

손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한시도 떠나질 않았다.

“응, 할배도 먹어봐. 이건 안에 노른자도 들어있어.”

“할아버지는 별로 생각이 없단다. 그리고 곧 밥을 먹어야 할 때인데…….”

“괜찮아. 한 입만 먹어봐. 빨리, 아~ 해봐.”

끝까지 입에 넣으려고 하는 손녀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거절한다면 힘으로라도 먹일 기세였다.

평소 간식을 좋아하지 않는 유진산이었지만, 얼떨결에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맛있지?”

“음. 달콤하고 고소한 게 먹을 만 하구나.”

월병을 씹던 유진산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무수히 많은 무림인이 쫓아오고 있었다. 어제보다 그 숫자가 곱절로 불어난 모습이었다.

며칠 전 약간의 이목을 끌어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 전부였다. 단지 흥미가 생긴 이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이동속도를 조절했을 뿐.

뒤를 쫓아오는 무림인들은 각자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음양쌍괴를 노리는 정파인들이 있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기 위해 졸졸 따라오는 사파인들도 많았다.

게 중에는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작정 뒤따르는 이들이 가장 많았다.

각기 다른 세력의 무인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서로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모두의 관심사는 오직 단 두 명이었다.

“할배~ 나 배고파. 국수 먹고 싶어.”

“벌써? 월병을 세 개나 먹었잖아.”

이미 유설은 검지를 꼼지락거리며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멀지 않은 곳에 국숫집 하나가 있었다.

열두 개의 탁상을 가지고 노점으로 운영되는 가게였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녀의 손을 이끌었다.

사막길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없을 터. 그 전에 실컷 먹여줄 생각이었다.

“그래, 우리 설이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보자꾸나.”

“히히. 나는 세상에서 할배가 제일 좋아.”

유진산과 손녀가 자리에 앉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따르던 인파 중 사파인들이 벌떼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탁상은 열한 개. 서로가 그곳을 차지하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음양쌍괴와 함께 식사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이리라.

“여긴 내 자리야!”

“저리 꺼져! 내가 먼저 앉았잖아?”

“내가 먼저 젓가락을 올려놓았다고!”

“모두 입 닥쳐! 음괴 님께서 식사하시는 데 방해하면 뒈진다!!”

가만히 놔두면 칼부림이라도 시작할 기세였다.

“그렇게 앉고 싶다면 우리가 자리를 양보하겠네.”

유진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소란을 피우던 사파인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

“어찌 다들 그리 성격이 급하신가.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니 항상 정파 놈들에게 털리는 게 아닌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상체를 숙이고 포권을 건넸다.

“죄, 죄송합니다, 양괴 대협!”

“저희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유진산은 관심을 끄고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잠시 후 국수가 나오자 유설이 젓가락을 움켜쥐고 배시시 웃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그래. 많이 먹어둬. 내일부터는 먼 길을 가야 할 테니.”

주변에선 사파인들이 목소리를 죽인 채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귓가에 속속들이 틀어박혔다.

“저기 찍소리도 못하고 모여 있는 정파 새끼들 보이지?”

“암, 보이지. 분광검객(紛光劍客) 양천도 와있네.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는 거 봐봐.”

분광검객은 섬서에서 가장 빠른 검술을 지닌 정파의 고수 중 한 명이었다. 지금껏 그의 손에 죽어간 사파의 고수들이 한두 명이 아닌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조차 음양쌍괴 앞에서는 쥐새끼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음괴 대협께서 여기 있는데 지가 뭘 어쩌겠어?”

“킥킥. 아주 속이 시원하구만.”

“대협께서 수틀리면 저놈들은 다 죽는 거야. 겁도 없이 어딜 따라와?”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정파인들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몰려든 정파의 인파만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중에는 고수들도 많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아니, 여차하면 언제든 도망칠 태세를 하고 있었다.

구대문파의 원로들을 살해한 정파의 원수가 눈앞에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정파 천하의 무림에서 이렇게 굴욕적인 순간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들이 해산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고수들이 나타나 음양쌍괴를 물리쳐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왔, 왔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매화 문양이 새겨진 도사복을 입은 네 명의 검객.

그들의 등장에 정파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매화사수 대협들이 왔어!”

“드, 드디어!”

“와아아아!!”

매화사수(梅花四手)가 누구인가.

화산파에서 가장 강한 네 명의 매화검수들이었다.

한명 한명이 대단한 무위를 지녔으며, 그들이 함께 펼치는 검진은 절대고수조차 움츠리게 만들 정도였다.

드디어 한가락 하는 무림맹 소속의 고수들이 나타난 것이다.

매화사수 중에서 가장 항렬이 높아 보이는 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잔악한 마두들이 지금 어디에 있소?”

정파인들이 앞다투어 국수를 먹고 있는 유진산과 유설에게 손가락질을 보냈다.

“바로 저기입니다!”

“저놈들이 바로 음양쌍괴 입니다!”

“어서 놈들을 죽여주십시오!”

네 명의 검수들이 검집을 움켜쥔 채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들 중 검을 뽑는 인물이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주변이 정적에 휩싸이며 고요해졌다.

“…….”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매화사수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정파인들이 그들을 재촉했다.

“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어서 음양쌍괴를 잡아주십시오!”

뒤쪽에 있던 정파인들은 알아챌 수가 없었다. 매화사수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말이다.

영문을 알지 못한 그들이 음양쌍괴를 향해 도발하기 시작했다.

“이놈들!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너희들을 잡으러 매화사수 대협들께서 이곳까지 오셨느니라!”

“음괴, 네 이년! 빨리 안 일어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