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어디 올 테면 와봐 (2)
참다못한 유설이 손가락을 슬쩍 튕겼다.
그러자 젓가락 하나가 매섭게 날아가 누군가의 입을 정확히 가격했다.
빠각-!
음양쌍괴를 향해 쉼 없이 욕설을 퍼붓던 정파인이었다.
젓가락에 맞은 그는 단방에 앞니 두 개가 날아갔다.
“아악!”
그 모습을 지켜본 매화사수는 표정이 굳어졌다.
시선조차 주지 않고 십여 장 거리에서 목표물을 정확히 가격한 것이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더욱이 놀라운 것은 앞니를 때리고 튕겨나간 젓가락이 허공에 멈춰 있다는 것이었다.
“국수 먹는 사람한테 욕하면 돼요, 안 돼요?”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야단법석을 피우던 정파인들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이제야 다시 식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까? 유설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한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젓가락이 원래의 주인을 향해 유유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생명이 깃든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기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회수한 젓가락을 살펴보던 유설이 갑자기 미간을 좁혔다.
“씨이……. 피 묻었어!”
젓가락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입맛이 뚝 떨어진 것이다.
유설은 국수를 먹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게다가 조금씩 그렁그렁해지는 눈물까지.
식사 중에 거듭 방해를 받아 서러운 모양이었다.
유진산이 이해한다는 듯 손녀의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놈들이니 어서 마저 먹거라. 국수 먹고 싶어 했잖아.”
“안 먹어.”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걸 보니 심술이 단단히 난 게 확실했다.
마음 같아선 가서 다 때려눕히고 싶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유설이 싸울 수 있는 상황은 상대방이 먼저 공격해 오거나, 할아버지의 허락이 있을 때뿐이었으니까.
아기였던 때부터 시시때때로 교육을 받았던 영향 때문인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조금 전 젓가락으로 상대의 피부를 타격하지 않고, 이빨을 때린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좀 들어 봐. 이렇게 맛있는 육수는 어디 가서도 먹을 수가 없어.”
“…….”
“안 먹으면 그냥 간다.”
유설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양손으로 그릇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먹고는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길 잠시 후.
손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유진산이 다시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파인들을 향한 그의 눈빛엔 안쓰럽다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상상도 못 할 게다. 겁도 없이 음괴를 화나게 하다니 말이야. 저 국물을 다 마시면 어찌 될지……. 쯧쯧.”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자는 없었다. 식사가 끝나면 음괴가 출수한다는 의미이리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일까? 다급해진 정파인들이 매화사수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대협들, 음양쌍괴가 눈앞에 있는데 뭐하십니까?”
“어서 화산파의 위용을 보여주십시오!”
거듭된 요청에도 매화사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중간한 고수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그들은 달랐다. 음괴의 무공이 자신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강호에서 닳고 닳은 노련한 고수들이었기에 상황판단 또한 누구보다 빨랐다.
“단지 우린 지나가는 길이었소.”
“지금 사문에 시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소이다.”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넷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그 모습에 정파인들이 입을 떡하니 벌리며 당황했다.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멍한 얼굴로 어리둥절한 정파인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보고 사파의 무리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핫! 지금 천하의 매화사수가 도망을 친 거야?”
“하하! 내 평생 이런 광경을 볼 줄이야.”
“너희들은 이제 뒈졌구나.”
“암! 음괴 대협께서 식사가 끝나면 다 죽는 거지!”
당황한 정파의 무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화산파의 매화사수가 도망친 마당에 나설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설이 움켜쥔 그릇의 육수가 줄어들수록 그들의 마음도 타들어 갔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정파인들이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마치 쥐 떼가 흩어져 도망가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들의 모습에 사파인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
“하하! 내 평생 이렇게 통쾌한 순간은 처음이었소!”
“암, 그렇고말고. 사파의 영웅들이 이곳에 있는데 제깟 놈들이 뭘 어쩌겠소?”
타악-!
깨끗이 비워진 그릇이 탁상을 내려치는 소리였다.
“다 어디 갔어.”
유설의 농담에 사파의 무사들이 또 한 번 배꼽을 잡았다.
* * *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어디 원수가 한둘이었던가. 무림맹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기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의도한 만큼의 흔적을 남긴 이후에는 항상 경공으로 모두를 따돌리며 지역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이동하길 보름째.
모든 것이 소림사의 파계승을 유인하기 위해서였지만, 아직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섬서의 북부까지 이동한 후 장안을 빠져 나와 가옥촌으로 향할 때였다.
“할배, 저기 보여?”
경공을 멈춘 손녀가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광에 내력을 집중하자 유진산의 눈에도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구나. 저놈도 이미 날 발견했어.”
검집을 움켜쥔 누군가가 외길을 틀어막고 있었다.
건곤 문양이 새겨진 도사복은 분명 곤륜파의 복장이었다.
아무래도 흔적을 따라 경로를 예측한 무림맹이 고수를 준비시켜놓은 것이리라.
“어떡해?”
“둔황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쳐 가야 하는 길이다. 우리를 막는다면 쓰러트리고 갈 수밖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진산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그를 탐색해 보았다.
이 먼 거리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노려보고 있다니. 게다가 얼마나 자신이 있길래 혼자서 왔단 말인가.
왠지 찝찝한 마음에 쉽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때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도사가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음양쌍괴.”
백여 장이 넘는 거리였다.
작은 목소리가 이곳까지 돌려올 줄이야. 어마어마한 내가고수임이 틀림없었다.
“우리 기다리고 있었대.”
“아무래도 보통 놈이 아닌 듯하구나.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봐.”
긴장한 할아버지와 달리 유설은 몹시 흥분했다.
이미 등 뒤의 봇짐을 내려놓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사선으로 묶인 쌍룡창을 풀러 내기 위해서였다.
더군다나 이 상황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다니.
“이제 됐어~ 드디어 왔다고~”
모처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찾아와서 기쁜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손녀를 제지했다.
“네가 뭘 안다는 거야? 잠시 기다려봐.”
강적을 상대하기 전에 탐색은 기본이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곤륜파의 절대고수가 신묘한 보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용살창의 끝부분이 흔들리며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신병이기가 경고를 보내줄 정도로 강한 상대라니.
가까이서 그의 인상착의를 확인하게 된 유진산은 얼굴이 굳어졌다.
‘곤륜무제(崑崙武帝)?’
어찌 눈앞의 인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수십 년 전. 무림맹에 소속된 유진산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본 적이 있었다.
곤륜무제(崑崙武帝) 청진.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이었다.
그 무공과 명성이 하늘과도 같아서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존재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거물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유진산이 넋을 놓고 있었기 때문일까? 손녀가 옷깃을 슬쩍 잡아당겼다.
“할배, 왜 그래?”
그 순간 멍하니 있던 유진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대의 정체에 놀란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자신의 손녀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를.
“아무것도 아니다. 방심하지 말고 경계해.”
하지만 유진산이 방금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조금 전 자신에게 뿜어지던 곤륜무제의 기세를 손녀가 날려버린 것을 말이다.
그것을 느낀 곤륜무제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겁을 먹고 도망친 매화사수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음괴의 명성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정반대였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신예고수의 명성과 무공이 순식간에 무림의 최정점에 닿아 있었으니까. 무림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때 유진산이 손녀에게 한 손을 올려 보였다. 계속해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신호였다.
“싸워보면 생각이 또 달라질 게다. 겁도 없이 혼자서 온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겠지.”
곤륜무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명색이 곤륜산맥 일대를 주름잡는 일대종사였다. 지금껏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해온 자가 없었다.
“감히!”
쏴아아악-!
무지막지한 살기(殺氣)가 유진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원래대로였다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유설이 내뿜는 기운이 그것을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말이다.
“……?”
이제야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일까? 곤륜무제의 얼굴에는 의문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그와 손녀의 표정을 번갈아 확인한 유진산은 어깨에 힘을 주었다. 상황을 짐작한 것이다.
“먼저 좀 물어보지. 우리를 막아선 것은 무림맹의 지시인가?”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
하지만 대답하는 곤륜무제의 음성은 다소 격양되어 있었다.
“그 누가 내게 지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누군가가 지시할 수 있는 배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보만 듣고 단독행동에 나선 것이리라.
“그럼 우리를 막으려는 이유는?”
“수많은 악행을 자행한 너희들이 서역으로 도망치는 것을 두고만 볼 줄 알았더냐.”
궁금했던 것은 무림맹이 음양쌍괴를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지였다.
사막으로 향하는 이유가 서역으로 도망치기 위해서라니. 그들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목표가 안서도호부의 창룡대원들이라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진 셈이었다.
“지금껏 내가 죽인 놈들은 하나같이 죽을죄를 지었거나 먼저 공격하는 놈들뿐이었다. 무림맹의 기준에서는 그것이 악행인가? 주둥이로만 정의를 외치는 족속들이니, 뭐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겠지.”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 단지 지금까지는 곤륜파와 악연이 없었기에 기회를 한번 주고 싶은 거지.”
“무슨 소릴 지껄이든 악인과의 타협 따윈 없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나 악인이 되었단 말인가.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해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더는 무슨 대화가 필요할까.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유진산은 뒤로 다섯 걸음을 물러서서 손녀의 뒤로 이동했다.
이어서 전음을 보냈다.
- 아가, 준비됐지? 지금부터 할아버지 말을 잘 듣거라.
- 아직도 기다려야 해?
손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해둬야 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다고 한들, 경험의 차이는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곤륜파의 장기인 태허도룡검법(太虛屠龍劍法)을 익힌 녀석이다. 상대의 시선을 현혹하면서, 벼락처럼 급소를 공격하는 검법이라고 하니 조심하거라. 초식마다 허초 속에 실초가 섞여 있다고 하니 속으면 안 돼. 그리고…….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던 유진산이 입을 떡 벌렸다. 전음을 받던 대상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증발했기 때문이다.
불타오르는 투지를 더는 참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어느새 용화창이 만들어낸 꽃잎이 곤륜무제의 사방에서 만개하고 있었다.
섬전 같은 움직임은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쩌엉-!!!
둔탁한 폭음과 함께 곤륜무제의 신형이 십여 장을 주르륵 밀려났다.
그와 마주 선 유설이 용화창을 꼬나쥐며 울분에 찬 외침을 토해냈다.
“할배, 너무해!”
“뭐, 뭐가?”
도대체 손녀가 무엇 때문에 심술이 난 것일까.
다음 말을 듣게 된 유진산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리 다 말해주면 재미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