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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30화 (130/238)

130화 너희 둘뿐이니 (2)

평소 잠이 없는 유진산이었으나 이날만큼은 모처럼 숙면을 할 수 있었다.

낙타를 업고 온종일 사막을 헤집고 다녔으니 피곤할 수밖에.

대짜로 뻗은 그는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옆을 돌아보니 손녀가 자신의 팔을 베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가, 잠시 일어나 보거라.”

“……자는 거 아니야.”

대답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으며 눈은 여전히 감고 있었다.

“잠깐 일어나 보래도. 할 얘기가 있어.”

그 순간 유설이 옆으로 돌아누워 할아버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터업-!

“……나 지금 안 자. 눈만 감고 있는 거야.”

나긋한 표정과 입가에 흐르는 침을 보니 자는 것이 확실했다.

불문사자신공을 익히면 자면서도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놀랍기만 할 따름이었다.

유진산은 손녀의 머리 아래서 팔을 빼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질 않았다. 마치 만근의 바위틈에 낀 것처럼.

“이 녀석이 할아버지한테 힘을 써?”

급기야 내공도 사용해보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요지부동이었다.

들려오는 대답은 새근새근한 숨소리뿐.

“…….”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방도가 없었다.

유설의 경지라면 언제든 인위적으로 수면을 조절할 수 있을 터. 반응을 보니 좀 더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손녀를 일어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팔을 붙잡고 놔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여기 뭔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으응. 나도 알아.”

알고 얘기하는 건지, 꿈결에 대답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호흡을 고른 유진산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초랭이가 위험해.”

그 순간 누워있던 유설이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섰다.

“으응? 방금 뭐라고 했어? 무슨 일이야?”

쉽지는 않았지만, 아이를 깨우는 것은 성공이었다.

유진산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있는 놈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잠시 생각해보던 유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느꼈어. 수상해.”

“그렇지? 나가서 좀 살펴보자고. 뭐 하는 놈들인지.”

어제부터 유목민들의 정체가 궁금했던 유진산이었다.

그냥 무시하고 떠나도 되었지만, 왠지 찝찝한 마음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조손이 어젯밤 묵은 곳은 부락의 중심부에 있는 가장 작은 천막이었다. 그렇기에 나오자마자 주변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음…….”

기척을 죽인 둘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쓱 훑어보았다.

호수를 끼고 옹기종기 모인 이십여 채의 천막집들.

유진산이 느끼기에 주변에는 별다른 특이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초인적인 시력을 가진 유설은 작은 것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뭐가?”

유설의 검지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호수 옆의 어느 관목 아래. 모래를 뚫고 나온 작은 뼛조각 하나가 보였다.

“저기서 뭐 잡아먹었나 봐.”

단숨에 달려간 유진산이 손으로 바닥을 파헤쳐보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점차 싸늘하게 식어갔다.

파묻힌 뼈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익숙한 형태의 골격들.

어떠한 종류의 뼈 무덤인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할배, 이게 다 뭐야?”

뒤에서 손녀가 자라처럼 목을 빼고 묻고 있었다.

유진산은 얼른 모래로 흔적을 덮으며 대답했다.

“정말 나쁜 놈들이로구나. 여기서 원숭이를 잡아먹었어.”

“원숭이? 원숭이가 여기 어디에 있어?”

예전처럼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 유설이었다.

아니 오히려 믿는 게 이상할 터였다.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본 동물이라고는 늑대들뿐이었으니.

하지만 아이가 성장할수록 유진산의 기술도 늘어만 갔다.

“몰랐어? 사막의 호수에는 원래 원숭이들이 살아. 여기엔 다른 곳이랑 달리 나무들도 많지?”

“으응. 그럼 원숭이들이 다 죽은 거야? 나도 보고 싶은데…….”

“그런 것 같구나. 나중에 할아버지가 꼭 보여주마.”

“알았어. 근데 할배, 이제 우리 어떡해?”

내용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손녀의 등 뒤로 십여 장의 거리. 그곳에서 우람한 체구의 장한들이 인상을 쓰며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어젯밤에 얘기를 나눴던 족장도 보였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짓던 어제와는 전혀 상반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버릇이 없는 아이들이로구나. 먹여주고 재워준 답례가 남의 땅을 파헤치는 것이더냐.”

할아버지도 함께 욕을 먹었기 때문일까? 기분이 나빠진 유설이 쌍심지를 켜고 소리쳤다.

“그냥 궁금해서 좀 본 거예요! 원숭이는 왜 잡아먹었어요?”

족장이 유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허허. 원숭이라……. 척박한 이 땅에서 허기진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먹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더냐.”

유설이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그것은 출수해도 되냐는 눈빛이었다.

유진산은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이 어찌 나오는지 계속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그때 험악하게 생긴 중년인이 말 한 마리를 이끌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는 나랑 좀 같이 가야겠다.”

사람의 머리통만 한 손아귀가 유진산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곧이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는 말 안장 위에 철퍼덕 눕혀지고야 말았다.

“……?”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오늘부터 아주 멋진 삶을 살게 해주려는 거니까.”

유진산은 단숨에 눈치챘다. 이들이 자신을 어딘가로 팔아넘기려는 것임을.

그리고 이로써 확신할 수가 있었다.

‘역시나 유목민으로 위장한 도적 떼였군.’

아무래도 근방에 동업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낙타로 낭비한 돈과 여비를 보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터.

잠시 고민하던 그는 우선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할아버지는 잠깐 따라가서 살펴보고 와야겠다. 같이 가고 싶으면 얘기해.

유설은 할아버지가 일부러 잡혀가는 척 연기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도적들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굳이 따라 가봐야 재밌는 일도 없을 터.

- 나는 호수에서 헤엄치고 놀고 있어도 돼?

그동안 물가에서 놀 기회가 없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한창 놀아야 할 나이였으니.

유진산은 손녀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뭐든지 다 들어주고 싶었다.

- 혼자서 괜찮겠어?

- 응. 근데 이 원숭이 먹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 나도 잡아먹으려고 하면?

-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대로만 해. 적당히…….

어느 곳에 내놓아도 걱정 없을 손녀였지만, 잠시라도 혼자 남겨두는 것이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설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어서 다녀오라고 손짓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적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웃어? 동생이 끌려가는데?”

어디 유설뿐이겠는가. 유진산 또한 조금의 반항도 하지 않았다.

보통은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려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어서 출발하라는 듯 말 위에서 자세를 바로 하고 있다니.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설마 너무 무서워서 정신 줄을 놓은 것인가?

사내아이를 태운 도적이 동료 둘과 함께 시야에서 멀어져갈 때였다.

“어어?”

“설마 너 지금 동생한테 잘 가라고 손 흔든 거냐?”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목이 한숨을 푹 내쉬며 부하들을 나무랐다.

“그러게 애들한테 겁주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미치면 제값 못 받는 거 몰라?”

염소처럼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반문했다.

“예에? 저희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됐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꾸나. 고 녀석 비실댔어도 살은 제법 토실하던데 말이야. 손질은 마쳤겠지?”

“아직 준비 중일 텐데, 일단 들어가시죠. 고기는 자리에서 바로 떠서 먹는 게 더 맛있지 않습니까? 흐흐.”

고개를 끄덕인 두목은 뒷짐을 쥔 채 유설에게 눈짓을 보냈다.

“따라오너라. 우선 배부터 채우자꾸나.”

식사를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유설은 얼떨결에 장한들의 틈새에 껴서 이동했다. 어젯밤에 들어갔었던 음식을 준비하는 천막이었다.

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왠지 모르게 점점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천막으로 다가갈수록 익숙한 냄새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장서서 걷던 도적이 입구를 걷어내는 순간이었다.

“초, 초랭이……?”

한쪽에 눕혀져 있는 익숙한 모습의 낙타.

숨이 끊어진 초랭의 모습을 본 유설은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낙타 앞에는 비대한 몸집을 지닌 중년인이 날카로운 단도를 움켜쥔 모습이었다.

“막 손질하려던 참이었으니 어서들 앉아요.”

도적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그 시각. 유설은 터벅터벅 초랭의 앞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낙타를 붙잡은 유설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어있었다.

“초랭아, 엄마가 미안해…….”

그 모습을 보게 된 도적들은 배꼽을 잡았다.

“푸하하하! 지가 엄마래.”

“낙타 엄마? 푸하핫!”

“크하하!”

천막 안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웃음소리는 누군가의 분노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잠시 후 낮게 깔린 유설의 한마디가 조용히 장내를 울렸다.

“……죽었어.”

긴 탁상의 상석에 앉은 두목이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그래 죽었지, 초랭이. 근데 지가 스스로 혼자 죽은 거야.”

착각은 자유라고 했던가. 유설이 죽었다고 한 대상은 낙타가 아니었다.

“거짓말하지 마!!”

“……?”

찰나의 순간 아이의 전신에서 황금빛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거센 돌풍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는 천막. 그 틈에서 도적들이 뒤섞여 나뒹굴었다.

“크악!”

“큭!”

“뭐, 뭐야?”

바닥에 널브러진 도적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앞에는 분노의 화신이 된 유설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있었다.

* * *

한편 도적의 가랑이 사이에서 말을 타고 있던 유진산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뭉게구름 하나가 손녀의 얼굴이 되어 눈앞에 아른거렸다.

‘우리 설이, 지금쯤이면 호숫가에서 헤엄치고 있겠지?’

항상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떨어진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았지만, 쓸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비록 흉악한 놈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음양쌍괴의 기준에선 사막의 모래알 같은 존재들이었다.

신경 쓸 가치조차 없었으며 무시하면 그뿐이었다.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뒤에 있던 놈이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두목께서 너의 근골을 알아보고 네 인생에 꽃길을 열어주려는 것이니까.”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대꾸할 가치조차 없었다.

“…….”

“어른이 얘기하면 대꾸를 해야지? 쪼그만 게 싸가지 없이.”

유진산은 몇 번이나 고민했다. 그냥 이놈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다시 손녀에게 돌아갈지를.

그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형님!!!”

등 뒤의 놈이 갑자기 손을 흔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전방으로 삼십여 장.

돌산 아래로 보이는 석굴의 입구 앞에 누군가가 월도를 움켜쥐고 있었다.

가벼운 경장 차림에 입은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으며, 곳곳에는 무공을 수련한 티가 완연했다.

그자는 자신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겨우 한 명뿐인가?”

“섭섭하게 겨우라니요? 최소한 열 명분의 값어치는 하는 녀석입니다. 저희 두목께서 직접 타고난 무골이라고 하셨어요.”

유진산은 말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왔다.

얼굴을 가린 녀석이 온몸을 더듬거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믿을 수 없군. 마치 환골탈태를 겪은 것처럼 완벽한 근골이구나.”

“하하. 그렇죠? 얼마나 쳐주실 겁니까? 이 정도면 적어도…….”

그는 말을 이어가다 말고 입을 떡하니 벌렸다. 상대가 무려 금자를 세 냥이나 내밀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열 배는 많은 액수였다.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건 이게 전부로군. 부족하면 얘기하거라.”

도적은 복면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의 손아귀에서 냉큼 금자를 낚아챘다.

“아이고, 형님이 제시하는 가격에 제가 의문을 품은 적이 있습니까? 그저 감사합죠!”

“그럼 거래 성립으로 알겠네. 볼일 끝났으면 어서 가봐.”

“예, 예.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형님!”

말 머리를 돌린 그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한시라도 빨리 부락으로 돌아가 두목에게 거래성과를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적이 떠나기 무섭게 유진산은 석굴로 끌려 들어갔다.

잠시 후 안에서 목격하게 된 충격적인 광경에 그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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