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악당 대 악당 (1)
마치 폭포가 역류하듯 거센 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물줄기를 뚫고 나온 권풍이 창룡대원의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쩌억-!!!
유설이 내지른 극성의 백보신권이었다.
“꺽!”
숨 막히는 비명과 함께 상대의 신형이 튕겨 날아갔다.
본디 소림사의 무공이었지만, 빠르기와 파괴력은 본래의 위력을 초월해 있었다.
털썩-!
창룡대원이 모래 위에 철퍼덕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산이 내달렸다.
이어서 그의 몸에 올라타고는 주먹을 마구 날려댔다.
퍼퍽-! 퍼퍼퍽-!!
내공이 실린 주먹은 순식간에 상대의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잠시 후 그의 몸이 축 늘어지고 나서야 유진산의 공격이 멈추었다.
“이놈아, 내가 얘기하지 않았더냐. 곧 죽을 사람은 바로 네 녀석이라고.”
숨을 헐떡이는 창룡대원은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 이해조차 되지를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한 방에 당할 줄이야 어찌 상상했겠는가.
“……끄으.”
그는 다시 일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전투불능이 된 것이다.
유진산은 잠시 고개를 돌려 호숫가를 바라보았다. 물속에서 손녀가 통나무를 끌어안고 히죽 웃고 있었다.
“아가, 이 못된 놈이 적인 줄 어떻게 알았어?”
“목에 도마뱀!”
그 짧은 순간 옷깃에 드러난 용 문신을 확인하고 상황을 파악하다니. 그야말로 대단한 눈썰미였다.
유진산의 시선이 다시 좌측으로 향했다.
삼십여 명의 도적들이 일렬로 무릎을 꿇어앉은 채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어찌나 맞았는지 두 눈과 입술은 퉁퉁 불어터지고, 이빨은 몇 개씩 날아간 모습이었다.
‘대체 우리 설이한테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렇게 맞았지?’
어느 정도 예견했던 일이었지만, 저토록 처참하게 두들겨 맞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놈들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유목민으로 위장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납치해서 팔아넘기다니.
손녀의 손에 걸렸기에 목숨이라도 건진 것이지, 자신이 직접 나섰으면 한 놈도 살려두지 않았을 터였다.
그는 다시 창룡대원의 앞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
“이봐, 무림맹의 사냥개. 너처럼 정체를 숨기고 나랏일에 간섭하는 놈들이 얼마나 되지?”
“…….”
예상대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단지 자신이 아는 정보에 놀랐는지 눈만 끔뻑이고 있을 뿐.
그런 그를 향해 유진산이 눈을 부라렸다.
“이 몹쓸 놈들아. 백성이 사는 세상과 무림은 엄연히 다른 세계이거늘, 어찌 선을 넘어 세상을 혼탁하게 하느냐.”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의 모든 것이 무림과 이 나라를 위해서임을.”
그야말로 기가 찬 궤변이었다.
하늘 높이 치켜세워진 작은 손아귀가 그의 따귀를 날렸다.
철썩-!
내공이 실린 손짓이었기에 그의 목이 꺾일 듯이 돌아갔다.
“이놈! 도적들을 도와 백성을 팔아넘기는 짓이 어찌 모두를 위한 것이란 말이더냐!”
“…….”
도대체 얼마나 세뇌를 당한 것일까?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벌이는 짓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일 뿐이다.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자금 확충은 불가피하니까.”
“네놈들의 행동에 무슨 대의 따위가…….”
유진산은 말을 하다 말고 뒷목을 잡았다. 이렇게 대화하고 있다간 주화입마에 빠질 것만 같았다.
어차피 심문해도 궁금한 정보는 나오지 않을 터. 고문해도 소용이 없을 놈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유진산은 그의 따귀를 마구 후려쳤다.
철썩-! 철썩-! 철썩-!!
얼마나 때렸을까? 오른손이 피에 흠뻑 젖고 나서야 그의 손짓이 멈추었다.
그는 창룡대원의 관복에 손을 닦으며 옆을 쓱 바라보았다.
“너희들, 이놈 알지?”
유진산의 한마디에 무릎을 꿇고 있던 도적들이 흠칫 놀랐다.
그가 비록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겉모습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기회를 한 번 주마. 너희들 중 살고 싶은 놈은 이 녀석에 대해 아는 대로 고하거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러 명이 벌떡 일어섰다.
서로의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한 명만 제외하고 다시 꿇어앉았다.
얼굴이 처참하게 망가진 백발의 노인.
손녀에게 어찌나 맞은 것인지 이빨은 두 개밖에 안 남았으며, 코는 주저앉은 몰골이었다.
자세히 보니 도적 떼의 두목이었다.
“저, 저놈은 도호부의 교위 방충입니다!”
교위라면 전장의 일선에서 병사들을 통솔하는 지휘관이자 무관이다.
안서도호부의 수장인 도호의 수족 같은 존재이리라.
“그래, 계속 말해봐. 이놈이 어떤 녀석인지. 그리고 주변에는 누가 있는지도.”
그 순간 누워있던 방충이 두목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발설하면 죽이겠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협박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미 그가 단방에 고꾸라지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도적들에게 있어서 호숫가에서 헤엄치고 있는 여자아이는 공포 그 자체였다.
“아주 못된 새끼입니다. 저희에게 납치를 강요하고, 노예상들의 뒤를 봐주는 죽일 놈이지요. 도호부에 저런 놈이 몇 명 더 있습니다.”
도적 떼의 두목은 쉬지 않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삶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을까? 동업자이자 뒤를 봐주는 관원을 팔아먹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줄줄이 얘기할 정도로.
방충의 행적은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근골이 뛰어난 아이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납치하는 한편, 그 외에는 서역의 노예로 보내는 데 동조하여 금전적 이익까지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용을 종합해본 결과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방충과 같이 행동하는 도호부의 교위들. 최소한 그들 중 셋은 창룡대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놈들의 위에는?”
“예에. 당연히 천하의 쓰레기인 도호가 있지요. 아주 손속이 잔인하고, 독사 같은 놈입니다.”
“너한테서 쓰레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라면 안 봐도 훤하겠구나. 그 정도면 되었다.”
“도움이 되셨다니 영광입니다.”
더는 알아낼 정보가 없을 듯했다.
유진산은 흡족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 노력을 봐서 너희들에게 기회를 한 번 주마. 어서 무기를 들어라.”
갑자기 무기를 들라니. 기회라는 것이 결투란 말인가? 싸울 수 있는 의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살, 살려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순간 유진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가 발출한 압도적인 기세에 도적들은 순순히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뭐라도 해봐야 할 터.
엉거주춤 무기를 하나씩 찾아든 도적들은 유진산을 향해 겨누었다.
“너희들 지금 미쳤느냐. 정녕 노부와 싸우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다.”
“……예?”
그들은 유진산의 뜻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노예상의 석굴로 앞장서거라.”
“거, 거긴 왜…….”
“지금부터 너희들이 그놈들하고 싸워야 하니까. 그리고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살길임을 명심해.”
“…….”
두목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동업자를 공격하기가 껄끄러워서가 아니었다. 인원은 자신들이 많았지만, 그곳의 무사들에 비교하면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음양쌍괴와 싸우는 것보다는 생존확률이 백만 배는 높을 터.
“잠시 저희끼리 상의 좀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던지.”
두목은 부하들을 한 데 불러놓고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동업자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공격할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을 뒤로한 유진산은 잠시 자리를 비켜 손녀에게 다가갔다.
“할배!”
거리가 가까워지자 호숫가에서 유설이 물을 뿌려댔다.
고사리 같은 손아귀가 밀어내는 물살이었지만, 그것은 오 장을 날아 유진산의 옷을 흠뻑 적셨다.
굳이 피할 필요는 없었다. 무더운 사막에서 시원한 물줄기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줬으니.
기어코 유진산은 출발을 잠시 늦추기로 결심했다.
모처럼 손녀와 놀아줄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이 녀석, 감히 할아버지를 공격해?”
“히히히.”
유진산의 신형이 호숫가를 향해 질주했다.
그가 몸에 물을 담그기 무섭게 유설이 날린 물세례가 파도처럼 덮쳐왔다.
“으악!”
최소한 오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이렇게 물속에서 근심 없이 놀아본 지가.
그래서일까? 손녀에게 물을 뿌려대는 유진산도 입가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도적들이 도망칠 것을 걱정할 염려는 없었다. 뛰어봤자 벼룩이었으니.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다가올 싸움 준비에만 전념하는 모습이었다.
* * *
이름 모를 석굴의 입구에서부터 백여 장이 떨어진 모래언덕 아래.
일단의 무리가 모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날이 휜 월도를 하나씩 움켜쥔 도적 떼였다.
교위 방충은 부상 때문에 주저앉아 있었으며, 유진산과 손녀는 느긋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너희들이 살 길은 이기는 것뿐이다. 어서 시작해.”
전투방식은 자유.
유진산은 그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싸우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모래언덕을 넘어 말을 탄 기수 한 명이 석굴로 다가갔다.
“형님!!”
거리가 가까워지자 입구를 지키던 무사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 혼자서.”
말에서 내린 도적은 보자기로 감싼 무엇인가를 손에 들고 다가갔다.
“저희 두목께서 보낸 선물을 좀 가져왔습니다. 이번에 값을 많이 쳐주셨잖아요.”
“그만큼 보통 놈이 아니었지. 근데 도망쳤어, 그 새끼.”
도적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어떻게 그럴 수가.”
“신경 쓸 것 없어. 방 교위가 쫓아갔으니, 곧 잡아 오겠지. 근데 얼굴은 왜 그 모양이야? 아주 말발굽에 짓밟힌 몰골인데?”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그나저나 형님, 일단 이거부터 좀 받으시죠?”
“뭘 가져온 건데?”
그 순간 멀리서 지켜보던 유진산이 손녀의 앞을 슬쩍 가렸다. 뒤이어질 장면을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보자기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단도가 무사의 왼쪽 가슴에 틀어박혔다.
푸욱-!
“크윽!”
“뭘 자꾸 물어봐요? 선물이라고 했잖아요.”
정상적으로 둘의 실력은 비교할 수 없었다. 단지 그 차이를 수단으로 메꿨을 뿐.
풀썩-!
상대가 쓰러지자 암습을 가한 도적이 신호를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산의 옆에서 대기하던 도적들이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맨 뒤에서 얼굴이 퉁퉁 불어터진 두목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약속 꼭 지키십시오.”
“그래. 이긴다면 우리가 너희를 죽이는 일은 없을 게다.”
도적들과 노예상단의 싸움.
머릿수는 도적들이 우세했으나, 노예상단에서 고용한 무사들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이 석굴의 입구로 사라지자, 유진산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잘 새겨듣거라, 아가. 할 수만 있다면 직접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 최고인 게다. 병법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두고…….”
그때 유설이 할아버지의 말을 가로챘다.
“이이제의?”
유진산이 흠칫 놀라며 손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려주지 않은 병법을 알고 있다니. 비록 완벽히 맞추진 못했지만 대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유설이 어깨를 으쓱하며 배시시 웃었다.
“난 다 알아.”
타고난 체질 덕택인지 한 번 들은 것은 절대 잊어먹지 않는 아이였다. 아마도 다른 어른들에게 어렴풋이 들어본 모양이었다.
“역시 우리 설이 정말 대단하구나. 굳이 저딴 놈들에게는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어.”
“흐히히. 저 아저씨들이 이길 것 같아?”
“글쎄 모르겠구나. 안에 있는 놈들도 만만치는 않아. 아무래도 둘 중에서 좀 더 비열한 쪽이 이기겠지.”
“근데, 할배. 이기고 나오면 정말 보내줄 거야? 나쁜 사람들이잖아.”
유진산은 즉시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할아버지 손으로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지, 그냥 보내준다고 한 적은 없지 않느냐.”
“그럼?”
“결과를 보고 얘기해주마. 가서 상황을 좀 보고 올 테니, 여기서 이놈 꼼짝 못 하게 잘 감시하고 있어.”
석굴의 내부에서부터 들려오는 비명과 병장기 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고비사막의 도적 떼와 노예상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리라.
유진산은 그곳을 향해 느긋한 걸음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뒤에선 홀로 남은 손녀가 눈에 불을 켜고 방충을 감시하고 있었다.
곤죽이 된 방충이 석굴이 있는 방향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릴 때였다.
“어허. 그대로 가만히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