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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33화 (133/238)

133화 악당 대 악당 (2)

유진산도 상황이 궁금했다.

석굴의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진득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아직 어느 한쪽도 승기를 잡지 못한 것일까? 싸움은 길어지고 있었고, 욕설과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처참한 몰골로 통로에 널브러진 시신들.

깊이 들어갈수록 도적들의 시체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비겁한 수단으로 수준 차를 메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지.’

노예상의 무사들에게 도적들이 밀리고 있는 것이리라.

줄지어 늘어선 감옥에서는 수감된 자들이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 낯이 익은 인물도 보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는 자신과 이곳에서 잠시 얘기를 나눴던 상인이었다.

“오오! 신이시여, 드디어 저를 구하러 돌아와 주셨군요!”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나 별난 놈은 기억에서 거의 없을 정도였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꺼내줄 터. 피곤한 대화는 사양하고 싶었기에 걸음을 빨리했다.

상인 녀석이 계속 소리쳐 부르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빨리 저를 꺼내주십시오! 저 여기에 있습니다!”

일반인이 무림고수를 마주하면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치근덕거리다니. 여간 성가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놈은 꺼내줄 때 아혈을 눌러야겠구나.’

아혈(啞穴)을 짚이면 한동안은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통로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드넓은 석실이 이어졌다.

이곳에선 지금 살아남은 양쪽 패거리가 마지막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들어와, 새끼들아!”

“감히 뒤통수를 쳐? 너넨 이제 뒈졌다.”

칠(七)대 사(四)의 싸움. 머릿수는 도적들이 더 많았지만, 노예상의 무사들이 좀 더 노련했다.

유진산은 잠시 그들의 칼부림을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난잡하고 허접스러운 싸움이었다.

흥미가 생길 리가 없었다. 게다가 밖에서 손녀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만!!”

중후한 내공이 실린 고함에 석굴 전체가 진동했다.

혼란스러웠던 전투가 잠시 멈추자 반응이 엇갈렸다.

가장 먼저 도적 떼의 두목이 고개를 조아리며 굽신거렸다.

“오, 오셨습니까?”

유진산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만하면 되었다. 모두 무릎을 꿇거라.”

털썩-!

일곱 명의 도적은 망설임 없이 꿇어앉았으나, 노예상들은 달랐다.

영문을 모르던 노예상의 단주는 깊게 고민했다.

방충을 따돌리며 이곳에서 탈출한 아이였다. 그런데도 제 발로 돌아왔다면 고수가 분명할 터.

도적들의 반응까지 보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석굴을 진동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내공까지.

‘도대체 정체가 뭐지?’

척 봐도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도해보지도 않고 무릎을 꿇기엔 너무 억울했다. 지시에 따른다고 한들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고민하던 단주는 좌측에 있던 무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 네가 저 꼬마를 맡아라. 그럼 내가 무릎 꿇은 이 병신들을 쓸어버리마.

유진산의 무공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려는 속내였다.

단주의 명령을 받은 무사는 찝찝했는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끝내 결심을 굳힌 그가 결연한 눈빛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발을 박찼다.

“뒈져!”

호기롭게 달려들던 그는 있는 힘껏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상대는 하수라고 봐주는 인물이 아니었다.

상체를 낮춘 유진산은 전광석화처럼 그에게 접근하여 손바닥을 내질렀다.

쩌엉-!

유가건곤장을 정통으로 맞은 무사는 삼 장을 날아 석실의 벽에 등을 부딪쳤다.

콰앙-!!

비명조차 없었다. 즉사한 것이리라.

“…….”

몸이 축 늘어지는 무사를 보며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모두의 시선이 노예상의 단주를 향했다. 어찌할 것이냐 묻는 눈빛으로.

하지만 조금 전까지 그의 눈빛에 서려 있던 투지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을 알아챈 것이다.

“……일단 꿇자꾸나.”

단주의 명령에 좌우의 무사들도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유진산은 석실의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가지런히 쌓인 포박용 밧줄들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그들에게 던졌다.

“지금부터 서로의 손목을 묶는다. 요령 피우는 놈이 있으면 각오하거라.”

“…….”

압도적인 무력을 보았기 때문일까? 반항하는 인물은 없었다.

다만 마지막 한 놈은 유진산이 직접 묶어줘야 했다.

* * *

모든 것이 일식경도 안 돼서 정리되었다.

들어갈 때는 혼자였으나, 나올 때는 인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에 갇혀 있던 무고한 사람은 무려 사십칠 명.

도호부가 뒤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일까? 노예 거래의 규모가 굉장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쪽에는 포박당한 도적과 노예상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출발하자꾸나, 아가.”

바로 옆에서만 들릴 정도로 작은 유진산의 중얼거림.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저 멀리 모래언덕에 있는 누군가의 귀에 똑똑히 전달되었다.

“할배!”

모래언덕 위에서 유설이 누군가의 뒷덜미를 움켜쥔 채 질질 끌고 달려왔다.

“수고했다. 잘 지키고 있었구나.”

“응. 이 아저씨는 어떻게 해?”

모두가 모랫바닥에 등을 쓸면서 끌려온 인물을 바라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얼굴과 너덜너덜해진 관복.

모두가 한 번씩은 봤던 인물이었다.

“……헉!”

“저, 저자는?”

노예상의 뒤를 봐줬던 도호부의 교위 방충. 가공할 무력을 지닌 그가 이렇게 처참한 상태로 잡혀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가장 놀란 인물은 노예상의 단주였다.

등 뒤로 양손이 묶인 그가 유진산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를 어디로 끌고 가시려는 겁니까?”

자신들의 운명이 궁금할 수밖에.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둔황으로 간다.”

찰나의 순간 단주의 얼굴에 회심의 표정이 서렸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그것을 눈치 못 챌 유진산이 아니었다.

둔황성은 도호부가 주둔한 곳이다. 무예를 익힌 장수들을 포함해 어마어마한 병사들이 있을 터.

그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리라 짐작하고 있는 것이리라.

“저쪽 방면으로 곧장 가면 반나절 안에 도착합니다.”

단주는 턱짓으로 둔황의 위치를 안내해주기까지 했다.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유진산은 주위를 쓱 둘러보며, 이곳에서 탈출한 인파에게 말했다.

“무림에서는 우리를 음양쌍괴라 부르고 있소.”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내공이 실려 있기에 모두의 귀에 똑똑히 전달되었다.

“……무림?”

“음양쌍괴?”

이곳에서 갓 탈출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무림에 대해 저마다 소문을 들어봤던 터였다. 그리고 그들만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들도.

그래서인지 더는 음양쌍괴를 아이로 보는 인물은 없었다.

겉모습과 다른 비범한 풍채와 연륜이 녹아든 말투. 그것은 아이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곳에서 몰수한 자금과 물자를 나눠드릴 테니, 원하는 자들은 이대로 떠나시오. 하지만 억울함을 풀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 둔황으로 가도 좋소.”

모두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비록 둔황에 관군이 있지만, 그들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무림의 고수가 자신만만하니 긴가민가할 수밖에.

무엇보다 홀로 길을 나섰다가 또다시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공존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는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유진산의 옆으로 이동하며 쉬지 않고 입을 뻥긋거렸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저도 이대론 억울해서 못 참겠어요!”

“나도 갑니다!”

하나둘씩 합류하는 인파들.

유진산은 많아야 삼 할 정도를 예상했지만, 무려 칠 할 이상이 합류했다.

계획했던 인원보다 많이 모였으니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제 출발합시다. 못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러.”

* * *

둔황성은 서역으로 통하는 문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여러 의미에서 중요도가 높기에 많은 수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토성의 성문 아래.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눈을 비비고 있었다.

“뭐,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인파의 조합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남녀노소가 뒤섞인 일반인들, 그리고 포박당한 도적들까지. 저마다 복장이 제각각이었다.

선두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웬 여자아이였다.

힘이 어찌나 센지 누군가를 모랫바닥에서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 손으로 말이다.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경종을 울리기엔 모두가 비무장이었다.

영문을 모르던 병사들은 우선 성문이라도 닫아버렸다.

잠시 후 거리가 십여 장 이내로 가까워졌을 때쯤이었다.

“문 열어요. 우리 들어가야 하니까.”

꽤 먼 거리였지만, 유설의 목소리는 병사들의 귓가를 후비고 있었다.

상황이 너무나 황당했는지 병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잠시 후 곤죽이 되어 있는 관원의 얼굴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교, 교위님……?”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방충의 얼굴을 알아본 병사들이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들은 인파의 선두가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이거 왜 이래?”

“몸, 몸이 안 움직여.”

“……너도?”

현경의 기운이 그들의 사지를 옥죄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무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를 비집고 유설이 힘으로 밀고 들어갔다.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어리둥절하며 소리쳤다.

“뭐야?”

“밑에 무슨 일이야?”

어느 틈에 올라왔는지 경계병들의 사이에는 유진산이 끼어있었다.

“아가, 이놈들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열거라!”

“알았어.”

황군이 지키고 있는 궁성이라면 모를까. 변방의 병사들 따위에게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대다수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삼류의 수준이었다.

유진산의 신형이 벼락처럼 움직이며 병사들의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푹-! 푸푹-!!

성벽 위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점혈을 당했다.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는 서쪽 성벽이었다면 이런 방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경계가 허술한 중원 방향의 동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계병들을 제압하던 중 밑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콰아앙-!!!

성문이 부수어진 소리이리라.

곧이어 임무를 완수한 유진산이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손녀를 제외한 모두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설마하니 음양쌍괴가 이런 식으로 강행 돌파할 줄 어찌 상상했겠는가.

“자 이제 들어가요, 우리.”

비록 둔황은 작은 성이지만, 문물의 중심지로 상업이 발달한 곳이다.

천둥소리만큼이나 거센 굉음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상인들과 거주민들. 그리고 성내에 대기하던 주둔군까지.

적막 속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

그때 어디선가 장교 한 명이 달려오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포위하라!”

이 순간에도 몰려드는 병사들의 수는 점점 불어났다. 그들은 이곳으로 들어온 인파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소란이 거세지는 틈에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유진산이 은밀히 몸을 날렸다.

타앗-!

지상으로 내려선 그는 관군을 향해 다가가며 소리쳤다.

“여러분들, 저희는 납치를 당했다가 지금 탈출해온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외침에 유설이 동조하며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했다.

“저도요. 너무 무서웠어요.”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반인들이 술렁였다.

“세상에…….”

“저 아이들이 납치를 당했었다고?”

“흉흉하던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어?”

“쯧쯧. 저 불쌍한 것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꼬…….”

그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석굴에서부터 함께 따라온 인파가 앞다퉈 나서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이 도적놈들이 우리를 납치하고 저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리고 이 새끼가 뒤를 봐주고 있었어요!”

“우리를 팔아넘기는 데 관원이 도와주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내막을 듣게 된 상인들이 뒤이어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런 천벌을 받을 놈들!”

“캬악, 퉤!”

“어서 저 나쁜 놈들을 끌고 가지 않고 뭣들 하십니까?”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병사들은 쉽사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방충이 자신들의 상관이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고강한 무공을 지닌 그가 어떻게 이렇게 인사불성이 되어 있다는 말인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황당한 것은 멀쩡했던 성문이 이유도 없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부분이었다. 충차(衝車)로 수십 번을 두들겨야 열릴까 말까 할 성문이 말이다.

이 상황을 설명해줘야 할 수문병들은 마치 얼음처럼 얼어붙어만 있었다.

병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어디선가 누군가의 호통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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