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좋은 형이었어 (2)
목적을 달성한 조손은 다시 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또다시 마주하게 된 고비사막. 이번엔 경공으로 달리고 있었기에 꽤 속도감 있게 나아갔다.
그렇게 반 시진을 쉬지 않고 이동했을 때였다.
“아이고, 힘들다.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응.”
유진산은 대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손녀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 왔어?
- 응, 쫓아왔어. 뒤쪽 바위에 숨어 있는 것 같아.
예상대로 정혜가 쫓아오고 있었다.
단신으로 소림사에 침입하여 불상들을 부수고 나올 정도로 앞뒤 안 가리는 미친 파계승이었다. 그런 그가 바위 뒤에 숨어만 있다니.
그만큼 손녀가 무서운 것일까?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유진산이 나직이 물었다.
“우리 설이는 나중에 커서 뭘 하고 싶어?”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유설은 미리 생각해놓은 게 있었다는 듯 즉각 답했다.
“호위무사. 나는 할배의 호위무사가 될 거야.”
“겨우? 꿈은 크게 가져야지.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뭐 없어? 장군이나 공주나 뭐 그런 거 말이다. 할아버지가 도와줄게.”
“아니야. 다른 건 없어.”
내심 흐뭇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는 일. 앞으로 차차 생각해볼 문제였다.
때가 무르익자 유진산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일단 물 좀 건네주거라. 모처럼 전력으로 달렸더니 목이 타는구나.”
유설이 등 뒤에서 봇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뒤적거렸다.
그러길 잠시 후.
“큰일 났어, 할배! 우리 물 안 샀잖아.”
연기가 제법이었다. 유진산도 질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거 큰일이구나. 최소한 반나절은 더 달려야 하는데…….”
“어떡하지?”
“할아버지는 너무 목이 말라서 안 되겠어. 이거 다시 돌아가야겠는데?”
“아니야. 나 혼자 뛰어갔다 올게. 일각이면 사 올 수 있어.”
반 시진 동안 달려온 거리를 일각 안에 왕복한다니. 유진산으로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응, 금방 다녀올게. 이거 가지고 있어.”
봇짐을 건네받은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유설의 신형이 빛의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파앙-!
손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진 불과 한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어찌나 빠른지 지나간 자리로 돌풍이 불어닥칠 정도였다.
홀로 남겨진 유진산은 쪼그려 앉아 봇짐을 뒤적거렸다.
“아이고, 역시 손녀가 최고구나. 나도 어서 불문사자신공을 익혀야 날아다닐 텐데.”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는 서책 한 권이 들려져 있었다.
중간쯤을 펼친 그는 책을 소리 내서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이 절세신공을 익히면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의 감각이 깨어나 보지 않아도 볼 수가 있고, 듣지 않아도 들을 수가 있다? 거참 놀랍구만.”
유진산은 중얼거리면서도 은밀히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서책을 한 장 더 넘겼다.
“다음은 제8식인 아라야식(阿羅耶識)이로구나. 이 단계에 이르면 인간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잠재의식이 깨어나 삼라만상의 근본에 통달한다라. 으음. 여기가 바로 우리 설이가 도달한 화후로구만. 그럼 제9식은…….”
다음 말을 이어가려던 유진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먼 곳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내 보물 돌려줘!”
수십 년간 숭산을 떠돌던 파계승 정혜. 드디어 그가 나타난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던 그가 돌연 우뚝 멈춰섰다. 유진산이 오른손으로 서책 수십 장을 구겨 잡았기 때문이다.
“한 걸음만 더 다가와 보거라. 확 찢어서 뿌려버릴 테니.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순서를 맞추지 못할 게다.”
“안, 안 돼…….”
당황한 정혜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것을 보니 몹시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미 역근경이라는 절세신공을 익히고 있으면서도 왜 다른 것을 탐내는 것이냐.”
역근경이 무엇인가. 달마조사가 남긴 소림사의 최고절학이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문사자신공을 탐내다니.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그는 어린아이처럼 악을 써댔다.
“내 거니까 돌려줘!!”
“안 돼!”
눈앞의 파계승은 무림의 십대고수에게도 밀리지 않을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자신은 몇 수도 버텨내지 못할 만큼.
하지만 유진산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근처 어디선가 손녀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반면 정혜는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형, 제발 돌려줘…….”
위험한 인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싫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악연이라 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
그에게 받은 대환단으로 손녀의 내공이 증진되었으며, 비급까지 손에 넣을 수가 있었으니까.
‘심성은 나쁘지 않은 자이지만, 정신이 온전치 않은 자와 어찌 절세신공을 공유한단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그전에 하나만 약속하거라.”
“돌, 돌려줄 거야?”
“생각 중이다. 내 손에 있는 이 서책만 넘겨주면 다신 쫓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럼 네게 주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상을 짓던 정혜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알았어. 약속할게, 형!”
“그래, 그 말 꼭 지켜야 한다.”
유진산은 손에 쥐고 있던 서책에 내공을 담아 우측으로 힘껏 던져버렸다. 마치 암기라도 던지듯이.
휘리리릭-!!
하늘을 나는 새처럼 빠르게 멀어지는 서책 한 권.
쏜살같이 달려간 정혜는 단번에 그것을 낚아채 버렸다. 그러고는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유유히 사라져갔다.
뒷짐을 지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진산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저렇게 잘 속아 넘어가는 녀석에게 뭘 믿고 절세신공을 넘겨주겠나.’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근처에 숨어 있던 유설이 다가와서 물었다.
“비급은 할배가 다 태워버렸잖아. 그럼 뭘 준 거야?”
“음. 표지만 뜯어낸 백보신권이었다. 우린 이제 필요 없잖아.”
정혜가 백보신권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서 사라졌던 그가 미친 듯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내 보물 내놔!!”
벼락처럼 달려온 그였지만, 삼 장 이내로는 접근을 못 하고 있었다. 유설이 할아버지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나랑 약속하지 않았더냐. 내 손에 있는 비급만 넘겨주면 다시는 쫓아오지 않기로 말이다.”
“나쁜 형, 나를 속였잖아!”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불문사자신공은 이제 세상에 없는 비급이다. 너무 위험한 물건이라 태워버렸어.”
사천성의 현자(賢者)인 사마현의 조언에 따라 진작에 없애버렸다. 원본은 물론 해독본까지.
정혜는 몹시 충격을 받은 듯 걸음을 비틀거렸다.
“……형, 나 그게 꼭 있어야 해. 또 날 속이는 거지?”
“하늘에 맹세코 사실이야.”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일까? 정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 돌연 그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끄흐흑.”
소리 내어 우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유진산의 마음도 짠해졌다.
“왜 그래, 동생. 한때 강호를 호령했던 소림사의 기둥이 이렇게 울면 안 되지.”
“기둥이…… 기둥이 부러졌단 말이야!”
정혜의 과거는 흑야방의 풍호에게 들은 정보가 있었다.
당시에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반응을 보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기록이 사실이었나 보군.’
과거 정혜는 불가의 삼대 고승 중 일인이었으며, 소림사의 제일 고수였다.
또한 무승(武僧)들의 우상이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누군가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는.
기록엔 천축이라는 새외무림의 인물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자신 때문에 무너진 소림사의 자존심. 그리고 힘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 그를 심마(心魔)에 빠트린 것이리라.
그래도 그토록 대단했던 인물이 이렇게까지 되다니. 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내막을 확인하고자 좀 더 자세히 물어보았다.
“비급을 익혀서 뭘 하려는 건데?”
정혜의 눈빛이 갑자기 이글거렸다.
“때려죽일 거야.”
“누구를?”
이름을 모르기 때문일까? 잠시 대답을 고민하던 그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얼굴이 까만 새끼.”
“그놈이 그렇게 강했어?”
“응. 역근경으로는 안 돼.”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은 법. 허나 역근경으로도 새외무림의 고수를 꺾을 수가 없었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무림맹이 비밀리에 창룡대를 조직해 그들의 침공을 대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은 오직 가문의 복수가 최우선이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자리에 털썩 앉아 턱을 괴었다.
“잠깐만 앉아봐, 동생.”
“나?”
정혜가 일장 간격을 두고 순순히 마주 앉자, 유설이 할아버지의 옆에서 호위를 섰다.
“불문사자신공의 비급은 우리 손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어. 하지만 이걸 알려준다고 해도 수련할 수가 없을 거야.”
“나는 무슨 무공이든 다 익힐 수 있어, 형.”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고는 타이르듯 말을 이어갔다.
“내가 어찌 동생의 재능을 무시하겠나. 문제는 이 무공은 극양(極陽)의 성질이라는 데 있어. 신체에서 양기를 도려내 먼저 음양의 조화를 맞춰야 한다는 얘기지.”
“거, 거짓말하지 마!”
정혜는 못 믿겠다는 눈치였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유진산도 익힐 엄두를 내지 않은 것이니까.
“아가, 구결을 앞부분만 좀 읊어줘 봐.”
비록 정혜가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구결을 이해하는 능력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터.
직접 들어보면 한 번에 이해할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유설은 불문사자신공의 앞부분을 일부 읊어주었다.
정혜도 잘 알고 있었다. 무공의 구결은 절대로 즉석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점차 그의 안색이 굳어져 갔다.
“…….”
“어떻게 생각해? 양기를 제거한 상태에서 불문사자신공으로 또 한 번 환골탈태를 겪으면, 완전히 성별이 뒤바뀌는 것 같은데.”
정혜는 몹시 혼란스러운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
“그럼 강호에 이런 소문이 퍼지겠지. 소림사의 영웅이었던 정혜가 사실은…….”
옆에서 지켜보던 유설이 맞장구를 쳤다.
“사실은 할머니였대요!”
“하하, 맞다. 할머니가 되는 거지. 이거 세상에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겠구나.”
잠시 상상해보던 정혜는 울상을 지으며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니야! 그럼 안 돼!”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 누가 비웃음거리가 되는 걸 좋아한다는 말인가.
“사실 동생의 목적은 비급을 익히는 게 다가 아니잖아. 얼굴이 까맣다던 그 녀석을 쓰러트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맞아. 그놈한테서 소림사를 지켜야 해. 나중에 다시 돌아오면 전부 죽인다고 했단 말이야.”
약간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흑야방의 정보는 대부분 틀림없었으나, 정혜의 목적에는 알려진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그가 심마에 빠질 정도로 힘을 갈망했던 이유가 명예 때문이 아닌, 소림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니.
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소림사를 지키고 싶어 하면서, 멀쩡한 사찰의 불상과 사리탑은 왜 다 때려 부쉈어?”
“비급이 그 안에 있을 줄 알았어.”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발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간 비급 찾는 것을 방해한 소림사의 승려들을 수백 명이나 두들겨 팬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신이 분열이라도 된 것일까? 직접 듣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얘기였다.
유진산은 턱을 쓰다듬으며 은근슬쩍 본론을 꺼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동생이 불문사자신공을 익히지 않고 소림사도 지켜낼 방법이.”
“그, 그게 뭐야?”
“음. 언젠가 그놈이 다시 돌아오면…… 뭐 우리가 잠깐 도와줄 수도 있는 거고.”
정혜는 감동했다는 듯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마워, 형.”
“고맙긴 뭘. 우리 사이에. 대신 동생도 좀 도와줘야 할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