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좋은 형이었어 (3)
길을 떠날 때는 둘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셋이 되어 있었다.
잠시 일행에 합류한 파계승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평생을 품고 살았던 마음의 짐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리라.
“까만 놈이 오면 나를 꼭 도와줘야 해. 알았지?”
벌써 같은 질문을 수천 번도 넘게 받았다. 아무리 약속을 해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진산도 이제는 대답하기 지쳤는지 입을 꾹 닫고 있었으며, 대신 손녀가 자동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반사적으로 나오는 영혼 없는 대답.
힘없는 목소리로 보아 유설도 이제 지겨운 모양이었다.
“꼭?”
“알았어요. 꼭.”
“정말이지?”
“알았어요.”
“거짓말 아니지?”
“…….”
“왜 대답 안 해?”
경공을 펼치면서도 쉴 새 없이 재잘대는 파계승의 끈질김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유진산은 손녀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전음을 보냈다.
- 참아야 한다, 아가.
- 나 이상해. 머리가 뜨거워지고 있어.
모든 사람은 인내심에 한계가 있는 법이다. 슬슬 손녀도 짜증이 차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파계승과 이별하면 그간 참아왔던 게 모두 물거품이 될 터.
-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니까 우리가 이해해줘야지.
- 계속 참아야 하는 거야?
-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참을성을 길러야 한단다. 할아버지가 반 시진 후에 교대해줄게.
- 반 시진 후면 도착하잖아.
앞으로 반 시진만 곤욕을 더 참으면 끝이었다.
목적지는 호현의 패도문.
그간 유진산이 고민하던 문제는 그곳의 방어 문제였다.
정사전쟁이 격화되면 호현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무림맹의 저력을 고려하면 너무나도 저명했다.
하지만 파계승이 그곳에 합류한다면 얘기는 달라질 터.
유진산이 도움을 대가로 정혜에게 내건 조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얼굴 까만 놈이 돌아오기 전까지 호현에 머무르면서 패도문을 지켜주는 것이다.
아미산의 훈련소에서 빼돌린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하면, 반드시 방어를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마음 놓고 다음 행보를 이어갈 수가 있을 테니까.
* * *
패도문의 곳곳은 전보다 활기가 넘쳐났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아미산에서 탈출하여 합류한 아이들이 적응을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하나 같이 정에 굶주려 있던 아이들이었다. 귀두공의 부작용으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패도문의 무사들과 잘 맞을 수밖에.
손녀는 도착하기 무섭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놀러 간 것인지 정혜에게서 도망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홀로 남겨진 유진산은 정혜와 함께 패도문의 장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혀엉~”
“왜?”
“이제 내가 여기를 지켜야 하는 거야?”
유진산이 고개를 올려 정혜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래. 하지만 명심해야 해. 혹시라도 동생이 이곳의 애들을 괴롭히면, 우리의 약속은 금이 가는 거야. 잘 알았지?”
“정혜는 약속 꼭 지킨다! 이곳에 쳐들어오는 놈들은 내가 다 때려죽일 거야.”
주먹을 불끈 움켜쥔 파계승의 모습이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졌기 때문일까? 유진산의 얼굴에 모처럼 여유가 가득했다.
그렇게 잠시 곳곳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진산 형님!!”
귀에 익은 반가운 목소리. 패도문의 문주 백규였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문주 체면에 뭘 마중까지 나오고 그래.”
한달음에 달려오던 백규가 돌연 삼 장 앞에 멈춰 섰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정혜를 보고 화들짝 놀란 것이리라.
“……누, 누굴 데려온 거요?”
정혜의 모습을 살피던 백규는 어리둥절했다.
겉모습은 너덜너덜한 가사(袈裟)를 걸친 승려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해 씩 웃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코를 후벼대면서 말이다.
“너 이거 먹어볼래?”
“……?”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백규가 고개를 갸우뚱할 무렵.
돌연 정혜가 손가락을 튕겨 무엇인가를 쏘아 보냈다.
그 순간 백규의 허리춤에서 도(刀)가 섬전처럼 뽑혀 나왔다.
파앙-!
귀신같은 발도술.
날카로운 도강이 지나간 자리로 양단된 코딱지가 좌우로 튕겨 나갔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려 하자 유진산이 나서서 중재했다.
“진정하시게. 아우를 공격하려던 게 아니라 인사한 것뿐일세.”
세상에 코딱지를 날리는 인사법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백규는 아직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설마 이자는 혹시……?”
“맞네. 아우 짐작대로일세. 전에 내가 얘기했던 소림사의 파계승이지. 정신이 온전치는 못하지만, 심성은 나쁘지 않으니까 앞으로 자네가 잘 보살펴주시게.”
정혜가 누구인가. 당대 소림사의 제일고수인 혜광대사의 사부였다.
난데없이 그를 데려와 패도문에서 돌봐주라니. 백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목을 빼고 물었다.
“예에?”
유진산은 그와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해주었다.
내막을 듣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백규는 도를 다시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모두 이곳을 위해서일세. 혹시라도 싫다면 얘기하시게. 최종적으로는 아우가 결정할 일이니까.”
백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없지 않소? 형님이 모셔온 손님이라면, 그게 누구든 패도문의 귀빈이오.”
그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것은 당연했다. 정혜의 합류는 패도문의 입장에서 천군만마를 얻는 셈이었으니까.
유진산의 안배로 문파의 전력은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뛰어난 자질을 지닌 삼백 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보호해줄 정혜까지.
이대로라면 훗날 천하제일문의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우선 이자에게 쉴 곳부터 마련해주고, 우린 잠시 얘기 좀 하세.”
고개를 끄덕인 백규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에게 손짓을 보냈다.
“부르셨습니까, 문주님.”
“이분께 쉴 곳을 안내해드리고, 음식과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해주거라. 중요한 귀빈이니 극진히 모셔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백규는 멀어져 가는 파계승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직은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인물이기에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정혜는 자신을 안내하는 대머리 무사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치 귀엽다는 듯이 말이다.
“너, 형이랑 놀래?”
“……예?”
“형이랑 참새 잡고 놀자!”
“스, 스님. 저는…….”
무사를 어딘가로 끌고 가는 정혜의 모습이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백규를 안심시켜주었다.
“정말 놀자고 하는 것이니, 너무 걱정할 것 없네. 이곳의 누구도 때리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혹여 작은 문제라도 생긴다면 내게 얘기하시게.”
“형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안심이 되오. 우리도 들어가서 얘기나 마저 합시다.”
* * *
유진산은 둔황에서 있었던 일을 백규에게 모두 공유했다.
도호부의 관원으로 위장한 다섯 명의 창룡대원들.
그리고 그들의 목적까지도 말이다.
“형님 말대로라면 언젠가 중원에 위기가 닥쳐오겠구려.”
“시기는 예측할 수가 없네. 그게 몇 년 뒤일지, 수십 년 뒤일지. 그리고 무림을 떠난 검후가 천축으로 넘어갔으니, 그곳에서 잘 해결될지도 모르고.”
“음. 어쨌거나 그 일이 현실로 온다면 삼파전이 되겠소. 정파의 쥐새끼들과 우리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가 없으니까.”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정파와 사파의 관계는 물과 기름과도 같아서, 함께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임을.
게다가 오랜 세월 쌓인 두 세력 간의 은원은 이미 엉켜버린 실타래와 같았다.
“새외무림의 침공이 임박한다면, 무림맹에서 어떻게든 사파를 먼저 정리하려 들 걸세. 강적을 상대하려면 내부의 적을 먼저 정리하는 것이 순서니까.”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무림맹의 사파 말살 작전도 무림일통을 위한 물밑작업의 일환이었으리라.
비록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이제는 우리도 대비하고 있으니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소.”
“물론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창룡대가 음지에서 나와 무림맹에 합류한다면?”
“…….”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백규도 이 순간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무림맹의 섬서분타를 공격했을 당시 직접 그들과 싸워봤기 때문이다.
사도련주와 흑묘파의 문주까지 함께했음에도 퇴각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네. 그전에 창룡대는 우리 손에 무너질 테니까.”
“정녕 창룡대부터 무림맹주까지 다 잡아 족칠 생각이시오?”
유진산은 씁쓸한 표정으로 찻잔을 움켜쥐었다.
“만약 아우를 제외한 패도문의 식구들이 모두 살해당했다고 생각해보시게. 그럼 아우는 어찌하겠는가.”
“뭘 물어보고 그러소? 모조리 찾아서 갈가리 찢어버려야지.”
유진산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후 마음을 가다듬었다. 또다시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분노가 차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복수 때문만은 아닐세. 은원을 말끔히 정리하지 못하면, 훗날 우리 설이의 자손들이 어찌 발 뻗고 잘 수 있겠나.”
“하긴, 그 말도 맞소.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곳이 바로 무림이니까. 아무튼, 나도 형님 일이라면 뭐든지 목숨을 내놓고 도울 것이오.”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유진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우의 목숨은 필요 없으니, 어서 다음 목표나 내놓으시게.”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떠날 준비를 하시는 거요?”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어. 우리 설이도 빨리 출발하길 원하는 것 같고.”
패도문에 머무르게 된 정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오는 내내 얼마나 시달렸던가. 그가 또다시 귀찮게 굴기 전에 떠나고 싶었다.
“거 참, 성격도 참 급하시오.”
백규가 멋쩍게 웃으며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누군가의 인상착의가 상세히 적혀 있는 정보였다. 창룡대원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리라.
묵묵히 내용을 살피던 유진산이 나직이 물었다.
“도귀(賭鬼)?”
“별호 그대로 도박의 귀신이오. 애들을 시켜서 알아보니, 중원 제일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이다. 그쪽 세계의 돈을 쓸어모을 정도로.”
“그놈도 창룡대원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가지가지 하는군.”
비도문의 문주에서부터 도호부의 관원들. 그리고 이제는 도박의 신까지 창룡대원이라니. 이렇게 정체를 숨기고 있는 놈들이 얼마나 있을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런 잡놈은 그냥 우리 애들에게 맡겨두는 게 어떻소?”
가문의 원수를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는 법. 게다가 어설프게 문도들을 보냈다가는 역으로 당하거나, 놓칠 우려도 있었다.
그렇기에 유진산은 단호히 거절했다.
“창룡대 놈들은 양보할 수 없으니, 그런 줄 알게.”
서신에는 그가 자주 출몰하는 위치가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문제는 만나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조건은 투전판에서의 명성이며, 두 번째는 은자 오십 냥 이상의 자본이었다.
유진산에겐 그 무엇도 없었지만, 미리 준비해두지 않을 패도문이 아니었다.
백규가 바닥에서 두툼한 전낭을 집어 탁상 위에 ‘쿵’ 올려두었다.
“은자 백오십 냥이오. 이것으로 명성이 있는 노름꾼을 매수하여, 도귀를 유인하면 되오.”
어마어마한 자금이었다. 한 가정이 삼대에 걸쳐 놀고먹어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패도문에 무슨 자금이 있다고 이렇게나 많이 챙겼어?”
백규는 괜찮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여유자금을 죄다 털긴 했지만, 뭐 신경 쓰지 마소. 형님한테 투자하는 돈은 조금도 아깝지 않으니까. 련주께서도 뭐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하셨고.”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근 패도문은 식구들이 많아졌기에 자금의 지출이 많을 터. 그렇기에 어떻게든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이자까지 붙여서.
‘……도귀라. 거기 가만 기다리고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