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눈은 손보다 빠르다 (1)
섬서 남부 미현의 번화가.
유진산과 손녀는 전각의 지붕 위에 앉아 어딘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두 마리의 참새처럼…….
“저 건물이 확실하구나.”
“저기에 돈귀가 있어?”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돈귀(豚鬼)가 아니라 도귀(賭鬼)다. 노름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놈이지.”
“노오르음~?”
“그래. 오락으로 승부를 내서 이긴 사람이 상대의 금품을 가져가는 게다. 저기 보이지?”
유설은 할아버지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했다.
투전이 벌어지는 전각의 주변으로 부랑자들이 즐비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한 몰골들.
그들의 눈빛에는 꿈도 희망도 없었다.
“응. 불쌍한 아저씨들…….”
“불쌍해도 모두 본인이 자초한 일이다. 처음엔 재미로 시작하지만,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는 법이지. 한번 빠지면 패가망신할 때까지 멈출 수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 설이는 절대 노름 같은 거 하면 안 된다. 할아버지 말 알아들었지?”
“알았어. 나는 죽을 때까지 안 할 거야.”
“아이고, 착하구나.”
유진산은 손녀가 기특하다는 듯 오른손을 높이 올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지붕 위에 앉은 조손은 간식을 먹고, 잡담을 나누며 그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은 노름판은 저잣거리에서 벌어지지만, 큰판은 저렇게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입구 근처에는 무사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큰돈이 오가는 곳에 맨몸으로 다닐 수는 없는 법. 부호들을 따라온 호위무사들이 밖에서 대기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한 시진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콰앙-!
전각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와 분하다는 듯 씩씩거렸다.
“이 개 같은 놈이 감히 기술을 써?”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무사 중 한 명이 재빨리 다가가 그의 옆을 지켰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오늘은 잘 안 풀리셨나 봅니다.”
“빌어먹을. 모처럼 풍귀 새끼한테 당했어.”
“질 때가 있으면 이길 때도 있는 법이지요. 다음번엔 꼭 잘될 겁니다, 어르신.”
돈을 잃은 마당에 위로 따위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어딘가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내 밑천만 마련하면 반드시 갚아줄 테니까.”
그리고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조손이 숨어서 보고 있었다.
“저놈이 좋겠구나. 할아버지 혼자 다녀올까?”
“나도 같이 갈래.”
둘은 전각의 지붕 위를 넘나들며 조금 전의 그들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각이 지나 어느 으슥한 골몰에 접어들 때였다.
타앗-!
지면에 내려선 유진산과 손녀는 다짜고짜 노름꾼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우리와 얘기 좀 할까?”
가뜩이나 기분도 좋지 않은데, 웬 꼬마들이 길을 막고 반말이나 찍찍해대다니. 노름꾼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뭐어? 얘기 좀 할까!? 이 꼬맹이들 빨리 안 치워?”
안타깝게도 노름꾼은 조금 전 유진산과 손녀의 경신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호위무사는 달랐다. 그는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
“뭐 하고 있어? 빨리 치우라니까!”
“어, 어르신.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호위무사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남들보다 빠른 눈치다.
최근 섬서무림을 떠들썩하게 한 음양쌍괴의 인상착의를 그가 어찌 외워두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노름꾼의 두 눈에는 어린애들로만 보일 뿐이었다. 당연히 짜증이 날 수밖에.
“뭐? 지금 내가 돈을 잃었다고 너까지 우습게 보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음양쌍괴인 것 같습니다.”
“음양쌍괴인지, 음양팔괘인지 빨리 내 눈앞에서 당장…….”
노름꾼은 더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의 호위무사가 아혈을 짚었기 때문이다.
“저희 어르신께서 무림에는 식견이 어두워 몰라뵌 것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말을 할 수 없게 된 노름꾼은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무사가 꼬마들에게 허리 숙여 포권을 건네다니. 게다가 아이들은 한술 더 떠서 뒷짐까지 지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
긴장이 고조될 무렵. 유진산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노름꾼에게 다가갔다.
“주제에 제법 쓸 만한 호위를 곁에 두었구나. 듣자 하니 노름판에서 꽤 오래 구른 것 같던데, 별호가 무엇이냐.”
대답은 그의 호위무사가 대신했다.
“저희 어르신께선 짝손이라 불리십니다.”
“짝손이라. 그래, 밑천이 필요하다고?”
유진산이 뒤를 향해 눈짓을 한 번 보냈다.
그러자 유설이 어깨에 메고 있던 전낭 보따리를 가져와 바닥에 풀어 놓았다.
툭-!
“은자 백오십 냥이에요.”
그 순간 모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진산도 다른 의미에서 적지 않게 놀랐다. 들고 있으라고만 했지, 액수를 손녀에게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설마 무게만으로 계산해낸 것일까?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때 호위무사가 노름꾼의 점혈을 다시 풀어주었다.
“이, 이 돈은 무엇입니까?”
짝손의 말투는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이제야 눈앞의 아이들이 겉모습을 속인 무림고수들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유진산은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도귀하고 판 좀 만들어줄 수 있겠는가?”
“도, 도귀라니요!?”
노름꾼이 놀라는 이유는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도귀와 붙은 자들은 하나같이 목숨이나 전 재산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함께하겠다면 딴 돈의 일 할을 네게 나눠주지. 어때?”
일 할이라고 우습게 볼 비율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금액이 오가는 큰 판이었으니까.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짝손은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지금껏 도귀와 붙어서 이긴 자는 한 명도 없었소. 만약 이 돈을 모두 잃게 되면 나는 어찌 되는 것이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신경 쓸 필요 없네. 혹여 그리되더라도 네겐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지.”
세상에 이런 기회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짝손의 입장에선 조금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망설여지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도귀는 노름꾼들의 세계에서 아주 무서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대답이 없군. 도귀가 우리보다 두려운가?”
“잠, 잠깐만 생각 좀 해봐도 되겠소?”
“그러시게.”
짝손은 자신의 호위무사를 데리고 골목의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만약 도귀랑 쟤들이랑 싸우게 되면 누가 이길 것 같아?”
“목소리를 좀 더 낮추시지요, 어르신. 저기 왼쪽에 계신 분이 바로 음괴 대협인데,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입니다.”
“뭐? 약해 보이는데,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짝손의 호위무사는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확실합니다. 반로환동한 절세고수니까 겉모습에 속지 마십시오. 도귀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저분 앞에선 동네 똥강아지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 참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리고 만약 돈을 따더라도 우리를 살려둔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분들은 무림인이 아닌 자에겐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이거 잘만 하면 같이 한탕 해 먹고, 이 바닥을 은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꼭 그리되실 겁니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짝손이 양손을 모으고 공손히 다가왔다.
“제안을 수락하겠습니다. 이 자금이라면 도귀를 불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최대한 빨리 판을 잡아줬으면 좋겠군. 그리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네. 허튼수작만 부리지 않으면, 해치지 않을 테니까.”
짝손은 잠시 흠칫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 * *
“왔다!”
손녀가 어느 전각의 지붕 위에서 폴짝 뛰며 좋아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신을 장신구로 치장한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손에는 두툼한 비단 보따리를 하나 움켜쥐고 있었다.
유진산도 먼 곳에서 다가오는 그를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의상이 목을 완전히 가렸기에 창룡대의 문신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아?”
“음. 조금 강하거든, 저 아저씨.”
손녀의 입에서 조금 강하다는 정도면 초절정의 수준은 된다는 얘기였다. 그 정도의 고수가 이곳에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었다. 도귀가 아니라면.
잠시 후 거리가 가까워지자 유진산도 그의 기운이 느껴졌다.
‘사람의 살기(殺氣)가 뭐 저리 강하단 말인가.’
무인의 기세와는 달리 기분 나쁜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아마도 초장부터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한 수작이리라.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짝손은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혼자 왔니? 제자 한 명도 같이 끼워달라며?”
다짜고짜 반말이었지만, 그러한 모습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곧 도착할 것이오.”
“뭐 짝손의 제자라면 자격이 있지. 돈만 있다면.”
“…….”
“일단 들어가자고.”
안으로 들어서는 도귀의 모습에는 여유가 넘쳤다.
반면 짝손은 기가 죽었는지 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앞서 들어간 도귀는 입장과 동시에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이 주인장! 앞으로 한 명만 더 들어오면 문 걸어 잠그소.”
욕설이 난무하며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도귀를 알아본 노름꾼들은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내부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무사들도 몹시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장내의 중앙에 미리 비워놓은 탁상 하나.
그곳에 마주 앉은 둘은 각자 준비해놓은 자금을 올려두었다.
노름에서는 상대의 기세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승률이 올라가는 법.
언뜻 보아도 도귀의 은자가 열 배는 더 많아 보였다. 시작부터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해 많은 돈을 지참하고 온 것이리라.
“그게 전부니? 은자 팔십 냥이면 열판도 안 걸리겠구만.”
“승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법이오.”
고개를 끄덕인 도귀는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탁상에 ‘푹’ 꽂아 넣었다.
“규칙은 알지? 장난치다 걸리면 모가지 날아가는 거. 그럼 시작해 보자고.”
“잠, 잠깐……. 아직 내 제자가 들어오지 않았소.”
“네 제자인지 뭔지는 이미 도망쳤어.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도귀는 확신했다. 이미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주변의 기척을 모두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기가 죽어있던 짝손이 갑자기 어깨를 활짝 펴는 것이 아닌가.
목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지금 도착했으니 어서 패 돌릴 준비나 하소!”
“……뭐?”
“지금 네 뒤에 왔다니까.”
갑자기 돌변한 짝손의 태도가 이상했기 때문일까?
무심코 뒤를 돌아본 도귀는 화들짝 놀라 넘어질 뻔했다.
아홉에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두 명의 아이들. 정파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음양쌍괴의 인상착의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음, 음양쌍괴가 왜 이곳에?”
짝손의 제자가 음양쌍괴 중 한 명이라니.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의 한마디에 장내의 무사들도 흠칫하며 눈을 부릅떴다.
유진산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손녀에게 말했다.
“금방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아무도 출입 못 하게 문 틀어막고 있어.”
“알았어.”
문 앞에서 유설이 팔짱을 끼고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허락이 있기 전에는 누구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유진산은 손녀를 뒤로한 채 전낭을 들고 터벅터벅 걸었다.
이번 목적은 단순히 도귀를 잡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자금을 비롯해 몇 가지가 목표에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가 내 자리겠구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가득했던 도귀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음괴가 신경 쓰인다는 듯 자꾸 문 쪽을 흘깃 쳐다보길 반복했다.
기가 죽은 그의 모습에 짝손이 도발을 시작했다.
“천하의 도귀가 왜 이러셔? 빨리 패 안 돌리고.”
평상시 같았으면 단도를 뽑아 짝손의 입을 찢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귀에게 그런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음괴가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 함부로 무공을 사용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지금은 상황을 계산하기에도 바빴다.
이어서 그가 내린 판단은 음양쌍괴가 명분 없이 자신을 어찌하지는 못하리란 것이었다. 지켜보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 시작하겠소.”
투전은 다섯 장의 패를 나눠 가진 후 숫자를 조합하여 세 장을 버린 다음, 나머지 두 장으로 끗수를 대결하는 노름이었다.
하지만 타자(打子)들의 대결에선 처음부터 두 장으로만 한다. 빠르게 승부를 가리기 위해서다.
도귀는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능숙하게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착-! 착-! 착-! 착-! 착-! 차악-!
그의 손길에는 조금의 수상함도 없었다. 아주 미세한 소리의 차이만 있었을 뿐.
유진산과 짝손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누군가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할배. 쟤 방금 밑에 거 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