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눈은 손보다 빠르다 (2)
콰앙-!
짝손의 손바닥이 탁상을 내리쳤다.
“어디서 첫판부터 밑장빼기를 해!?”
원래 같았으면 도귀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칠 짝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음양쌍괴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더군다나 이번을 끝으로 노름판을 뜰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노름꾼들까지 웅성거렸다.
천하의 도귀가 밑장빼기를 하다 걸리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밑장빼기라니? 나 도귀야! 증거 있어?”
“됐고, 지금 들고 있는 거나 까봐.”
짝손과 도귀의 기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유진산이 한 손을 올려 보였다.
“됐으니까, 그냥 빨리 돌리기나 해.”
무슨 수로 증거를 대겠는가.
하지만 얻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도귀도 기술을 부리기가 어려워졌을 테니.
입구에서 손녀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이상 잔기술은 어림도 없었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소.”
착-! 착-! 착-! 착-! 착-!
정확히 일치하는 소리. 그리고 일률적인 손놀림에는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노름이 시작되었다.
서로가 손장난을 사용하지 않다 보니 승부는 자연스레 길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열판이 넘어가고, 서로가 이기고 지고를 반복했다.
더는 도귀도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쪼그라드는 것은 유진산의 자금이었다.
타자(打子)들의 사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연히 가장 많이 잃을 수밖에.
그러던 중 모처럼 대(大)판이 찾아왔다.
“소소하게 은자 열 냥이오.”
짝손의 외침에 도귀가 스무 냥을 밀어 넣었다.
“받고 열 냥 더.”
한 판에 은자 스무 냥이라니. 누군가에겐 평생을 일해도 벌지 못할 액수였다.
다른 노름꾼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지켜보았다.
마지막은 유진산의 차례였다.
그에게 남은 은자는 사십 냥. 손에는 이(二) 두 장을 들고 있었다.
낮은 조합은 아니었지만, 이런 큰 판에서는 조금 애매한 패였다. 고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가 없겠구나.’
유진산은 손으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설의 전음이 들려왔다.
- 두루미가 두 마리 들어갔어.
태어날 때부터 선음지체라는 신선의 오감을 타고난 손녀였다.
타고난 기억력과 초인적인 시야는 패가 섞이는 순간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뒤집힌 패는 모두 유설의 머릿속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손녀의 전음을 확인한 유진산은 망설임 없이 남아있는 은자를 모두 밀어 넣었다.
“도합 사십 냥으로 하지. 내 전 재산이군.”
“어이쿠, 나는 심장이 벌렁벌렁하니 이만 죽어야겠소.”
짝손은 패를 덮었고 도귀는 고민에 빠졌다.
미묘하게 변하는 유진산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읽은 것일까?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은자 이십 냥을 더 밀어 넣으며 자신 있게 패를 보여주었다.
“일 땡.”
유진산의 입에서 순간 웃음이 삐져 나왔다.
“큭!”
그리고 그가 패를 뒤집는 순간 도귀가 두 눈을 부릅떴다.
어이없게도 한 끗발 차이로 밀리다니. 직감적으로 무엇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지만,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기술을 사용했으면, 자신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을 테니까.
“…….”
어리둥절한 도귀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뭘 그리 놀라시나. 어서 패나 돌리시게.”
약이 바짝 오른 도귀와 달리 유진산과 짝손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상대의 패를 알고 있는 이상 무서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둘이서 열두 판을 번갈아 가며 내리 이겼을 때였다.
“또 이겼네?”
“하하!”
같이 하다 보니 호흡이 척척 맞았다.
유진산과 짝손이 허공에서 손뼉을 부딪쳤다.
짝-!
순식간에 자산이 다섯 배 이상으로 불어났으니 기쁜 것이 당연했다.
“도대체 무슨 장난을 친 거지?”
“장난이라니? 무슨 장난?”
투전판의 모든 기술을 꿰차고 있는 도귀였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참 갸우뚱했다.
묵묵히 지켜보던 유진산이 그를 재촉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인가. 자신이 없으면 이만 접으시던가.”
이대로 물러설 도귀가 아니었다. 죽더라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으니까.
은자를 대부분 탕진한 그는 준비해온 비단 보따리에서 작은 상자 꺼냈다.
그가 상자를 열자 금빛이 번뜩였다. 가지런히 진열된 금자 오십 냥.
금자 한 냥은 은자의 열 배 가치를 지닌다. 그만큼 귀하기에 일반인들은 구경조차 못 하는 화폐였다.
“종목을 바꿔서 본격적으로 해보는 것이 어떻소.”
짝손은 단칼에 거절하려 했지만, 유진산이 손을 올리며 괜찮다고 신호를 보냈다.
이미 노름의 종류는 파악하고 있었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네가 원하는 것으로 해.”
도귀가 손을 활짝 펼치자 건너편의 탁상에서 작은 나무통 세 개가 차례로 날아왔다.
터업-! 터업-! 텁-!
지켜보던 노름꾼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허공섭물까지 사용할 수 있는 고수였다니. 역시나 창룡대원이란 말인가?
유진산도 내심 감탄했지만,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저런 가벼운 것 정도쯤은 자신도 흉내 낼 수가 있었으니까.
도귀가 통 하나를 뒤집자 주사위가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그가 그중에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주사위가 세 개의 통 중 어디에 있는지 맞추는 것이오.”
단순히 확률 싸움이었으니 불리할 것은 없었다.
“간단하니 금방 승부를 볼 수 있겠군. 어디 한번 해보지.”
유진산이 동의하자 짝손도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개의 통을 붙잡고 돌려대는 도귀의 기술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스스슥-! 스스스슥-!!
과연 무림고수다운 손놀림이었다.
어찌나 빠른지 세 개의 통이 수십 개로 늘어나 보일 정도였다.
짝손은 물론이거니와 유진산조차 처음부터 움직임을 놓칠 정도였다.
타악-!
도귀의 양손이 멈추었다.
이제 남은 것은 돈을 거는 것뿐.
- 왼쪽에 있어.
유설의 전음이 유진산과 짝손의 귀에 동시에 전해졌다.
둘은 무려 은자 이십 냥씩을 왼쪽에다가 밀어 넣었다.
곧이어 도귀가 두 개의 통을 들어 올린 그 순간. 어김없이 둘의 입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이것 참 재미가 있구만그래.”
질 수가 없는 노름이었다.
판이 계속될수록 도귀의 금자는 줄어만 갔고, 유진산과 짝손의 얼굴엔 미소가 번져갔다.
재미는 있었지만 즐기러 온 것이 아닌 이상 오래 끌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승부를 봐야 할 시점이었다.
스스슥-! 스스스슥-!!
또다시 요란하게 움직이는 세 개의 나무통.
기다렸다는 듯이 손녀의 전음이 둘에게 동시에 들려왔다.
- 오른쪽.
유진산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도귀의 자금을 모두 빼앗을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머뭇거리자 유설이 다시 한번 신호를 보내왔다.
- 확실해!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유진산과 짝손은 지금껏 비축한 자금을 모두 오른쪽으로 밀어 넣었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금자와 은자들.
숨죽이고 지켜보던 노름꾼 중 이렇게 큰 금액을 본 자는 당연히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판인가?”
“어서 열어보시게.”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도귀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서렸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오늘 즐거웠소.”
그는 외마디와 함께 왼쪽과 오른쪽의 통을 동시에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유진산과 짝손의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어?”
“어라?”
주사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가운데에 있다는 뜻이리라.
분명 손녀의 전음을 들었거늘, 설마 실수가 있었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유진산이 중앙의 통을 재빨리 들어보았다.
터업-!
그곳엔 주사위 하나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미소가 가득했던 유진산과 짝손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마치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승승장구를 해왔거늘 한 판에 모든 걸 잃다니. 상실감을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절반은 돌려 드릴 테니, 여기서 마무리합시다.”
보통은 상대가 다 잃으면 많아야 일 할 정도를 주는 것이 이 바닥의 관례다.
이렇게나 많은 돈을 돌려주는 이유는 목숨값이었다. 음양쌍괴의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
유진산과 짝손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풀이 죽어있을 뿐.
곧이어 도귀가 들고 있던 통들을 겹치려는 찰나였다.
번쩍-!
갑자기 객잔의 입구 쪽에서 밝은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빛이 다시 사그라진 그 순간. 어느새 다가온 유설이 손가락으로 도귀의 손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이, 이거 놓으시오!”
도귀가 손목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목을 움켜쥔 고사리 같은 손가락 세 개.
겉으로 보기에는 단번에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도귀가 무슨 짓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사기꾼!”
“사, 사기꾼이라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야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일까? 짝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차피 오늘을 끝으로 이 바닥을 떠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이판사판이었다.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수작을 부린 거야!? 이분들이 누군지 몰라?”
평소에는 눈도 못 마주치던 인물이 바락바락 대들었기 때문일까? 도귀는 당황하는 와중에도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짝, 짝손 너 미쳤어?”
“미친 건 네놈이겠지. 네가 손에 쥔 그 통 안에 개수작을 부렸다는 것에 내 전재산과 목을 걸겠다.”
“…….”
어느덧 여유를 되찾은 유진산이 그를 노려봤다.
“자네는 무엇을 걸겠는가.”
“나는 내 돈 전부를 걸겠소.”
“그것으로는 부족해. 어차피 네가 사기를 쳤으면 그건 전부 우리 거니까. 게다가 우리는 목까지 내걸었는데 수지타산이 맞지 않잖아.”
“그럼 도대체 뭘…….”
“네가 아는 모든 것.”
처음부터 이것이 목적이었다.
창룡대원들은 아무리 심문해도 입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정보에 따르면 도귀는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이번엔 수단을 바꿔본 것이다.
“그게 전부요?”
“응.”
도귀는 양괴의 요구가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아직 음양쌍괴가 창룡대원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목숨을 요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정보 몇 가지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선택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귀가 고개를 끄덕인 즉시 유설이 그의 손목을 힘으로 뒤집었다.
“으으…….”
유진산과 짝손이 골랐던 통이었다.
그 속에서 주사위 하나가 또르르 굴러떨어져 내렸다.
툭-!
목을 빼고 그 모습을 확인한 노름꾼들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주, 주사위가 왜 또 있어?”
“설마 지금까지 하나를 감춰뒀던 거야?”
“세상에……. 천하의 도귀가 이런 사기를 치다니.”
처음부터 주사위 하나를 감춰두었던 것이리라.
계속 잃어주면서 큰판을 만들고,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기 위해서이리라.
격공섭물의 수법으로 주사위를 통 안쪽 상단에 붙여놓고, 다른 통의 주사위를 보여주면서 승부를 조작한 것이다.
비록 손녀의 눈은 속이지 못했지만, 정말이지 감쪽같은 속임수였다.
조금 전 가슴이 철렁했던 것만 생각하면 유진산도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일단 한 대는 맞고 시작해야겠구나. 꽉 잡아 세우거라.”
“잠, 잠깐…….”
유설이 도귀의 옆구리를 움켜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옴짝달싹 못 하는 그를 향해 유진산이 천천히 가까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