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설이한테는 비밀이야 (1)
‘대나이신법?’
강호의 경험만 반백 년 이상인 유진산은 이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대나이신법(大那移身法)이 무엇인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소림의 비전신법이었다.
이것을 응용한다면 공격과 회피반경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될 터. 전투에서의 생존확률이 곱절은 올라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혜가 이것을 자신한테 왜 전수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아래에서 자신을 공중부양시킨 정혜는 분명 대나이신법의 동작을 알려주고 있었다.
둘이 하나가 되어 구름 위를 걷는 듯 움직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묘했다. 만약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면 깜짝 놀랐을 정도로.
무공을 전수받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마냥 좋아해도 괜찮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으니까.
“소림의 신법을 왜 나한테 알려줘? 이래도 되는 거야?”
“형은 죽으면 안 돼. 나하고 약속 지켜야 하니까.”
“까만 놈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얘기지?”
“응.”
유설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자신뿐이었으니, 끝까지 살아남아 약속을 지키라는 의미이리라.
그런 뜻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그야말로 횡재한 상황이었다.
“그럼 우리 손녀도 같이 알려줘.”
“설이는 강하다. 이런 거 필요 없어.”
현경의 반열에 접어든 유설은 이미 형(形)에 얽매인 경지를 초월해 있었다. 신법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유진산은 거기까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정혜는 둔황에서부터 눈치챈 상태였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자유자재로 반응하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을.
반면 유진산은 강함이 무공의 위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 단계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정혜의 동작에 맞춰 팔다리를 움직이면서도 설득을 이어나갔다.
“험난한 강호에서 신법만으로 어떻게 살아남을지 막막하구만.”
정혜는 비록 파문을 당한 상태였지만, 한때 소림사에서 최고의 배분이었다. 방장인 정명이 그의 사제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소림사의 모든 비전절학을 꿰차고 있을 터. 잘만 하면 몇 가지를 더 얻어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번 떠보았지만 정혜는 반응이 없었다. 대나이신법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
‘하긴. 무공을 남에게 퍼준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유진산도 더는 조르지 않고 그가 알려주는 신법에만 집중했다.
수십 번의 연습 끝에 어느 정도 동작을 외웠을 시점이었다.
“끝!”
“그래 끝났으면, 어서 내려줘.”
동작을 모두 외웠으니 이제는 반복적인 수련만이 남았을 뿐이다.
유진산을 내려준 정혜는 잠시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흐음…….”
“왜? 뭐가 문제라도 있어?”
정혜가 검지로 코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그럼 정혜가 한 개만 더 알려줄게. 으흐흠. 뭐가 좋을까나.”
“정말 알려준다고?”
아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운만 띄어본 것이었다. 이렇게나 쉽게 넘어오다니? 소림사의 원로들이 들었다면 각혈을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이거 먹으면 알려줄게.”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가락에는 큼지막한 코딱지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숭산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러지 않았던가. 그때는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거대한 유혹이 눈앞에 있었다.
“먹으면 뭐든 다 전수해줄 거야?”
“응. 빨리 먹어봐, 형. 맛있어.”
“잠, 잠깐만 기다려봐.”
어안이 벙벙해진 유진산은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의 무공은 하나하나가 깊이 있고 묵직하여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지법, 장법, 각법, 권법, 검법 기타 등등. 창법을 제외한 모든 것이 유가장의 것을 압도한다. 하지만 무공 하나에 무인의 자존심을 날려버릴 수는 없는 일.
‘저걸 먹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무공이라면 하나뿐이겠지.’
그러나 그것을 정혜가 순순히 알려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 아니던가.
“그, 그럼 역근경을 알려줘. 네가 말한 놈이 돌아오면 나도 같이 싸워줄 수 있게 말이다.”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 명실상부 소림사의 최고 절학이었다.
그냥 한번 찔러보았지만,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혜의 정신이 정상적이었다면 따귀를 맞을 제안이었으니까.
“역근경은 안 돼. 지금은.”
역시나 예상대로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니? 여지를 남겨둔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가 뭐야?”
“형은 아직 약하니까.”
“뭐 그럼 화경이라도 되어야 배울 수 있다는 얘기야?”
“응, 맞아.”
대답에 머뭇거림이 없는 것을 보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그 이유뿐이라면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터. 그때 다시 설득해볼 요량이었다.
“잘 알겠다. 어쨌거나 역근경이 아니면 나도 그걸 먹을 생각은 없…….”
팍-!
유진산은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입안으로 뭔가가 쏙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정혜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튕겼다는 것뿐이었다.
“크헉!”
아무리 뱉어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목구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우히히힛.”
정혜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분노가 차올랐다.
감히 자신에게 코딱지를 강제로 먹이다니? 난생처음으로 겪어본 모욕이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놈, 어디 두고 봐라! 내 설이한테 오늘 일을 다 말할 테니까!”
정신없이 웃어 재끼던 정혜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안, 안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너는 이제 죽었다.”
명색이 유가장의 가주였다. 가문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이다.
유진산은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혀엉…….”
“그렇게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봐도 소용없다. 이미 먹었는데, 어쩔 거냐고!?”
“정혜가 다른 거 알려줄게.”
“역근경이 아니면 필요 없어.”
정혜가 진지한 얼굴로 유진산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다.
“아니야. 나한테 정말 좋은 게 있어.”
이미 사건은 벌어졌으니 뭐라도 얻어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이 땡중이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마음을 진정시킨 유진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게 뭔데?”
정혜가 자신의 배를 쭉 내밀며 씩 웃어 보였다.
“나를 한 번 때려봐.”
“후회할 텐데?”
유진산의 공격은 바위도 쉽게 부술 수 있을 정도였다. 절대고수에도 밀리지 않는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정혜는 씩 웃으며 자신의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괜찮아, 빨리 때려.”
갑자기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유진산은 옳거니 하는 마음으로 손바닥에 내기를 끌어모았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 화가 전부 가라앉지 않았으니까.
“네가 자초한 일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는 어깨 위로 잡아당긴 손바닥을 정혜의 복부를 향해 벼락처럼 내뻗었다.
유가건곤장 일 초식 일파무흔(一破無痕). 위력만큼은 일품인 강공이었다.
쩌엉-!
“크윽!”
유진산의 입술을 비집고 삐져나온 소리였다.
마치 묵직한 쇳덩이를 때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럴 수가. 설마 조금도 충격을 주지 못한 건가?’
믿을 수가 없었다. 최소한 몇 걸음이라도 물러서야 했다.
그런데도 눈 한 번 깜빡이질 않다니?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던 결과였다.
뻐근한 손목을 돌려대고 있을 때, 정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푸히히힛.”
유진산의 미간이 가운데로 좁혀졌다.
“그래, 어디 잠시 뒤에도 웃을 수 있는지 보자.”
오기가 생긴 그는 양손을 불끈 움켜쥐었다.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가는 이쪽의 손목이 남아나질 않을 터. 그렇다면 공격 방식을 바꾸면 그뿐이었다.
원거리에서 공격할 수 있으면서도 고강한 위력을 지닌 무공.
유설에게 전수받은 백보신권(百步神拳)이었다.
소림의 무공이었으나 손녀가 약간의 변형을 주었다. 그 결과 내력의 소모는 더 커졌지만, 본래 위력보다 더 강해진 상태였다.
눈 깜짝할 사이 유진산의 주먹에서 맹렬한 권풍(拳風)이 쏘아져 나갔다.
콰앙-!!
확실히 위력만큼은 유가건곤장을 압도했다.
권풍은 바로 사라지지 않고, 정혜의 배꼽 부근에서 한동안 기(氣)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런데도 정혜는 여전히 씩 웃고 있었다.
“푸히히히.”
‘버텨?’
첫 방은 시작에 불과했다.
실전이 아니었으니 내력의 소모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터.
자세를 바로잡은 유진산은 주먹을 마구 내질렀다.
쾅-! 콰쾅-!! 콰콰쾅-!!
정혜의 배꼽을 향해 권풍이 정신없이 꽂혔다.
오직 같은 부위만 공격했기 때문일까? 피해가 누적된 탓인지 정혜가 상체를 슬쩍 비틀었다. 스스로 타점을 조정하기 위해서이리라.
그러다 보니 유진산이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수십 번의 공격을 더 쏟아붓던 그는 이내 공격을 포기했다.
무기를 들고 강기를 뿜어낸다면 모를까. 그래도 차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당했다는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만하자. 네가 이겼다.”
“어때? 좋은 거 맞지?”
유진산은 정혜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눈치챈 상태였다. 세상에 이러한 무공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금강불괴신공(金剛不壞神功).
이것을 익히면 도검불침은 물론 독약이 통하지 않는 만독불침. 그리고 물과 불이 침습하지 못하는 수화불침의 신체를 가지게 된다.
철포삼처럼 단순히 피부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록 그 가치가 역근경에 비교할 수준은 못 되지만, 호신계열 중에서는 최고로 쳐주는 무공이었다.
이것을 익히기 위해서는 중후한 내공이 필요하며, 오랜 시간 구결을 통해 기공을 수련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확실히 대단한 무공이구나. 근데 이걸 나한테 알려준다고?”
정혜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신 형한테 코딱지 먹인 건 비밀이야. 알았지?”
그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자존심 상하게 손녀에게 그런 걸 어찌 얘기한다는 말인가.
어쨌거나 유진산으로선 최고의 기연을 만난 셈이었다.
‘대나이신법과 금강불괴신공이라…….’
비록 공격용 무공은 아니었으나 최고의 생존기술들이었다.
익히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어떤 고난이 따르더라도 이겨낼 생각이었다. 손녀에게 짐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알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부터 하자. 설이한테 좀 가봐야 해.”
정혜가 앞을 가로막더니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르러 가는 거지?”
“얘기 안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정말이지?”
“그래, 정말이다.”
“약속?”
“알았다니까!”
정말이지 집요한 땡중이었다.
유진산은 방향을 틀고는 경공을 펼쳐 달아났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정혜의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얘기하면 안 돼!”
“…….”
유진산은 현기증이 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자에게 무공을 전수받아야 한다니.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안녕하세요, 어르신!”
마주친 인물은 패도문의 돌격대장인 홍기였다.
유진산은 뒤를 힐끔 돌아보며 재빨리 물었다.
“우리 손녀 못 봤어?”
“설이요?”
“응. 얘가 어딜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네.”
“아침에 대련장에서 놀다가 저쪽으로 날아가던데요?”
홍기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은 장원 뒤편의 작은 산이었다.
오래전 손녀와 함께 수련하러 몇 번 올라가 본 적이 있었다. 아침부터 그곳엔 무슨 연유로 갔다는 말인가.
온종일 아이를 보지 못했기에 한번 살펴봐야 했다.
“그래, 알았다. 수고해.”
“예. 들어가십시오, 어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