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설이한테는 비밀이야 (2)
어둑한 그림자가 짙게 깔린 늦은 밤.
유진산은 홀로 패도문의 뒷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얘가 도대체 어딜 간 거지?”
말도 없이 나가서 날이 어둑해지도록 안 돌아오다니.
과거에도 수련한다고 나돌아다니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손녀가 절세의 무공을 지니고 있더라도 걱정되는 것이 할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찾아 헤매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바람을 발판삼아 허공을 질주하는 아이가 무슨 흔적을 남기겠는가.
목청껏 손녀의 이름을 외치려는 찰나였다.
돌연 어디선가 한 줄기 산들바람이 스치고 지나쳤다.
휘이잉-!
분명 고요한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위적인 바람이었다.
유진산은 단번에 직감했다. 손녀가 보내온 신호임을.
혹시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유진산은 바람이 불어온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타타탓-!
생각보다는 가까운 위치였다.
정상 부근의 작은 분지.
그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여자아이는 유설이 분명했다.
‘자연 속에서 명상수련 중이었단 말인가? 그랬었구만.’
그러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수밖에.
유진산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 절세고수는 육체적인 단련보다 명상을 통한 수련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러한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등선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두 눈을 감은 손녀의 모습을 보니 이미 무아지경에 빠진 듯했다.
그렇다면 명상을 방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칫 수련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으니.
유진산은 최대한으로 기척을 죽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어서 작은 소음도 들리지 않도록 발끝을 세웠다.
그렇게 몇 걸음을 움직였을 때였다.
‘아니, 바람 한 점도 없는데 웬 낙엽이?’
큼지막한 낙엽 하나가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명상 중에는 작은 소음조차 방해가 될 터.
유진산은 상체를 비틀어 낙엽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피했다고 생각했을 때 돌연 그의 눈빛에 황당함이 서렸다.
‘어어?’
낙엽이 방향을 틀어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피해내면 그뿐. 유진산은 급격히 상체를 눕혔다.
그러나 살랑거리는 낙엽은 마치 목적지를 찾은 듯 그의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뭐야 이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얼굴에 붙은 낙엽을 붙잡기 위해 손을 내뻗었다.
텁-!
만져지는 촉감은 반들반들한 피부뿐. 그사이 스스로 날아오른 것이다.
‘뭔 낙엽 따위가 다 성가시게…….’
명색이 무림고수이거늘 창피하게 낙엽을 놓치다니.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웃음거리가 됐을 법한 상황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진산은 다시 조용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한 발을 내딛기도 전에 또다시 무엇인가가 다가와 시야를 가렸다.
낙엽에 귀신이라도 들렸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현상이었다.
미간을 좁힌 그는 확실히 낚아챌 각오로 손을 내뻗었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속도였다.
휘이익-!
믿을 수 없게도 또 놓치고야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와 자신의 얼굴에 착 달라붙었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유진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녀를 쓱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가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쟤가 설마?’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했다.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는 손녀의 얼굴.
유진산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설이, 너어!!”
그 순간 유설의 입에서 대폭소가 터져 나왔다.
“푸히힛!”
어찌나 웃음을 참고 있었던 것인지 손녀의 눈에는 물기까지 맺혀 있었다.
이것으로 모든 게 확실해졌다. 귀신들린 낙엽은 유설의 장난이었음을.
“쪼그만 게 할아버지를 놀려?”
“히히히. 할배가 더 쪼그맣잖아.”
이제는 힘은 물론 말싸움에서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일로 하나뿐인 핏줄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런데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낙엽이 어떻게 이렇게 막 움직여?”
“또 해죠?”
이번엔 바닥에서 밤송이 하나가 붕 떠올랐다.
그것은 곧이어 도깨비불처럼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불규칙적으로 반경 일 장을 빙빙 도는 움직임. 그리고 점차 가속하는 밤송이는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결코, 허공섭물 따위의 기술이 아니었다.
‘설마 기(氣)로 사물을 제어하고 있다는 말인가?’
유진산은 놀라움을 넘어서 전율했다.
무림의 역사에서 지존들이나 이따금 사용했다고 알려진 전설의 무공 어검술(御劍術). 그리고 나아가 어창술(御槍術)의 기본이 되는 기술이었다.
이제 열 살을 바라보는 손녀가 그런 절세의 무공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보고서도 믿기질 않았다.
불문사자신공의 영향일까? 아니면 타고난 선음지체의 체질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유진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손녀의 옆에 가지런히 놓인 용화창을 바라보았다.
“저, 저것도 움직일 수 있어?”
힘을 잃은 밤송이가 낙하하기 무섭게 용화창이 반응을 보였다.
마치 경련을 일으키듯 창 자루가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뿐, 날아오르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무거운 건 아직 안되더라구. 힝.”
가벼운 낙엽이나 밤송이와는 달리 무기는 아직 무리인 듯했다.
하지만 어디 이게 실망할 일이란 말인가?
수련을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전설의 어창술을 터득할 수 있을 터. 그때는 명실상부 무림의 지존(至尊)으로 등극하는 셈이었다. 당대 무림에서 이것이 가능한 고수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장하다, 우리 손녀.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유설이 감격에 겨워하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으로 어깨를 보듬었다.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내가 강해져서 할배를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어느새 손녀가 이렇게까지 성장을 했다니.
한 살배기 아기였던 손녀를 업어 키우며 온갖 서러움을 겪어왔던 유진산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고생이 이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곧이어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울컥하고 솟구쳐올랐다.
“할배 울어?”
“아니다. 울긴 누가 울어?”
손녀의 큼지막한 눈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함이리라.
“거짓말~ 지금 내가 다 봤어.”
유진산은 당황하며 등을 돌렸다.
“아니래도? 할아버지는 바빠서 이만 내려가 봐야겠구나.”
“벌써 가게?”
“백규 삼촌하고 약속이 있어.”
“응, 조심히 내려가. 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갈게.”
“그래. 수련도 좋지만 쉬엄쉬엄하려무나.”
유진산은 뒤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달렸다.
‘주책맞게 갑자기 웬 눈물이…….’
손녀의 한마디에 왠지 모를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백규와 약속이 있다는 말은 물론 거짓이었다. 어찌 아이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소매로 눈을 훔친 그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유진산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강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어서 빨리 나도 정진해야겠구나. 손녀의 발목을 안 잡으려면 맷집이라도 키워놔야겠지.’
날이 갈수록 혼자 뒤처지고 있었으니 마음이 조급할 수밖에.
오십여 년 전의 전성기 때를 제외한다면 이토록 가슴이 불타오른 적은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곧장 패도문의 수련장 중 한 곳으로 향했다.
* * *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간 창룡대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으며, 이렇다 할 사건도 없었다.
손녀도 뒷산에만 틀어박혀 있을 뿐. 며칠에 한 번 내려와서 밥이나 함께 먹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 틈을 타서 유진산은 오직 무공 수련에만 전념했다.
파계승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은 단 두 가지.
비록 살상용은 아니었으나, 생존력을 비약적으로 올려줄 수 있는 최고의 상승무공들이었다.
낮에는 대나이신법을,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금강불괴신공을 수련했다.
‘지켜보거라, 설아. 할아버지는 반드시 해낸다.’
가부좌를 튼 유진산은 금강불괴신공의 호흡법으로 기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무공의 구결에 따라 혈도를 거침없이 순회하는 중후한 내기(內氣).
수련이 거듭될수록 나타나는 신체의 변화는 무척 놀라웠다.
피부와 근육은 철갑을 두르는 듯했고, 내부의 장기는 겹겹의 기(氣)로 보호되기 시작했다.
놀라운 성과였으나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했다.
‘최소한 칠성(七成)은 되어야 실전에서 제대로 효과를 볼 터. 할 수 있다, 진산아!’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의지만 있다고 모든 것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는 달리 열흘째 육성(六成)에서 진척이 없었다.
본디 무공이란 것이 화후가 높아질수록 성과가 더뎌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유진산은 마음이 급했다.
이미 벌어진 손녀와의 무공 차이를 신체 부위로 비유하면 정수리와 발등이었다.
최소한 복숭아뼈까지는 올라가야 체면이 설 터.
지루한 시간 속에 유진산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였다.
“어르신, 계십니까?”
목소리로 보아 패도문의 간부 중 한 명인 홍균이었다.
뭔가 진전이 있을 것 같은 찰나에 불쑥 찾아오다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유진산은 수련을 중단하며 문밖으로 물었다.
“왜? 땡중이 또 누구 괴롭혔어?”
“그게 아니라…….”
“급한 일이 아니면 수련 중에 찾아오지 말라니깐.”
“손님이 찾아오셨거든요.”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조차 입단속을 시키는 상황이거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홍균의 옆에서 느껴지는 옅은 기운의 주인이 바로 그자이리라.
이곳까지 찾아왔으니 직접 확인해볼 수밖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유진산은 거처의 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나를…….”
유진산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고풍스러운 외모에 기품이 넘치는 여인.
흑야방의 남부지사를 책임지고 있는 그녀는 은화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껏 두 번의 만남이 있었으며, 기억으로 수완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하남에 있던 그녀가 무슨 연유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되는 이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양괴 대협.”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시선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올려 대꾸했다.
“대협은 무슨 대협? 무림맹에서 마두로 낙인찍힌 자한테 말이야. 방주는 잘 계시는가.”
그렇지 않아도 풍호의 안부가 궁금했었다.
사파 제일의 정보조직 흑야방. 지금까지도 그곳의 주인인 풍호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양주산에서 시작된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마음이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주께서는 요즘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실 겁니다. 몇 달 전에 아기가 태어났으니까요.”
풍호의 아내인 현희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이를 가진 상태였었다. 그사이 출산을 한 모양이었다.
“허헛. 모처럼 기쁜 소식이로구만. 헌데 바쁘실 자네가 섬서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가.”
“오래전 저희 방주께서 어르신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약속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