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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50화 (150/238)

150화 할배가 슬퍼하니까 (1)

유진산은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필살기란 말 그대로 반드시 상대를 죽이기 위한 최후의 기술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기술을 왜 하필 자신에게 시험해본다는 말인가.

설마 진심으로 공격하진 않겠지만,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보법을 밟으며 수십여 개의 분신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돌풍처럼 자신의 주위를 빙빙 돌며 시선을 어지럽히는 모습이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선풍보법(仙風步法)?’

가문의 보법이 언제부터 이렇게 현란했단 말인가.

극성이라 불리는 십성(十成)의 화후를 돌파해 더욱 높은 수준에 오른 것이 분명했다.

보법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에서 공격이 날아올지 예측할 수가 없었으니까.

선공을 개시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수십 개의 분신 중 어느 것을 타격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들어간다!?”

친절하게 공격시점까지 알려주다니. 그렇다면 방어의 성공률이 곱절은 올라갈 터.

유진산은 공격에 대비하여 창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오너라!”

외치기 무섭게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헉?’

유진산은 순간적으로 착시와 환영을 보는 듯했다.

자신의 주위 삼십육(三十六) 방위에서 동시에 죽봉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어지러워진 그는 몹시 당황했다.

천라지망(天羅地網).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촘촘한 그물망에 갇힌 것처럼, 피할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것이 실초이고, 어느 것이 허초란 말인가. 도무지 분간되질 않았다.

유진산은 자신의 감각을 믿고 죽봉을 휘둘렀다.

콰쾅-!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묵직한 감촉.

손녀의 필살기를 방어했다는 기쁨이 그의 표정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막…….”

그가 환희의 외침을 토해내기도 전에 사방에서 죽봉 세례가 폭우처럼 이어졌다.

투타타타탁-!!

“크억!”

불과 한 호흡에 수십 대는 두들겨 맞은 듯했다.

철퍼덕 넘어진 유진산은 일어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조금 전의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모든 것이 실초였다고……?’

직접 당했음에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손녀가 힘을 조절했기에 망정이지 실전이었다면 온몸이 분쇄되었으리라.

“아팠어?”

유설이 머리맡에 쪼그려 앉아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래도 미안하긴 한 모양이었다.

“아이고. 기어코 손녀가 할아버지를 때려잡는구나.”

“할배, 내가 미안해…….”

손녀의 부축으로 몸을 일으킨 유진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런 기술은 어디서 배웠어?”

유가살풍창의 초식이 아니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이러한 창술은 본 적이 없었다. 의문이 들 수밖에.

“내가 만들었어. 무적설이창법 일 초식 설설봉타(雪雪棒打)!”

이름 한번 거창했다. 한겨울에 눈발이 휘날리도록 때린다는 뜻의 초식명인가?

어쨌거나 새로운 무공을 창안한 손녀의 재능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금강불괴신공을 수련하고 있는 사이 고심해서 만든 모양이었다.

“대단하구나. 다음 초식도 있어?”

“아니. 아직은 일 초식밖에 못 만들었어. 어땠어?”

말해서 무엇하랴.

유진산이 아는 한에서는 전무후무한 최강의 초식이었다.

“설설봉타인지 뭔지 그거 할아버지한테도 전수해주거라.”

탐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창술대회에 화경급의 고수라도 등장한다면 낭패를 당할 터.

아주 잠시라도 경지의 차이를 뒤집을 수 있을 만한 비장의 한 수가 필요했다.

게다가 가문의 선풍보법을 사용한 초식이라면, 익히는 것도 좀 수월할 것 같았다.

“……그냥?”

맨입으로는 알려주기 싫다는 것인가?

유진산은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손녀를 꾸짖었다.

“이 녀석이 할아버지를 때려눕힌 것도 모자라 협상을 하려고 해!?”

“흥. 설이가 얼마나 힘들게 만든 건데.”

예상과는 달리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팔짱을 끼고 딴청을 피우다니.

이런 식으로 버티고 나오니 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을 바꿀 수밖에.

유진산은 다시 목소리를 낮춰 사근사근 타이르듯 말했다.

“어디 조건이 뭔지 말해 보아라.”

“그래. 뭔지는 모르겠다만 할아버지가 다 들어주마.”

목적을 달성한 유설은 한 손을 슬쩍 내밀었다.

“내 손 잡아줘.”

“……손은 왜?”

영문을 알 수 없던 유진산은 얼떨결에 손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유설이 배시시 웃으며 보조개를 피어 올렸다.

“나랑 단풍구경 가자~ 이모들이 그러는데, 오늘 옆 마을에서 축제한대.”

“원하는 게 고작 그거였어?”

“응. 할배가 같이 가주면 생각해볼게.”

전수해준다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해보겠다니?

순간 유진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손녀와 놀아주지 못해서 마음이 쓰였던 참이었다.

이런 것이라면 굳이 조건이 아니더라도 그냥 들어주었을 터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날씨도 선선하니 나들이하기엔 좋은 날이로구나.”

“히히~”

금양촌. 정군산 근처에 자리한 이 마을엔 매년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마을 외곽에 삼림공원이 조성되어 단풍명승지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풍나무는 지역별로 종류가 다양한데, 이곳의 품종은 잎사귀의 끝이 세 개로 갈라지며, 열매가 달려있다.

붉게 물든 세상을 함께 걷는 손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아가. 그리도 좋으냐?”

“응! 너무 예쁘다. 매년 오고 싶어~”

“그리하자꾸나. 우리 설이는 어떤 꽃이 좋아?”

유설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키득거렸다.

“할배꽃~”

어찌 그 의미를 모르겠는가.

자신의 귀와 머리에 단풍잎을 잔뜩 꽂아 재밌는 모양이었다.

수치스러움 따위는 없었다. 손녀가 좋아한다면야 못 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녀석 참…….”

한참을 말없이 걷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정적을 깨고 손녀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할배.”

“응?”

“우리 나중에 돈 많이 모아서 집을 사자. 그래서 마당에 나무도 심고, 꽃도 심는 거지. 어때?”

유진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지나온 행보와 앞으로의 계획. 갑자기 그 모든 것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손녀와 함께 가문의 복수를 이어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유설이 다시 물어왔다.

“왜 대답 안 해? 싫어?”

“아가.”

유진산은 하늘의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손녀가 원한다면 할아버지는 다 좋지. 지금 이렇게 무림을 떠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화원도 가꾸고, 농사도 지으며 평화롭게 사는 게다. 할아버지가 돈은 어떻게든 마련해 보마.”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해야 할 일이라니?”

유설은 떨어지는 단풍잎을 낚아채고는 할아버지의 머리에 꽂으며 대꾸했다.

“우리 가족을 죽인 나쁜 사람들 말이야. 잡아서 물어봐야지. 왜 그랬는지.”

유진산은 순간 흠칫했다.

지금껏 비밀로 해왔던 가문의 비화였다. 그것을 어찌 손녀가 다 알고 있다는 말인가.

갑자기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

“으음~ 세 살쯤?”

유설이 세 살이라면 강호를 떠돌다가 호현에 정착하던 시기였다. 지금껏 철저히 비밀로 감춰왔거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얘기한 적이 없었는데?”

“있어~ 할배 잘 때마다 울면서 가족들 이름을 불렀잖아.”

“내가 그랬다고?”

자신이 그런 잠꼬대를 했다니. 게다가 그걸 어린 손녀가 옆에서 보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응. 유연평, 유연청, 유영안, 유연휘……. 그리고 또 누구였더라. 아 진소희! 진소희는 누구야? 가장 안타깝게 떠났다며.”

손녀에게서 자식들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유진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개중에는 막내아들이자 설이의 아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소희……. 그녀는 총명하고 당찼지만, 마음씨가 여려 항상 마음이 쓰였던 막내며느리였다.

아이가 슬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지금껏 어미에 대한 것만큼은 말을 아껴왔다.

그러나 이제는 숨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더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말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손녀도 알아야 할 자격과 권리가 있었다.

유진산은 고민 끝에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던 할아버지의 며늘아기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기를 숨기며 안타깝게 갔지. 그리고…… 바로 네 어미다, 아가.”

유설은 말문을 잃었다. 그저 눈물만 뚝뚝 흘러내릴 뿐.

세상 누구보다 강인한 아이였지만, 어찌 슬픔 앞에서 태연할 수 있겠는가.

“흑…….”

유진산의 두 눈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곧이어 조손은 서로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목이 메어 입에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동안 왜 모른 척했어?”

“할배가…… 할배가 슬퍼하니까.”

유설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유진산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끄흑. 미안하다, 아가……. 할아버지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나, 엄마를 보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지금은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질 않아. 너무…… 보고 싶어.”

상상을 초월하는 기억력을 지닌 아이였다.

아기 때 보았던 어미의 모습이 어렴풋이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어미 모습을 한 번이라도 다시 보여줄 수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

하지만 죽은 자를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인가.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훌쩍이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고 있는 그때였다.

무엇인가를 발견한 유진산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응?”

손녀를 슬쩍 떨어트린 그는 다짜고짜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곳엔 전망 좋은 곳에 앉아서 풍경을 그리는 중년의 화가가 있었다.

손으로 잡으면 만져질 것 같은 생동감. 한눈에 봐도 그림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보시게. 내 부탁 하나만 함세.”

붓대를 움직이던 화가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멈추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웬 꼬마가 반말과 함께 은자 한 냥을 내밀고 있었다. 머리에는 단풍잎까지 잔뜩 꽂고서 말이다.

그냥 미친 아이 같았지만, 거금을 내밀고 있는데 어찌 홀대할 수 있겠는가. 은자 한 냥은 몇 달을 벌어야 하는 금액이었다.

“……무슨 부탁?”

“믿기 어렵겠지만, 노부는 무림인이네.”

화가는 유진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범상치 않은 눈빛과 아이는 흉내 낼 수 없는 노인의 말투까지.

분명 무엇인가 이상하긴 했다.

그때 그의 손에 있던 은자가 스스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일반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었다.

은자는 곧이어 화가의 무릎 위에 천천히 안착했다.

“괜찮다면 우리 손녀를 위해 그림을 하나 그려줄 수 있겠는가. 그럼 내 그걸 자네에게 주겠네.”

“정, 정말 이 은자를 내게 준다는 말이오?”

화가의 말투는 존대로 바뀌어있었다.

상대가 무림인이든 어린애든 정체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값만 제대로 쳐준다면 최고의 고객이었다.

“만약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 은자 두 냥을 더 주겠네. 그러니 최선을 다해 그림 한 장만 그려주시게.”

“고작 그림 한 장에 은자 세 냥을 준다는 거요?”

“지금 자네가 그려줄 그림에는 그만한 값어치가 있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이지.”

화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이어 그의 양손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실력이 인정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 눈에는 비장함까지 서려 있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든 내 영혼을 담아 그려보겠소.”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선 여인을 한 명 그려주시게. 얼굴을 설명하자면 이마는 적당히 넓으면서도 반듯하고, 머리와의 경계선은 부드럽게 각져 있네. 치아와 턱은 아담하니 짧고, 눈썹은 긴 초승달이었네.”

“계속 설명해주시오.”

“눈매는 가느다랗고, 코는 마늘쪽, 입술은 앵두와 같게. 전체적으로는 이목구비가 조화를 이루면서 단아하고 청순한 얼굴일세.”

유진산은 자신의 기억을 총동원하여 쉬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한참을 듣던 화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붓대를 쉼 없이 움직여나갔다.

“한번 시도해보겠으니, 혹시라도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짚어주시오.”

“그리하겠네.”

마치 접신이라도 된 것처럼 화가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그의 그림은 반 시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머릿속에 담아두던 그 모습 그대로의 그림이 완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작업이 모두 끝나자 화가의 입에서 깊은숨이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완성되었소. 장담컨대 이 그림이 내 필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소.”

“고맙네. 어서 약속한 대가를 받으시게.”

유진산은 재빨리 화가에게 은자 두 냥을 더 내주었다.

그러고는 그림을 받아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손녀에게 건네주었다.

“자, 어서 확인해 보아라. 할아버지가 보기엔 네 어미랑 똑같구나.”

유설은 눈을 끔뻑 끔뻑거리며 그림 속의 여인을 주시했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돌연 손녀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드디어 깊은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어미의 얼굴이 기억난 것이리라.

“엄마……?”

“그래. 그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 며늘아기다. 그리고 이걸로 설설봉타의 값은 치른 거니, 그런 줄 알거라.”

유설은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며 할아버지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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