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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51화 (151/238)

151화 할배가 슬퍼하니까 (2)

천하제일 창술대회.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진산은 밤낮으로 수련에만 매진했다.

그사이 손녀는 매일같이 하루에 두 차례씩 찾아와서 도와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기도 나름대로 뭔가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목표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어느덧 금강불괴신공은 팔성(八成)의 화후에 도달했으며, 손녀에게 전수받은 초식은 흉내를 낼 수 있을 정도까지 이르러 있었다.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 할 시점이었다.

긴 호흡과 함께 그의 발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가장의 가주가 직접 펼치는 선풍보법이었다.

스스스슥-!!

바람결을 타고 움직이는 신선 같은 몸놀림. 능숙하게 분신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벼락처럼 빠른 손녀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설설봉타의 초식을 펼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원을 그리며 움직이던 유진산이 드디어 움직임을 개시했다.

“하압!”

거센 기성과 함께 팔방(八方)에서 용살창이 기염을 토해냈다.

파파파팟-!!!

검붉은 창기가 원 안으로 모여들며 공간을 분쇄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초식의 창시자인 손녀는 삼십육(三十六) 방위에서 그물을 만들어내었지만, 지금의 유진산은 팔방이 한계였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에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겠구나.’

본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비장의 한 수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초식을 터득한 유진산은 마음이 든든해졌다.

무적설이창법 일 초식 설설봉타(雪雪棒打). 거만한 이름만큼이나 위력 또한 명불허전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휴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 계실 줄 알았소, 형님.”

뒤를 돌아보니 백규가 씩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문주가 이리 돌아다녀도 되는가? 한창 바쁠 텐데.”

“내일 출발한다던데 인사는 미리 해둬야 하지 않겠소? 대회에 나간다고 설이한테 얘기는 들었수다.”

자신이 창술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고 녀석, 참. 조용히 다녀오자 했거늘.”

“하하. 그게 될 리가 없지 않소? 지금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다니고 있으니,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요.”

대회 참가는 혼자 하는 것이거늘, 왜 자기가 신이 난단 말인가.

모처럼의 강호행에 마음이라도 들뜬 것일까?

그렇다고 좋아하는 손녀를 나무랄 수도 없는 일. 유진산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비밀로 하려 했는데 하는 수 없겠구만. 그런데 아우도 복장을 보아하니, 어딘가 외출하려는 모양이군.”

“사파연합회의가 있어서 말이오. 형님 말대로 정파 놈들이 칼을 갈고 있으니 우리도 대비해야 않겠소.”

당분간 호현은 엄두를 내지 못할 터. 아무래도 방어에 취약한 다른 사도세력들부터 정리할 공산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인연이 없는 곳까지 신경을 쓰려면 한도 끝도 없을 테니.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음양쌍괴는 모든 것이 자유로웠으며,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위치였다.

“헌데 땡중은 요즘 조용히 있던가? 우리가 동시에 자리를 비우면, 통제해줄 사람이 없을 터인데.”

무력으로 정혜를 제어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유설뿐이었다.

그 외에 그를 조금이라도 다를 수 있는 자는 유진산과 백규가 유일했다.

이 셋이 한 번에 자리를 비우게 된다니 걱정이 될 수밖에.

백규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손을 휘저었다.

“하하. 그분은 걱정하지 마소. 지금 다른 것에 푹 빠져 있으니까.”

백규의 표정을 보니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푹 빠져 있다니?”

“얘기 못 들으셨나 보오. 요즘 온종일 식조전에서 일을 돕느라 나오질 않고 있소.”

유진산은 흠칫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식조전은 문파 내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전각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 파계승이 그곳에서 일을 돕고 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설마 요리에 취미라도 붙였단 말인가?”

백규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소. 헌데 사실은 말이오. 스님이 왕이모에게 홀딱 빠졌다오.”

“세상에나. 그 노파는 나이가 좀 있을 텐데? 어찌 스님이 할머니를 탐하고 있단 말인가.”

반로환동을 하기 전부터 자신과 안면을 튼 노파였다.

식조전의 책임자인 그녀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성질이 불같아 문도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게다가 나이도 가장 많아서 왕(王)이모란 별명까지 따라다닌다.

“하하. 남녀의 마음을 우리가 어찌 알겠소. 왕이모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고. 어쨌거나 둘 다 외로운 처지니 잘된 일이지 않소.”

“그것참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어쨌거나 아우말대로라면 한시름 놓이는구만. 통제해줄 사람이 한 명 더 생겼으니.”

“맞소. 왕이모 덕분에 요즘 내가 아주 마음이 편안하다오.”

유진산도 이 상황이 웃긴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그런데 아우가 날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을 텐데?”

“그저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드리러 왔소. 무림맹에서 음양쌍괴에게 쌓인 분노와 원한이 하늘을 뚫을 정도라고 소문이 파다하니까.”

“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 또 무림맹에서 수배전단이라도 붙여놓았나?”

백규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수배전단은 수배가 가능한 상대에게나 붙이는 거요. 요즘 섬서의 정파놈들은 아이들만 봐도 슬슬 피해 다닌다오.”

“헌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최근의 정보를 종합해보면 무림맹에서도 설이는 포기한 것 같소. 대신 형님을 노린다고 하더이다. 절대 손녀 곁에서 떨어지지 마시오.”

굳이 분개할 이유도 없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한동안 수련에 매진해오지 않았던가.

“신경 써줘서 고맙네. 허나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야.”

백규는 유진산의 전신을 슬쩍 살펴보았다.

달라진 기개와 쇳덩이처럼 탄탄해진 피부까지. 확실히 전보다는 강해진 듯했다.

“그렇다면 마음이 좀 놓이는구려. 아무튼 잘 다녀오소, 형님. 가는 길에 우리 조카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시고.”

백규는 인사 몇 마디를 더 건넨 후 등을 돌려 사라져갔다.

‘나도 어서 설이에게 가봐야겠군.’

몸을 씻고, 봇짐도 챙기려면 슬슬 준비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는 백규가 사라졌던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을 때였다.

옆으로 맛있는 냄새와 함께 식조전의 모습이 보였다.

‘파계승이 이곳에 있단 말이지?’

도무지 상상되질 않았다. 어떤 상황인지 궁금할 수밖에.

유진산은 주방의 창틀에 매달려 내부의 모습을 쓱 훑어보았다.

주방 한쪽에 왕이모가 의자에 앉아있었고, 뒤에선 정혜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금양사에서 미쳐 날뛰던 그가 이렇게나 고분고분한 모습이라니?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때 자신을 발견한 정혜가 히죽 웃어 보였다.

“혀엉~”

그 순간 유진산을 발견한 왕이모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에구머니나!”

유진산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흐흠.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방해해서 미안하오.”

그가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정혜가 다급히 불러왔다.

“형, 어디가?”

“으음. 한동안 다녀올 때가 좀 있다. 그동안 사고 치지 말고 있어, 동생.”

“올 때 우리 예쁜이 선물 사다 줄 거지?”

“그, 그래.”

전각에서 떨어진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황당하긴 하지만, 덕분에 여긴 신경 안 써도 되겠군.’

정혜를 이곳에 앉혀둔 이유는 패도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통제할 수 있는 선에서.

저런 상황이라면 한동안 자리를 비워도 이곳은 걱정이 없을 터였다.

잠시 후 거처에 돌아오자 손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봇짐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챙겨 넣고 있었다.

“할배, 왔어?”

보지도 않고 자신이 온 것을 알아채다니. 그야말로 눈치가 귀신같았다.

“오냐. 근데 뭘 그렇게 많이 챙기는 거야? 당근은 왜 넣었어?”

뒤에서 자라처럼 목을 빼고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옷가지는 그렇다고 치지만, 엄청난 양의 주전부리들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설이 간식이야. 빨리 씻고 와, 할배. 우리 지금 출발해야 해.”

유진산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출발시간을 정해? 그건 할애비가 결정하는 게다.”

그러든 말든 손녀는 보따리를 열심히 묶기 시작했다.

“내가 이미 다 준비해놨어. 할배는 아무것도 안 챙겨도 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급하단 말인가.

유진산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은근슬쩍 물었다.

“하남에 가면 흑야방에 들러서 현희 언니를 보고 싶은 거지?”

방주 풍호의 아내인 현희가 손녀를 특히나 예뻐하지 않았던가.

마침 흑야방의 총타는 하남의 개봉에 있으며, 창술대회가 열리는 장소와 멀지 않았다.

유설은 속내를 들켰다는 듯 쑥스럽게 웃었다.

“히히. 현희 언니 배에서 아기가 나왔다며? 빨리 가서 보고 싶어.”

얼마 전 흑야방의 은화린이 이곳에 찾아왔을 때 들었던 소식이었다. 당시 손녀에게도 말해준 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회가 끝나면 정보도 얻을 겸 한번 들를 생각이었다.

“……너도 다 계획이 있었구나.”

조손에게 하남은 초행길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황하에서 배를 타고 이동할 만큼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다.

경공을 펼쳐서 나아가기엔 함곡관을 통과해 육로로 가는 길이 가장 빨랐다.

대회장소까지의 거리는 유진산의 경공 속도를 기준으로 사흘. 충분한 휴식을 포함한 시간이었다.

손녀의 등에 멘 거대한 봇짐이 조금 가벼워질 무렵.

드디어 둘은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개봉에서부터 남쪽으로 백여리가 떨어진 중화산의 입구 부근.

넓적한 대련장을 끼고 대회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직은 참가 신청을 받는 시기였기에 인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할배는 여기 와봤지?”

“응. 이렇게 다시 와보니 감회가 새롭구나.”

무려 오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지금도 생생했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가문을 대표해 자신있게 출전하여 개망신을 당했으니까.

지금도 그때의 기억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저곳인가 봐. 할배도 빨리 가서 신청해.”

“급할 게 뭐가 있겠느냐. 잠시 기다려보자꾸나.”

유진산은 먼 곳에서 지켜보며 뜸을 들였다.

실력만 있다면 누구나 참가가 가능하지만, 꼬마 혼자 신청하는 과정이 순탄할 리가 없지 않은가. 주목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이 적을 때 다가갈 예정이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갑자기 손녀가 어딘가로 검지를 내뻗으며 눈을 크게 떴다.

“어어?”

“왜?”

“저기 동구 아저씨도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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