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어디 한번 두고 봐 (3)
결승전을 앞두고 반 시진 가량의 휴식이 주어졌다.
유진산은 대기 장소에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손녀가 그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시원해?”
“그래, 시원하구나. 근데 어제는 왜 그랬어?”
유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했다.
“으응? 뭐를?”
“시치미 떼도 다 알고 있다. 네가 어젯밤에 삽심육번을 기습한 거 말이다.”
“아아. 그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손녀의 반응에 기가 막혔다.
“그거라니? 할애비가 얘기하지 않았더냐. 어떤 경우에도 먼저 상대를 공격하지 말라고.”
유설이 무공을 사용해도 되는 경우는 자신의 지시가 있거나, 상대가 먼저 공격해올 때뿐이었다.
아기 때부터 교육했기에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아니야. 그 아저씨가 먼저 나를 때리려 했다구.”
“먼저 공격해오게끔 겁주면서 다가간 건 아니고?”
“……이상하게 기억이 잘 안 나네. 나는 정말 방어만 했어. 같이 가서 물어볼래?”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어먹지 않는 손녀였다.
이럴 때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니? 그렇다고 그에게 찾아가서 일방적으로 맞았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황당해서 웃음만 나왔다.
“방어만 해서 그 정도라니, 공격을 가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안 가는구나. 앞으로 시키지 않은 짓은 하지 말거라.”
별로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대답은 잘하는 손녀였다.
유진산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결승을 앞두고 휴식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양가장을 이김으로써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기에 여유가 가득했다.
‘우리 설이의 안마 솜씨가 갈수록 일취월장하는구나.’
어깨가 풀리며 몸이 점차 나른해졌다.
잠시 후 정적을 깨고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가. 설마 내가 그깟 녀석에게 죽기라도 하겠느냐. 그것도 비무에서 말이다.”
금강불괴신공을 익힌 이상, 어지간한 타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손녀는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설이 할아버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작게 속삭였다.
“왼쪽을 노려. 내가 발목을 부러트려 놨으니까.”
친절하게 약점까지 알려주다니.
유진산은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왼손을 어깨 위로 휘휘 흔들었다.
“할애비가 알아서 잘할 테니, 어떤 경우에도 너는 나서지 마. 자칫하면 시합이 무효가 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조심해야 해. 어제 내가 살펴보니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더라구.”
“제까짓 게 숨겨 봤자지.”
그때 동구가 마실 물을 가져오며 중얼거렸다.
“설이 말대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악운평까지 그렇게 순식간에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악가가 산동지방에서는 창술로 제일 유명하다잖아요.”
유진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건네받은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 녀석이 그렇게 쉽게 쓰러진 것은 좀 예상외긴 했지. 발톱이 부러져도 맹수는 맹수란 말인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놈과 어떻게 상대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유설과 동구가 걱정하는 것처럼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만약 그의 몸 상태가 멀쩡했다면 답이 없을 정도로.
손녀를 나무라면서도 성을 내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양가장과의 비무는 창술의 우위를 겨루기 위함이었지만, 이번 싸움은 달랐다.
기회만 생긴다면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할 터.
반병신이 된 몸으로도 멈추지 않는 그의 집요함은 기가 질릴 정도였다.
‘녀석들. 그간 나에게 쌓인 원한이 많긴 하겠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당대의 무림맹에 있어서 가장 큰 골칫거리가 바로 음양쌍괴임을.
하물며 창룡대는 오죽하겠는가. 음지에서 각고의 노력을 통해 키워진 비밀 조직이 속절없이 사냥당하고 있었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들을 처리하려고 할 수밖에.
허나 음괴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두뇌 역할인 자신을 먼저 잡으려는 것이리라. 그래야만 음괴를 꾀어내어 어찌해 볼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할배, 지금 나오래.”
고개를 돌려보니 심판이 결승시합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유진산은 시원하다는 듯 양쪽 어깨를 빙빙 돌렸다.
“그래, 수고했다. 덕분에 몸이 개운해졌구나.”
“잘하고 와. 우리 할배가 제일 멋있다!”
유설이 할아버지의 등을 토닥거렸다.
신체의 우월함 때문일까? 그 모습이 마치 누이가 동생을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지켜보던 동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 꼭 이기십시오, 어르신.”
“오냐, 설이랑 잘 지켜보고 있어. 어제 네가 당한 굴욕은 내가 호되게 갚아주마.”
“저는 괜찮으니 다치지나 마십시오.”
그의 말투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합장을 향해 나아갔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묘했다.
따스한 태양과 산뜻한 바람의 촉각이 언제 이렇게나 좋았던가.
지금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목창을 집어 들자 관중들의 거센 응원이 뿜어졌다.
“드디어 나왔다!!”
“힘내라, 꼬마야!”
“이길 수 있다, 태산아!!”
자신을 꼬마로 보는 이들은 무림의 사정에 무지한 지역주민들이었다. 그들의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며, 무림인은 일 할도 되지 않았다.
유진산은 목창을 쥔 양손을 가운데로 모아 그들을 향해 포권해 보였다.
“우와아아아!!!”
양소천과의 멋진 비무로 그의 인기는 더욱 상승해 있었다.
반면 삼십육번은 완전히 다른 반응을 받았다.
얼굴이 불어터진 그가 절뚝거리면서 다가오자 곳곳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우우우우우!!”
“나가 뒈져!”
“캬약~ 퉤!”
관중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지금까지 모든 대결에서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지켜본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밖에.
그의 공격에는 조금의 자비도 없었으며, 상대를 죽일 것처럼 무자비했다.
유진산도 잘 알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그가 잔혹하게 싸워왔던 이유.
그것은 바로 자신을 몰아붙일 때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였으리라.
시합장의 좌우에서 북이 울렸으며, 그것은 조금씩 빨라졌다.
결승전의 시작이 임박한 것이다.
그때 불어터진 삼십육번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드디어 만났군, 모사꾼 양괴.”
이미 서로가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굳이 놀랄 것도 없었다.
단지 창룡대에서 자신을 모사꾼이라 폄하하는 것에 기분이 나빴을 뿐.
“그래, 고작 모사꾼 따위를 잡겠다고 여기까지 기어 왔나?”
“고작이라니. 네놈 덕분에 수백 년을 이어온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있다.”
“그것참 좋은 소식이로구나.”
삼십육번이 움켜쥔 목창을 사선으로 내리깔았다. 출수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대주께서 기회를 한번 주라고 하셨다.”
“어이가 없군. 기회는 무슨 기회?”
“지금이라도 우리와 대의를 함께하겠다면, 그간 음양쌍괴가 강호에서 저질러온 패악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줄 수 있다.”
가문을 몰살시켜놓고 회유하려 들다니.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는 제안이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대장에 대해 언급한 창룡대원은 처음이었다.
무림맹주의 명을 받고 음지에서 조직을 이끌고 있을 놈이었다.
창룡대주만 잡을 수만 있다면 맹주에게 한 발 더 빠르게 다가갈 수 있을 터.
“너희들의 미친 짓거리에 무슨 대의가 있다는 말이더냐. 나도 기회를 한 번 주지.”
“창룡대주가 누구인지 말한다면 네놈의 죄를 어느 정도는 참작하여 주마.”
삼십육번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동시에 퉁퉁 부어오른 얼굴이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를 그렸다.
“너는 무조건 죽어야겠구나.”
찌이이잉-!!
비무의 개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동시에 삼십육번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유진산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파앙-!!
상대가 내지른 창끝이 얼굴로 바람을 뿜어냈다.
조금만 더 깊었어도 당했으리라.
‘필시 속전속결로 끝내려 할 터.’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만큼 시간을 오래 끌수록 자신이 유리했다.
무리해서 공격을 펼치다 보면 허점이 만들어질 것이며, 그때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에 불과했다.
두 자루의 목창이 허공에서 처음으로 격돌했다.
일 합을 마주한 유진산은 적지 않게 놀랐다.
자신의 두 발이 주르륵 밀려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가 시합에서 보여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힘이었다.
자신이 내가고수가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단 일 합을 주고받은 것만으로 상대의 경지를 확신했다.
‘……화경이라니. 얘기 좀 해주지, 이 녀석.’
손녀가 경고를 해주긴 했지만, 화경이라는 언급은 없었다.
아마 자신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따로 말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런 경우를 아예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절대고수의 경계라 불리는 화경에도 높낮이가 있는 법.
눈앞의 삼십육번은 지금껏 마주한 창룡대원 중에서도 가장 강한 축에 속했다. 조직에서도 요직에 있는 놈이리라.
자세를 다잡을 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초식에 얽매이지 않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연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쾅-! 콰콰쾅-!!
합을 교환할 때마다 조금씩 자세가 무너져갔다.
그나마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던 것은 손녀가 입힌 부상 때문이리라.
화경과 초절정의 싸움. 그 거대한 격차는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꼼짝없이 당하겠구나.’
이를 악다문 유진산은 보법을 밟았다.
파계승 정혜에게 전수받은 대나이신법(大那移身法)이었다.
지금까지는 가문의 무공만을 사용했지만,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의 신형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상대의 후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신묘한 신법에 놀란 삼십육번이 잠시 주춤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상체를 비틀며 머리 위에서 목창을 사선으로 회전시켰다. 후미를 공격하기 위해서이리라.
하지만 유진산도 이번엔 초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가살풍창 구 초식 맹룡승천세(猛龍昇天勢).
내력을 가득 머금은 목창이 바닥을 차고 솟구쳐 올랐다.
콰아앙-!!
막아내긴 했지만, 두 팔로 전해지는 충격이 묵직했다.
유진산의 두 발이 시합장의 바닥을 파고들며 균열을 일으켰다.
자신을 죽일 각오로 내려친 일격이리라.
그에겐 시합의 승패 따위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오직 자신을 해하려는 목적만을 갖고 있을 뿐.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눈 깜짝할 사이 목창이 자신의 복부를 향해 접근해왔다.
비록 찰나였지만,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그의 창끝에 미세한 창기(槍氣)가 서려 있음을.
무기를 통해 기를 발출하는 것은 시합에서 금지된 행위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눈치챈 자가 없었다. 유설을 제외한다면.
섬전 같은 찌르기는 도저히 피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창기가 복부를 파고들고 있었지만, 들려온 소리가 무척이나 기이했다.
쩌엉-!!
마치 피부가 아니라 종을 때린 듯한 굉음이었다.
삼십육번의 두 눈이 일순간 흔들렸다. 지금의 상황이 의아했기 때문이리라.
그가 어찌 알겠는가. 유진산이 금강불괴신공(金剛不壞神功)을 수련하고 있었음을. 만약 알았다면 창기가 아닌 강기를 사용했을 것이리라.
그때 어디선가 손녀의 전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 빨리 왼쪽으로 돌아, 할배!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유진산의 두 발이 다시 한번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