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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58화 (158/238)

158화 기분 좋은 날 (1)

유진산은 대나이신법을 사용해 그의 왼쪽 방위를 점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이 신묘한 신법은 전투에서 아주 요긴했다.

‘옳거니! 바로 이거로구나!’

조금 전과는 상황이 확실히 달라졌다.

상대에게서 그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빈틈이 조금씩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귓가로 다시 한번 손녀의 전음이 들려왔다.

- 추혼일섬!

유가살풍창 사 초식 추혼일섬(追魂一閃). 벼락처럼 빠르게 상대를 추적하여 찌르는 초식이었다.

유진산의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움직였다.

뱀처럼 움직이는 창끝은 삼십육번의 허점을 집요하게 좇았다.

회심의 일격은 안타깝게도 막혀버렸다.

그러나 소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자세가 휘청거렸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방어한 탓이었다.

- 파고들어!

밤톨만 한 게 어른한테 훈수를 두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으니까.

짧게 도약한 유진산이 상대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며 회전했다.

비진살강세(飛進殺强勢). 유가살풍창의 초식 중 가장 매서운 돌진기술이었다.

또다시 상대의 창대에 공격이 가로막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를 계속 흔들어놓으면서 기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유진산은 계속해서 왼쪽으로 돌며 연격을 쏟아냈다.

쾅-! 쾅-! 콰쾅-!!!

목창이 부딪히고 있었으나, 들려오는 굉음은 흡사 우렛소리와 같았다. 두 자루의 창대가 묵직한 기(氣)를 가득 머금고 있기 때문이리라.

합이 계속될수록 삼십육번의 자세는 점차 무너져갔다. 중심을 잡아야 할 왼발이 부러져 있으니 그럴 수밖에.

그가 넘어질 듯 휘청거릴 무렵. 유진산의 한쪽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잡았다, 이놈!’

맹룡아두(猛龍牙頭). 살풍창의 초식 중에서 위력만큼은 가장 뛰어난 맹격(猛擊)이었다.

창끝이 원을 그리며 사나운 용의 형상을 취했다.

상대의 머리를 물어뜯을 듯 나아가는 공세엔 인정사정이 없었다.

비록 강기를 발출하진 않았으나, 목창 그 자체에 그의 십성 공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유진산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위기의 상황에서도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다니.

어딘가 마음 한편이 불안했지만, 아무려면 어떠하랴.

유진산은 있는 힘껏 창끝을 밀어 넣었다.

상대는 제대로 된 초식을 펼칠 겨를도 없이 창대를 가져다 댈 뿐이었다.

콰직-!!

삼십육번이 움켜쥔 목창이 조각나는 소리였다.

양팔이 젖혀진 그는 앞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부러진 창조차도 놓친 상태로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마무리뿐.

하지만 다음 행동을 개시할 수가 없었다. 다급한 손녀의 전음 때문이었다.

- 피해!!

난데없이 피하라니? 영문을 알 수가 없었지만, 싸움에서만큼은 허튼소리를 할 설이가 아니었다.

유진산은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대나이신법을 펼쳤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무엇인가를 볼 수가 있었다. 상대의 왼쪽 소매에서 가느다란 빛살이 거미줄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을.

강호의 경험이 풍부한 그는 그것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천잠사?’

천잠사(天蠶絲). 영물에게서 뽑아낸 누에실로, 이것에 휘감긴다면 벗어날 방도가 없다.

십여 가닥의 실이 자신의 몸과 창대를 휘감으려 했지만, 한 치 차이로 피해낼 수가 있었다.

만약 포박되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나 위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삼십육번의 오른쪽 소매에서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단검을 움켜쥐기 무섭게 서늘한 검강(劍强)이 솟구쳐 올랐다.

관중석에서 눈썰미가 있는 몇몇 무림인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뭐, 뭐야!?”

“검, 검강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관중들이 놀라든 말든 그들의 반응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팔성(八成) 화후의 금강불괴로 검강을 막아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을 터.

간담이 서늘해진 유진산도 창강(槍强)을 뽑아냈다. 삼십육번의 단검에 서린 검강에 비교하면 미약했지만, 이것이 아니라면 맞설 방도가 없었다.

비무에서 무기로 기를 발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의미가 없었다. 그가 천잠사와 단검을 꺼내든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부전승이었으니까.

이제부터는 비무가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않으려 했건만.’

위기의 상황이었지만 아직 그에겐 비장의 한 수가 남아있었다.

본디 무림고수라면 누구나 그럴듯한 최후의 초식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자신의 생명줄 같은 수단이기에 마지막까지 숨기고 아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적설이창법 일 초식 설설봉타(雪雪棒打).

손녀가 직접 만들어낸 최강의 창술이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상대가 달려드는 그 순간, 유진산의 두 발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분신을 만들어냈다.

회오리를 머금은 강풍처럼 여러 개의 분신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스스스슥-!

정체를 드러낸 창룡대원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자세를 낮추며 단검을 잡아당기는 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공격을 되받아치며 일격에 끝낼 심산인 듯했다.

혹시라도 음괴가 시합장으로 난입해올지 모르기에 오래 끌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그가 유진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일순간 창룡대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팔방(八方)에서 여덟 자루의 목창이 동시에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강기를 머금고서 말이다.

본디 이러한 다중공격은 실초와 허초가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느껴지는 기의 흐름이 허초 따위는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럴 수가. 모든 것이 실초라는 말인가?’

황당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초식이었다.

피할 방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순순히 당해줄 창룡대원이 아니었다.

이를 악다문 그는 미친 듯이 사방으로 강기를 뿌려댔다.

벼락처럼 빠른 화경의 몸놀림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콰쾅-! 콰콰쾅-!!

단검에 맺힌 강기가 창끝이 다가오기도 전에 하나둘씩 소멸시켜갔다.

하지만 왼발의 부상 때문이었을까? 완벽하지는 못했는지 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눈 깜짝할 사이 두 개의 빛살이 번뜩였다.

푹-! 푸욱-!!

팔방에서 들어오는 공세를 모두 막으려 했지만, 기어코 두 개를 놓친 것이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덜그럭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오른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왼쪽 복부에서 끊임없이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상태에서도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제야 알겠느냐. 노부의 무서움을.”

붉게 충혈된 두 눈이 이죽거리는 유진산을 노려보았다.

화경과 초절정의 경지 차이는 하늘과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상적으로는 맞수가 될 수 없는 상대였다.

이렇게 어이없이 당했으니 분하고 억울할 수밖에.

“……빌어먹을. 음괴에게 당한 부상만 아니었어도.”

유진산의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몹시 흥분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내색하지 않았을 뿐.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대를 조롱하는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렇게 핑계를 댈 줄 알았다. 도망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직접 기어 나온 것은 네놈 아니더냐.”

창룡대원은 더 이상 유진산과 말을 섞기 싫다는 듯 체념했다.

“죽여라.”

안색이 창백히 질린 그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든 듯했다.

이제는 그냥 찔러넣기만 하면 될 터.

“오냐. 그렇지 않아도 막 그럴 참이었다.”

섬전처럼 내질러진 목창의 끝이 그의 아랫배를 파고들었다.

쩌억-!

“크윽! 네, 네 이놈…….”

복부를 움켜쥔 창룡대원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분노했다.

자신을 죽여줄 것이라 예상했던 유진산이 단전만 파괴하고 물러섰기 때문이다.

이미 그는 멀찍이 물러서서 심판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넋을 놓고 있던 심판이 정신을 차리고는 관원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저자를 포박하시오!”

굳이 몸을 묶을 필요도 없었다. 단전이 파괴된 이상, 이젠 위험인물도 아니었으니.

오히려 상처에 죽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대기하던 관원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나갔다. 응급치료를 마친 후 뇌옥에서 심문 과정을 받게 될 것이리라.

여전히 관중들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조금 전 벌어진 사건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모두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관중석의 어딘가에서 여자아이의 거센 고함이 터져 나왔다.

“우리 할배 멋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맑고 청량한 아이의 목소리.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아챌 수가 있었다.

자신의 손녀인 유설이 동구와 함께 어깨를 덩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수많은 관중이 동시에 함성을 내질렀다.

“하하하! 너무 멋있잖아!”

“정말 최고의 대회였어!!”

관중석을 쓱 바라보던 유진산의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옅게 서려 있었다.

명예로운 시상식이 드디어 끝이 났다.

황실이나 무림맹에서 주최하는 큰 대회가 아니었기에 포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제법 쓸 만한 명창 한 자루와 약간의 상금뿐.

하지만 유진산에겐 그 무엇보다 값진 의미가 있었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한 가지를 드디어 이룬 것이다.

그의 기분은 지금 날아갈 것만 같았다.

“동구 너도 수고했다. 평소에 먹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면 마음껏 주문하거라.”

인근 마을의 객잔이었다.

탁상 위에는 이미 값비싼 종류의 음식이 수북했다.

유진산도 몇 번 먹어보지 못했던 용봉탕까지 주문해놓은 상태였다.

붕대에 가려진 동구의 얼굴도 무척 밝았다.

“근데 설이는 어딜 간 겁니까? 이 맛있는 음식을 놔두고.”

“예나 지금이나 눈치가 없는 건 여전하구나. 네게 줄 우정 팔찌 사러 갔을 게다.”

누구보다 손녀를 잘 아는 유진산이 아니던가. 용돈을 두둑이 받아간 것으로 봐서 틀림없었다.

마음이 따듯해진 동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를 긁적이는 것을 보니 머쓱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정말 축하드립니다, 어르신.”

“축하는 무슨. 늙은이가 애들 노는 데 나와 상을 가로챘으니 주책을 부린 게지.”

“에이. 창술대회에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오히려 더 대단하신걸요?”

유진산은 탁상 옆에 기대두었던 창을 그에게 건네었다.

“자, 이거나 받아라.”

“그걸 왜 저에게 주세요? 어르신께서 힘들게 받으신 포상이잖아요.”

“나는 이미 더 좋은 게 있어. 너무 커서 내 손에는 맞지도 않고.”

“아닙니다. 제가 이걸 어떻게 받아요?”

눈치 없는 동구의 모습에 유진산이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돌아가서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보여드려. 자랑스러운 아들이 우승하고 왔다는 거짓말 정도는 한 번쯤 해도 괜찮아.”

“……예?”

유진산은 괜찮다고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록 겉모습은 아이의 웃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연륜이 녹아있었다.

“효도라는 게 뭐 별거 있겠느냐. 얼마 못 사실 텐데, 좋은 추억이라도 하나 더 가지고 갈 수 있게 해드리거라.”

동가장의 가주인 동운걸 또한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이 창이 진품인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들이 창술대회에서 승리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무척 기뻐할 게 분명했다.

“……어르신.”

동구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 보였다.

유진산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다 큰 녀석이 왜 울고 그래? 설이 오기 전에 어서 그치거라.”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객잔의 입구에서 유설이 후다닥 뛰어오고 있었으니까.

“할배, 나 그 아줌마 만났어!”

“아줌마라니?”

쪼그만 게 자신이 아는 인물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그것도 하남 땅에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되는 인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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