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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59화 (159/238)

159화 기분 좋은 날 (2)

손녀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흑야방의 은화린인 듯했다.

하남의 남부지역을 총괄하는 지부장으로 조직에서 가장 총명한 인재였다.

그녀가 이곳에 올 만한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한가하게 지방의 창술대회나 보러 올 리는 없을 터. 아무래도 자신에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음. 여기서 우리를 찾고 있다는 얘기더냐.”

“응. 할배가 대회에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왔는데, 조금 늦었대.”

마침 잘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흑야방에 긴히 부탁할 일이 있었으니까.

“근데 왜 같이 오지 않고?”

“밥 다 먹고 역참에 들러달래. 거기서 기다린대.”

역참(驛站)은 말을 바꾸어 타는 곳이다.

그곳엔 이동하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숙박시설과 마구간 등이 설치되어 있다.

“그래.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일단 배부터 채우고 가보자꾸나.”

“응!”

유설은 대답하기 무섭게 허겁지겁 젓가락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풍성하게 먹는 자리라지만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급하게 먹어? 역참에 뭐 보물이라도 있다더냐.”

입안의 음식 때문에 얼굴이 빵빵해진 손녀가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이떠.”

“있다니? 뭐가?”

음식을 꿀꺽 삼킨 유설이 환한 표정으로 답했다.

“현희 언니도 와있대.”

흑야방의 주인인 풍호의 아내였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손녀를 무척이나 예뻐했다. 무공을 알려주겠답시고 매일같이 거처에 찾아왔을 정도로.

출산한 지 오래되지 않은 그녀가 아이를 양육할 장소로 택한 곳이 이 근방이었던 모양이었다.

음침하고 쾨쾨한 지하의 총타보다는 백배는 나을 터였으니.

“빨리 가서 아기가 보고 싶은 거구나?”

속내를 들킨 손녀가 배시시 웃었다.

묵묵히 지켜보던 동구가 유설의 그릇에 연신 고기를 얹어주었다.

“천천히 먹어. 역참은 이곳에서 가까우니 금방 갈 수 있을 거야.”

“잘 먹겠습니다~”

모처럼 여유로운 식사자리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객잔에서 배불리 먹고 나온 셋은 작별을 고하기 위해 마주 섰다.

동구의 팔에는 알록달록한 새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고맙다, 설아. 네가 준 선물은 평생토록 소중히 간직할 거야.”

지켜보던 유진산이 흐뭇한 얼굴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파의 지존이 준 선물이니 가보로 간직하거라.”

“예, 당연히 그래야죠. 여기에 글씨도 새겨져 있는걸요?”

팔찌의 안쪽에는 ‘동구와 설이의 우정 팔찌’라는 작은 글귀가 각인되어 있었다.

어른이 차고 다니기에는 유치한 문구였지만, 동구는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실 테니 어서 돌아가 봐.”

동구는 아쉽다는 듯 발걸음을 머뭇거렸다.

“또 만날 수 있겠죠?”

“강호가 아무리 넓다 한들 언젠가는 다시 보게 될 게다.”

“……예. 그럼 다시 뵐 때까지 건강히 지내십시오, 어르신.”

“건강은 무슨. 너보다는 오래 살 테니 걱정 말거라. 수련 게을리하지 말고.”

고개를 숙여 읍을 한 동구는 다시 유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이도 다시 볼 때까지 잘 지내야 한다.”

“네! 또 봬요, 아저씨~”

그렇게 셋은 작별 인사를 마쳤다.

동구는 멀어져 가면서도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댔다.

유진산도 한 손을 올려 보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일평생 수많은 무림인을 만나보았지만, 저렇게 순박한 녀석은 처음이로구나. 별고가 없어야 할 터인데.”

동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왜에? 동구 아저씨는 마음씨도 착하잖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거야.”

“쯧! 그래서 걱정이라는 게다.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는 약삭빠른 면도 있어야 해.”

그때 유설이 눈을 크게 뜨고 물어왔다.

“그럼 나는 어때!?”

잠시 손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진산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우리도 어서 출발하자꾸나.”

역참에 도착하자 아담한 전각 앞에 은화린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을 먼저 발견한 그녀의 호위무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자주 보는군.”

이제야 조손을 발견한 은화린이 밝은 얼굴로 양손을 모았다.

“축하드립니다, 어르신. 직접 가서 응원하고 싶었는데, 한발 늦었군요.”

“이거 창피하게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구만. 헌데 그 아이도 여기에 와있다고?”

아이가 누굴 지칭하는 것인지 은화린도 잘 알고 있었다. 현희가 이곳에 와있다는 정보는 자신이 건네준 것이었으니까.

“예. 마침 근방에 머물고 계셨는데, 손녀분이 보고 싶다고 한달음에 오셨어요.”

전각 앞에 마차 한 대가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타고 온 모양이었다.

그때 전각 안에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모습을 비췄다.

왼쪽 가슴으로 아이를 안아 든 그녀는 현희가 분명했다.

유설이 후다닥 달려가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언니!!”

“설아, 잘 지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응, 나두.”

둘은 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서로를 끌어안고 난리가 났다.

“애기 한번 안아 볼래?”

“응! 이름이 뭐야?”

“엽이라고 지었어. 웃는 걸 보니 누나가 좋은가 보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이를 안아 본 유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안녕, 풍엽아. 누나는 설이라고 해.”

“까르륵!”

아이가 배시시 웃자 유설도 어쩔 줄 모르며 자지러졌다.

“귀여워~ 귀여워~”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녀석. 아기를 안아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구만.”

그때 옆에 있던 은화린이 나직이 대꾸해왔다.

“믿기지 않는군요. 저토록 순수한 미소를 지닌 손녀분이 정파인들에게 공포의 음괴로 불리고 있다니요.”

“소문은 본디 과장되는 법 아닌가. 어쨌거나 우린 따로 얘기나 좀 하지.”

유설과 현희의 사이에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저 둘이 재회를 만끽하는 사이 자신 또한 일을 볼 생각이었다.

“예, 그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유진산은 현희와 눈인사를 주고받은 이후 은화린을 따라 이동했다.

전각의 내부로 들어선 둘은 탁상을 끼고 마주 앉았다.

“그래, 무슨 용건이 있어서 나를 찾으려 했는가.”

“사실…… 부탁드릴 일이 좀 있어서요.”

흑야방과는 친분이 두터웠지만, 지금껏 그들이 도움을 요청해온 적은 처음이었다.

내막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참 의외로군. 어쨌거나 잘되었네. 나도 자네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으니까.”

긍정적인 유진산의 반응에 은화린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럼 어르신께서 먼저 말씀하시지요.”

“사양하지 않겠네. 이번 창술대회에서 불순한 의도로 나온 놈을 잡았는데, 혹시 내용을 알고 있는가?”

은화린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도 모르면 흑야방이 정보를 다루는 조직이라 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자넨 그자가 누구라 생각하는가.”

“어르신을 노린 것으로 보아 정파 측의 고수일 테지요.”

“그리고?”

“그 정도의 고수임에도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뻔하지 않겠습니까. 창룡대에서 보낸 인물일 것입니다.”

눈치가 빠른 그녀였기에 대화가 수월했다. 자잘한 설명은 굳이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내 생각도 같네. 지금 그놈은 인근의 관아로 압송되었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르신이 무엇을 원하시는 지도.”

“대답이 시원시원하구만. 어디 계속 말해 보시게.”

“조직에서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곧 풀려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연관된 자들을 추적하고 싶은 게 아니신지요? 저희의 인맥을 이용해서요.”

유진산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내다니. 볼수록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남 지역의 관료들과 연줄이 있는 흑야방이라면 그럴 능력이 충분했다.

“자네 같은 인재가 풍호를 돕고 있다니. 그 녀석 참 복받았구만.”

“저는 방주님께 말하지 못할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로군. 어쨌거나 내가 원하는 것은 그뿐이니, 이제부터는 자네 얘기를 들어보지.”

최근엔 문신까지 지우고 있으니 앞으로는 놈들을 추적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터였다.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들기 전에 가능한 모든 것을 활용해야 했다.

“금양사의 사건이 벌어진 이후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금양사에서 있었던 일전은 사파인들에게 전설로 치부되고 있었다.

그곳에 집결하던 섬서 지역의 정파 고수들을 몰살시킨 쾌거였으니까.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사파인들이 호현에 모여 축제까지 벌이지 않았던가.

반면 무림맹은 그날의 치욕을 갚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다.

“벌써 보복이 시작되었단 말인가? 내가 떠나올 때만 해도 호현은 조용했는데 말이야.”

“호현은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곳은 사파의 성지 중에서도 가장 강한 곳이 되었으니까요.”

호현은 파계승 정혜와 백규가 지키고 있으며, 흑묘파가 지원하고 있다.

아직 비전투인력이지만 아미파에서 탈출한 아이들의 전력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도 수많은 고수가 드나들고 있었기에, 무림맹에서도 쉽게 손댈 수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유진산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의 보복은 호현이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할 것임을.

“결국, 놈들의 화풀이가 하남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예. 이곳의 사파 세력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희의 피해도 적지 않았고요.”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게.”

유진산은 양손을 탁상 위에 올린 채 깍지를 꼈다.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가관이었다.

하남 지역에 있는 사파의 주역들이 하나둘씩 암살을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도 있었다.

협과 정의를 외치는 정파에서 암살은 수치로 여기는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습격을 받은 곳은 백사문이었습니다. 그곳의 문주가 암살을 당하고, 심문하고 있던 창룡대원이 탈출했다더군요.”

사도련의 백사문(白蛇門).

각종 잔기술과 최면술에 능하여 금양사에서 사로잡은 창룡대원의 심문을 맡긴 문파였다.

정황상 흉수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제는 그들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사파에게 타격을 줄 심산인 듯했다. 전면전을 벌이기엔 음괴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테니까.

“애써 잡은 놈을 어이없게 놓치다니, 아깝게 됐군. 흑야방의 피해는?”

“저희도 정체가 노출된 간부 셋이 당했습니다. 피해가 계속되고 있는데 전혀 답이 없는 상황이라…….”

은화린은 답답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유진산이 그녀의 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흑야방의 전력은 대부분이 고용된 낭인무사들이며, 고수의 숫자도 많지 않다.

이름난 사파의 고수들도 당하는 마당에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을 터였다.

때마침 음양쌍괴가 하남에 왔으니 도움을 청해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자네는 물론 문 앞의 저 아이도 안전하진 않겠군.”

유진산이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각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느새 나타난 유설이 문틈에 서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등 뒤에 돗토리 같은 아이를 보자기로 감싸 업은 채로 말이다.

“현희 언니가 위험하다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둘의 대화는 속속들이 유설의 귓가에 전달되고 있었다.

현경이 가진 초인적인 청각은 수십 리 밖에서 우는 새의 지저귐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잠시 손녀와 눈을 마주친 유진산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더구나. 그놈을 잡지 않으면 안전하지는 않겠지.”

“누구야.”

모처럼 진지한 손녀의 얼굴이 웃겼기 때문일까?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유진산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거야 할애비도 모르지. 근데 네가 알아서 뭐하게?”

갑자기 유설의 큰 눈망울에 물기가 그렁그렁해졌다.

“엽이는 나처럼 엄마를 잃으면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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