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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62화 (162/238)

162화 오늘따라 달빛이 아름답구나 (2)

“백사문의 당주라고?”

인력거꾼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백사문은 사도련에서 넘겨받은 창룡대원을 심문하던 중 살수의 습격을 받은 문파였다.

은화린이 말하길 그 사건으로 문주가 살해당하고, 심문 중이던 창룡대원이 탈출했다고 했다.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코피를 닦은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매를 걷어 보였다.

팔뚝을 타고 오르는 흉악한 뱀 문신. 유진산의 식견으로 봤을 때 백사문의 것이 틀림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애먼 사람을 잡은 것 같구만.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지?”

어쩐지 살수치고는 조금 어설픈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비록 오해가 있었지만, 곤욕스러운 상황이었다.

정체를 밝힌 그는 억울한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잖아요.”

유설도 민망한지 어쩔 줄 모르며 양손을 공손히 모았다.

“……미안해요, 아저씨. 우리 할배가 몰라서 그랬어요.”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손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같이 공격하지 않았느냐?”

“응? 나는 안 때렸어.”

따지고 보면 유설은 다리만 걸었을 뿐, 타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음괴가 자네를 지목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네. 이거 어떻게 보상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군.”

“보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아닐세.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맞은 만큼 나를 때리게.”

미치지 않고서야 양괴를 어떻게 때린단 말인가. 그것도 사파의 지존인 음괴가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사문의 당주는 황급히 양손을 휘저었다.

“괘념치 마십시오. 사파의 영웅들에게 맞은 것이니 영광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의 흥분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유진산은 본론을 꺼냈다.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네. 헌데 명색이 당주나 되는 자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가.”

당주라면 문파에서도 중견급 우두머리다.

그런 그가 인력거꾼 행세나 하면서 매복해 있다니. 흔치 않은 일이었다.

“당한 게 있으면 돌려주는 게 우리 사파의 방식 아닙니까? 흑야방의 요청을 받고 문주님의 복수를 하러 왔습니다.”

호위를 보강하기 위해 사도련의 고수 몇을 초빙하는 것은 미리 얘기된 부분이었다. 아마도 그들 중 한 명이었으리라.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음. 근데 호위를 맡은 자들은 모두 장원 내에서 대기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놈은 우리가 잡는다고 했을 텐데, 왜 밖에 나와서 알짱거렸어?”

“……제가 복수에 눈이 멀어 고집을 부렸습니다. 모두 제가 자초한 일입니다.”

“자네의 행동이 살수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 맞을 만한 짓을 했구만.”

백사문의 당주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죄송합니다.”

“되었으니 신경 쓰지 말게. 지금이라도 바로 잡으면 그뿐이니. 내일부터는 이 근처에 얼씬도 말고 요양이나 해.”

백사문의 당주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힘없이 대답했다.

“……예.”

문주의 복수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양괴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겠는가.

힘이 곧 서열인 사파 무림에서 음양쌍괴의 한마디는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무룩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진산이 혀를 끌끌 찼다.

“당주라는 자가 어찌 그렇게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하는가. 그놈을 잡으면 넘겨줄 테니, 사문에서 기다리고 있어.”

“정, 정말입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당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원수 놈을 잡아다가 대령해준다니. 그야말로 횡재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양괴 또한 나름대로 속셈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 순간 당주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그놈을 요리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약속하지. 우리와 싸우고도 목숨이 붙어있다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음양쌍괴를 번갈아 보며 포권을 수차례나 계속했다.

그 모습이 부담스러웠던 유진산은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으니까, 볼일 끝났으면 어서 가봐.”

“예,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멀어져가는 당주는 한쪽 다리가 조금 불편한지 절뚝거렸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어깨를 들썩여댔다.

약간의 부상이 있었지만, 복수할 기회를 얻었으니 확실히 남는 장사였다. 당연히 좋을 수밖에.

유설이 그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금방 나을 수 있겠지?”

“저 발목? 네가 뒤에서 후려친 부위가 아니더냐. 그러고도 아까는 전부 할애비한테 뒤집어씌우더구나.”

유설은 대답 대신 먼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왜 대답이 없어?”

계속되는 할아버지의 추궁에 유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잘못해쪄~”

유진산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도저히 손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에휴. 어쩜 애비 어렸을 때랑 이리도 똑같을꼬.’

순간 늦둥이인 막내아들의 과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뒤늦게 철이 들긴 했지만, 어렸을 때는 말을 오지게 안 듣는 말썽꾸러기였다.

덕분에 뒷목을 잡았던 적이 몇 번이었던가.

그래도 가문에서 가장 심성이 착하고 사랑스러웠던 아이였다.

문득 떠오른 옛 생각 때문일까? 유진산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은화린은 이튿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했다. 대역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살수들은 눈치가 빠르기에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금화표국의 누각 위에 몸을 숨긴 조손은 대상을 한없이 기다렸다.

쟁쟁한 호위무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그녀를 대낮에 암살할 리는 없을 터.

해가 완전히 지고, 두 시진쯤 더 지났을 때였다.

어둑한 암흑 속에서 두 쌍의 작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언제 올까?”

“때가 되면 알아서 올 테니, 차분히 기다리자꾸나.”

“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온종일 쭈그리고 앉아 눈만 끔뻑이고 있으니 지루할 수밖에.

유진산은 작게 미소지으며 손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엽이를 위해서라도 꼭 잡아야 한다고.”

“응. 나한테 좀 혼나봐야 해.”

유설은 반쯤 감긴 눈으로 품속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아껴뒀던 당과를 꺼내고는 포장된 종이를 벗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간식이었다.

“그렇게 간식을 많이 먹으면 못 써. 튼튼하게 자라려면 밥을 먹어야지.”

유진산이 미리 챙겨온 주먹밥을 건네보았지만, 역시나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때 유설이 한쪽 소매를 걷어 왼팔을 접어 보였다.

그러자 구슬 같은 알통이 볼록 튀어나왔다.

귀여운 여자아이의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탄탄한 근육이었다.

“할배, 이거 보여?”

“……언제 그렇게 흉악한 근육을 만들었어?”

손녀보다 작고 마른 유진산의 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알통이었다.

단지 모든 것을 내공의 힘으로 대신하고 있을 뿐. 그의 겉모습은 유약한 아이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할배도 이렇게 되고 싶으면 뭐든 가리지 말고 먹어야 해. 한 입 먹어봐.”

손녀가 진지한 얼굴로 당과를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유진산이 괘씸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주려면 다 줄 것이지, 한 입만이라니?”

“두 개 먹어.”

당과에는 꿀을 굳혀 만든 산사나무 열매 여섯 개가 꽂혀 있었다.

그중 두 개를 준다는 것이다.

그냥 한번 떠본 것일 뿐, 애초부터 먹을 생각은 없었다.

“되었다. 할애비는 이거면 충분해.”

양손에 주먹밥을 움켜쥔 유진산은 억지로 욱여넣기 시작했다.

입맛은 없었지만, 먹는 것을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많이 먹고 빨리 크는 것만이 상책이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할아버지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히히. 싫으면 말고~”

당과를 핥는 손녀의 얼굴엔 행복함이 가득했다.

마지막 간식인지라 아껴먹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음식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이었다.

유설이 다급히 빈 꼬치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왔어! 드디어 왔다고!”

제법 큰 소리였지만, 일 장 밖으로는 조금의 잡음도 새어나가질 않았다.

손녀가 기(氣)로써 공간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 어디?”

유진산은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초절정의 시야를 지닌 그에게 어둠은 장애가 되지 않았지만, 살수의 움직임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틀림없이 숙련된 특급살수이리라.

“저기 창고 위에 그림자 보이지?”

위치를 특정해주고 나서야 유진산의 눈에도 어렴풋이 보였다. 부자연스럽게 일렁이는 검은 형체의 움직임이.

감쪽같은 은신술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지척에도 경계를 서는 표사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잘 찾았다. 저놈이 확실하구나.”

“나 잘했어?”

“그래, 아주 훌륭하다. 이제 가서 잡으면 되겠구나.”

창을 움켜쥔 유진산이 행동을 개시하려던 그때였다.

뒤이은 손녀의 중얼거림에 그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한 명이 아니네.”

“뭐라고? 또 어디?”

“저쪽 우물 뒤에 쪼그리고 있잖아.”

유설이 가리킨 곳에 짙은 음영이 일렁이고 있었다.

두 명의 살수가 한 조가 되어 움직이다니. 더군다나 반대 방향이었다.

만에 하나 한 명이 발각되더라도, 그가 시선을 끄는 사이 반대쪽의 살수가 임무를 완수할 속셈이리라.

“거참 무서운 놈들이로구나.”

“근데 나, 저 할머니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할머니라니? 여기서도 얼굴이 보인단 말이야?”

얼굴을 가리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의미이리라. 또는 정체가 드러나도 상관이 없다거나.

고개를 끄덕인 유설이 무엇인가를 기억해내고는 손뼉을 부딪쳤다.

“저번에 벽보에서 봤어. 쌍사신마!?”

쌍사신마(雙蛇神魔). 마공을 익힌 무시무시한 마두들로,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힌 특급 수배범이었다. 일각에선 두 마리의 사악한 뱀으로도 유명하다.

정파와 사파를 불문하고 그들의 손에 살해당한 무림인이 수백 명에 이른다.

행적이 신출귀몰하며, 살수의 무공까지 익혔기에 지금껏 누구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사파의 주역들을 암살하고 다닌다는 말인가.

‘창룡대의 소행이라 의심했건만…….’

창룡대원은 마공을 익히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아미산의 훈련장에서 알아차렸을 테니까.

지금 그들이 하는 행위는 정파의 칼잡이 노릇과 다름이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잡아서 족치다 보면 알게 될 터.

“너는 우측으로 돌아서 저 노파를 잡거라.”

“알았어. 그럼 할배는?”

“왼쪽 창고 위에 있는 놈을 상대하마. 할아버지가 먼저 시작할 때까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

쥐죽은 듯이 고요한 밤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소란스러움을 피할 수 없을 터.

한 명이 먼저 공격당하면, 다른 한 명이 놀라 돌발행동을 할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에 동시에 공격해야만 했다.

“괜찮겠어?”

“걱정 말거라. 살수 따위야 위치만 알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다치지 마, 할배.”

“오냐. 생포해오되, 말은 할 수 있게 입은 너무 많이 때리지 말거라.”

적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압도적인 무공의 차이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자신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유설의 상대라도 사로잡을 수밖에.

“응, 다녀올게.”

서로 눈빛을 교환한 조손은 각자의 방향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마침 유진산이 표적으로 삼은 목표물도 움직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바람과 함께 허공을 쭉쭉 가르는 은밀한 그림자.

놈이 향하는 곳은 분명했다.

장원에서 가장 안쪽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전각. 은화린이 머물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쌍사신마라. 명성만큼이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유진산은 그의 진로를 예측하며 매복할 수 있는 지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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