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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63화 (163/238)

163화 오늘따라 달빛이 아름답구나 (3)

유진산은 기둥 뒤에 몸을 엄폐한 채 마지막 숨을 들이켰다.

호흡까지 멈춘 그는 모든 움직임을 정지했다.

‘이십 장.’

다가오는 살수와의 대략적인 거리였다.

용살창을 움켜쥔 그의 손아귀가 긴장감에 축축해졌다.

아직 싸워보기 전이었지만,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래전 자신이 활동했던 시대부터 강호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던 악명 높은 인물이었으니까.

당시였다면 맞상대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십 장.’

유진산은 자세를 낮추며 위쪽을 응시했다.

손녀가 얘기해준 정보로 유추해보면, 쌍사신마 중에서도 흑사(黑蛇) 마광윤이리라.

불사흑기공(不死黑氣功)이라는 마공을 익혀 어지간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고 강호에 정평이 자자했다.

유진산 또한 소림의 상승절학인 금강불괴신공을 팔 성(八成)까지 익혔기에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극마의 경지에 도달한 절대고수가 아니라면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였다.

‘오 장!’

새의 날갯짓 정도에 불과한 작은 소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진산은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용수철이 힘을 모으듯 그의 무릎이 굽혀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시선이 드디어 상대의 모습을 처음으로 포착했다.

맞은편의 지붕 위에서부터였다.

백발을 휘날리는 짙은 흑의의 노인이 다른 전각을 향해 도약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유진산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고 튕겨 올랐다.

타앗-!!

힘껏 도약한 그는 상대의 측면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그 모습이 흡사 까마귀의 옆구리를 뚫기 위해 다가가는 화살촉 같았다.

마광윤은 난데없는 기습에 화들짝 놀랐다.

“헉!?”

허공에서 피할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다급히 움켜쥐고 있던 태도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이번 일격은 유진산의 내공이 가득 담긴 무거운 강공이었다.

하늘에서 두 가지 성질의 강기가 부딪치며 요란스러운 굉음을 토해냈다.

쩌엉-!!!

자세를 잃은 마광윤은 바람에 휘날리는 연처럼 튕겨 날아갔다.

마광윤의 등짝이 맞은편의 전각 벽면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신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야 상대를 제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단창을 꼬나쥔 채 무섭게 날아드는 꼬마의 모습을.

기분 나쁘게도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유진산은 회심의 표정으로 용살창을 내질렀다.

유가살풍창 칠 초식 일광극섬(一光極閃).

한줄기 붉은 빛살이 상대의 왼쪽 가슴을 향해 벼락처럼 다가갔다.

어지간히 경험 많은 자가 아니라면 막아낼 수가 없는 초식이었다.

일격에 끝장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마광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를 악다문 그는 사력을 다해 태도를 치켜들었다.

카앙-!

불안정한 자세에서의 방어가 완벽할 수는 없는 법.

마광윤이 움켜쥐고 있던 태도가 튕겨 날아갔다. 묵직한 격돌의 여파로 무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승기를 잡은 유진산은 다시 한번 공세를 이어나갔다.

‘오냐. 어디 이것도 막아 보거라!’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창끝이 상대의 어깨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기를 놓친 그에게 방어할 수단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유진산은 승리를 확신했다.

상대의 양손이 묵빛의 기류에 휩싸이는 것을 보기 전까진.

‘불사흑기공(不死黑炎功)?’

소문으로만 들어봤던 무시무시한 마공이었다.

직접 마주하게 된 그 위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자신의 창을 맨손으로 잡으려 할 정도로.

우려는 곧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강기를 머금은 창을 맨손으로 잡아내다니. 현철로 만들어진 손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찌르기와 같은 날카로운 초식으로 마무리할 것을.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공의 힘으로 누르면 되었으니까.

창을 움켜쥐든 말든 그대로 어깨를 찍을 생각이었다.

마광윤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튀어나왔다. 죽기 살기로 버티는 것이리라.

그 순간 둘의 발이 동시에 지면에 닿았다. 허공에서 격돌을 마치고 내려선 것이다.

체구에 의한 불리함 때문에 유진산은 어정쩡한 자세가 되고야 말았다.

“어서 놓아라, 이놈아!”

서로가 창을 빼앗기 위해 계속 안간힘을 썼다.

마광윤 또한 반백 년 이상을 강호에서 활동한 내가고수였다.

이대로는 쉽게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을 달리할 수밖에.

유진산이 먼저 창 자루를 놓으며, 상대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기습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불끈 움켜쥔 주먹이 상대의 복부를 향해 섬전처럼 틀어박혔다.

손녀에 의해서 파괴력이 한층 개량된 백보신권이었다.

원래는 멀리서 권풍으로 타격을 주는 기술이지만, 근접공격에 사용할 경우 위력은 배가 된다.

분명히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지만, 무엇인가 이상했다.

주먹으로 느껴지는 감촉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제대로 충격을 주지 못한 것이다.

불사흑기공. 이름 그대로 어떤 공격에도 죽지 않는다는 마공이였다.

유진산이 그 위력에 잠시 당황할 찰나. 처음으로 마광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검은 기류에 휩싸인 일장이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쩌어엉-!!

찰나의 순간, 타격을 받은 부위에 황금빛 기공이 발현되어 공격을 받아냈다.

유진산이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자, 마광윤도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상대가 금강불괴신공을 수련한 줄 어찌 알았겠는가.

둘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양괴……. 네가 왜 이곳에 있지?”

마광윤 또한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섬서에서 하남에 이르기까지 가는 곳마다 풍파를 몰고 다닌 음양쌍괴였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네놈 잡으러 왔지, 심심해서 마실이라도 나왔겠느냐.”

“이곳에 함정을 판 것이 네 계략이었군. 역시나 소문대로 간사한 놈이로구나.”

유진산은 기분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내 살다 살다 마두한테 간사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예전 같았으면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래도 관계가 없었다. 더는 입으로만 협을 외치는 정파인이 아니었으니까.

한편 마광윤은 은밀히 좌우로 눈알을 굴려대고 있었다. 눈빛에는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었다.

주변에서 달려오는 표사들 때문이 아니었다.

양괴가 이곳에 있다면, 당연히 음괴도 함께 왔을 터.

쌍사신마 중 또 한 명의 마두인 적사(赤蛇)의 안위가 걱정될 수밖에.

음괴의 무시무시한 명성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게 두리번거릴 것 없다. 너와 함께 온 할망구는 지금쯤 죽었을 테니까.”

마광윤의 두 눈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평생을 함께한 짝이 죽었다는데, 어찌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네 이놈!”

그의 모습은 이미 살기를 포기한 듯했다.

도주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사방에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십 명의 표사들. 그들 중에선 사도련의 절정고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눈치 빠른 마광윤도 이미 그것을 눈치챈 상황이었다.

게다가 어딘가에 있을 공포의 음괴까지.

이미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도 나서지 마시오.”

유진산의 한마디에, 접근하던 무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포위망을 구축했다.

마광윤과 제대로 한번 붙어볼 생각이었다. 내심 불사흑기공과 금강불괴신공을 겨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광윤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양괴 이놈……. 나 혼자 가진 않을 것이다.”

유진산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상대에게 도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랑 동귀어진이라도 하려고? 어림도 없다 이놈아.”

그 순간 마광윤의 공격이 먼저 시작되었다.

방어를 도외시한 기습적인 공격이라니. 성급하게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음괴가 나타나기 전에 승부를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유진산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또한 방어를 포기한 채 상대의 복부에 일장을 내질렀다.

쩌억-! 콰앙-!!

“으윽!”

약간의 신음이 전부였을 뿐, 둘 다 크게 타격은 입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드디어 난타전이 이어졌다.

묵빛에 휩싸인 양손이 유진산의 얼굴과 상체를 집중적으로 타격했다.

유진산 또한 악착같이 붙어서 그의 복부에 유가건곤장과 백보신권을 쏟아부었다.

콰앙-! 쩌억-! 콰콰쾅-!!

서로가 근접하여 주먹과 장법을 정신없이 내질렀다. 양쪽 모두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천근추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들은 처절한 장면에 넋을 놓았다.

팔성(八成) 화후의 금강불괴신공과 극성(極成)에 도달한 불사흑기공의 싸움이었다.

승부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치의 밀림도 없이 계속되는 난타전.

서로가 수십 번의 공격을 허용했을 때쯤이었다.

거센 굉음과 함께 서로가 두 발자국씩 물러섰다.

호흡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춘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질 줄 알았던 격돌은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는 아무리 싸워도 끝이 안 난다는 것을 본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때였다. 돌연 둘의 고개가 동시에 옆으로 돌아갔다.

“안 도와줘도 돼?”

자신들의 사이에서 유설이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소리 소문도 없이 언제 접근해 왔단 말인가?

손녀가 이곳에 왔다는 의미는 이미 적사를 제압했다는 뜻이리라. 역시나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유진산은 잠시 고민했다.

계속해서 오기를 부릴 것인가. 아니면 쉬운 길을 선택할 것인가.

현재까지는 둘 중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끝까지 간다면 한 명이 먼저 탈진해야 끝이 날 터.

‘더는 무의미하겠지.’

이대로는 답이 없었다. 무기를 들고 강기로 싸운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이미 의도했던 목적은 달성했으며,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고작 팔 성의 화후로 극성에 이른 불사흑기공과 맞수를 이루지 않았는가.

파계승에게 전수받은 소림의 상승절학은 확실히 대단했다.

“그만하지.”

유진산은 더는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왼손을 올려 보였다.

오기를 꺾은 이유는 손녀가 보는 앞에서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물러서려 하자 마광윤이 다급히 물었다.

“싸우다 말고 어딜 가느냐! 나와 일대일로 승부를 본다고 하지 않았더냐!?”

“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말이야.”

“……무슨 의미지?”

유진산은 뒷짐을 지고는 유설의 옆으로 슬쩍 이동하며 중얼거렸다.

“선수교체(選手交替).”

마광윤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뭐, 뭐라고!?”

그는 자신이 음괴와 싸워서는 조금의 희망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부터 싸움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상대였다.

그러나 마광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미 멀찍이 물러난 유진산은 등을 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음. 오늘따라 달빛이 참 아름답구나.”

굳이 결과는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관심을 거둔 유진산은 때마침 달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별똥별을 구경했다.

이어지는 마광윤의 절규를 귓가로 음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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