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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66화 (166/238)

166화 사육의 달인들 (1)

백사문을 떠난 조손은 오솔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유진산은 뒷짐을 지고 있었고, 유설은 두 자루의 단창이 매달린 봇짐을 짊어진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우울해 있어?”

손녀의 얼굴에는 심술이 가득했다.

유진산도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은근슬쩍 물어본 것이다.

“아저씨들한테 맛있는 거 많이 해준다고 약속했단 말이야. 아직 못 해준 것도 많은데.”

얼굴이 홀쭉해진 그들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요리가 그렇게도 재미있느냐.”

“응. 맛있게 먹으니까.”

사파의 지존이 손수 준비한 음식이었다. 맛있게 먹어야 할 수밖에.

무엇을 만들어오든 백사문의 문도들은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터였다.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 아쉬워할 것 없다.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자꾸나.”

할아버지의 위로에 유설의 마음도 금세 누그러졌다.

“……알았어.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흑야방에서 받은 정보를 굳이 손녀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다.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경험이 필요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앞으로도 많은 내용을 공유할 생각이었다.

“음. 지난번 창술대회에서 할애비를 죽이려 했던 녀석 기억나느냐.”

“삼십육번?”

“그래, 맞다. 그놈이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는구나.”

유설의 기억 속에 안 좋은 인상으로 각인된 인물이었다.

동구 아저씨에게 망신을 준 것도 모자라 우정 팔찌까지 망가트렸으니. 게다가 연신 기분 나쁜 웃음을 짓던 그의 얼굴은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그래서 우리가 잡으러 가는 거야?”

“단전이 전폐된 폐인을 잡아서 뭣하겠느냐. 죄를 지은 놈이 그냥 풀려났다면, 권력의 힘이 작용했다는 얘기지.”

“그럼 간수를 잡아야겠네.”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런 조무래기라면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었겠지. 간수보다 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 고위급 관료가 개입했다더구나.”

“어떻게? 풀어주라고 했대?”

“맞다, 아가. 나랏일을 해야 할 놈이 이렇게 사사로이 권력을 남용하면, 그 피해는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게지.”

“그럼 좀 혼나야겠네.”

개봉부윤(开封府尹) 왕사평.

종2품의 문관으로 개봉의 행정에 관여하며, 큰 사건의 재판까지 지휘하는 거물이었다.

흑야방에서 받은 정보는 이번 일에 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뿐이었다.

짐작대로라면 어떤 식으로든 창룡대와 연결고리가 있을 터.

재수만 좋다면 그들의 윗선을 알아낼 수도 있을 듯했다.

자세한 것은 지금부터 알아봐야 했다.

“그래. 갈 길이 머니, 지금부터는 속도를 좀 내보자꾸나.”

개봉부(開封府).

이곳은 개봉성의 중심부에 자리한 관청으로 여러 행정기관이 있다.

목표는 왕사평이 집무를 보는 정청(正廳)으로 법을 집행하는 곳이었다.

한 꼬마가 홀로 정청의 높은 외벽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정찰하기 위해 먼저 들어간 손녀를 기다리는 유진산이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어떻게 됐어?”

어느새 다가온 유설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봇짐은 성밖에 숨겨 놓았기에 간편한 복장이었다.

“무공을 익힌 아저씨들이 많아. 한 삼십 명 정도 있었어.”

이 정도는 당연히 짐작했던 부분이었다. 죄인들을 체포하는 포쾌(捕快)들이 대기하는 곳이었으니까.

“고수는?”

“전부 할배보다는 약해 보였어. 한 명 빼고는.”

“그래, 위험한 놈이 한 명쯤은 있을 줄 알았다. 아마도 그놈의 호위겠지.”

“걱정하지 마. 내가 더 세니깐.”

걱정은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무림맹의 고수들도 벌벌 떠는 음괴가 관원 따위에 밀릴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정찰은 단지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할애비가 찾아보라 했던 놈은 안에 있었어?”

“응 있어. 뚱땡이 아저씨.”

그렇다면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방법에 대한 선택뿐.

밤까지 기다렸다가 잠입할 것인가. 아니면 정면돌파를 감행할 것인가. 또는 기회를 기다리며 납치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너무나도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림맹의 원한까지 산 마당에 무서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자꾸나.”

“지금? 낮인데 그냥 들어간다구?”

“밤이 되면 출타 나갔던 포쾌들이 복귀할 테니, 더 시끄러울 수도 있어. 별반 차이 없을 게다.”

유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들어가서 다 때려 눕혀?”

“굳이 죄 없는 부하들까지 족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할애비한테 생각이 있어.”

유진산은 손녀에게 짤막하게 작전을 설명해 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시행뿐. 조손은 목표지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담벼락 사이의 대문을 지키는 관원은 두 명.

그들은 다가오는 음양쌍괴를 보며 아무런 경계심도 가지지 않았다.

“꼬마들이 여긴 뭐하러 왔어? 다른 데 가서 놀거라.”

유설이 그들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미안해요, 아저씨들.”

조손은 대답 대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동시에 관원들을 어깨로 밀치고 들어갔다.

작은 꼬마들이 슬쩍 부딪친 것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넘어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이미 조손은 장원의 내측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다.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포쾌들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몰려들었다.

이따금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정청으로 난입하려는 자들이 있다.

보통은 혼쭐을 내어 쫓아내지만, 그 대상이 꼬마들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너희들 뭐야!?”

“그쪽으로는 가면 안 돼!”

포쾌는 죄인들을 체포하는 무관으로 무공 수준이 상당한 편이다.

그런 그들이 지금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꼬마들을 낚아채려 했지만 계속 헛손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휙-! 휘익-!

급기야 영문도 모른 채 넘어지는 자들까지 속출했다.

“저, 저 애새끼들 잡아!”

“거기 서!!”

유진산과 유설은 최대한 무공을 숨긴 채 적당한 속도로 달렸다.

다가오는 포쾌들을 농락하면서.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가로막는 자들을 손쉽게 따돌리는 한편, 손을 내뻗는 자들은 슬쩍 잡아서 넘어트렸다.

눈 깜짝할 사이 조손은 이단 지붕으로 건축된 웅장한 전각 앞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벌컥-!

안으로 사라진 아이들이 문을 ‘쾅’ 닫아버렸다.

가장 앞에서 뒤쫓던 포쾌가 다급히 문틀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잘 움직이던 문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그의 동료가 뒤쪽에서 답답하다는 듯 고함을 쳤다.

“빨리 열지 않고 뭐해!?”

“문, 문이 안 열려!”

여러 명이 달라붙어 힘을 써 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반대편에서 유설이 붙잡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부술까!?”

“그냥 놔둬. 그랬다간 목이 날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

포쾌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 참,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일단 기다려 보자고. 개봉부의 제일 고수가 안에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정청의 내부로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유설이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사이, 유진산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한쪽에는 세 개의 작두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자리한 높은 단상의 의자.

그곳에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 한 마리가 눈알을 굴리며 앉아 있었다. 볼록 튀어나온 배 위로 주전부리가 담긴 접시를 움켜쥔 모습이었다. 부윤 왕사평이리라.

그리고 그의 옆엔 검집을 움켜쥔 붉은 관복의 관원 한 명이 지키고 있었다.

“무공을 익힌 무림세가의 아이들이로구나. 내 짐작이 맞느냐.”

왕사평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맞습니다.”

“어린 녀석이 눈빛이 제법이군. 여긴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가문의 일가족이 억울하게 몰살을 당했습니다.”

“무림과 관은 서로의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 도움을 줄 수가 없을 것 같구나.”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유진산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나직이 답했다.

“원수들에게 동조한 자가 이곳에 있는데도 말입니까?”

왕사평은 접시에 담긴 주전부리를 입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음. 그러니까 네 말은 개봉부의 관원이 무림사의 일에 개입했다는 말이더냐.”

“맞습니다. 그가 권력을 이용해 감옥에 갇힌 원수 중 한 명을 풀어주었습니다. 한패임이 분명합니다.”

“개봉부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네 말에 책임질 수가 있겠느냐?”

“제 말이 거짓이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왕사평은 뭐가 웃긴지 폭소를 터트렸다.

어찌나 정신없이 웃는지, 삼키지 못한 음식의 잔해가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였다.

“하하! 내 평생 꼬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구나. 그럼 어디 말해 보거라. 네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유진산은 오른팔을 천천히 들어 그를 검지로 가리켰다.

이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투로 나직이 말했다.

“개봉부윤 왕사평. 창룡대와 무슨 관계인지 전부 실토하거라.”

그 순간 웃고 있던 왕사평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야 정체를 숨긴 꼬마들이 자신을 노리고 온 것임을 알아챈 것이다.

장내에 서릿발처럼 강한 한기가 휘몰아쳤다.

“전충!”

그의 부름에 기립해 있던 호위 관원이 고개를 숙였다.

“예, 대인.”

“정청에 함부로 난입한 죄는 아이라 해도 용서할 수는 없는 법이지.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겐가.”

개봉부의 제일 고수 전충.

그는 왕사평의 호위와 함께 특수한 범죄의 사건을 수사하는 총책임자였다.

그렇기에 그의 눈썰미는 남다른 부분이 있었다.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 그가 검을 뽑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최후의 순간에나 어울릴 법한 중얼거림이었다.

이제야 왕사평도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유진산이 뒤를 향해 손짓을 보내며 중얼거렸다.

문을 틀어쥐고 있던 유설이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응, 왜.”

“돼지는 내가 맡을 테니, 너는 당장 저 녀석을 제압하거라.”

문고리를 놓은 유설이 전충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검을 움켜쥔 그는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맨손의 꼬마였음에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을 눈치챈 것이다.

무슨 대화가 더 필요할까.

서로를 노려보던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쏘아져 나갔다.

양쪽에서 좁혀지는 두 줄기 빛살이 거센 충돌을 일으켰다.

어찌나 빠른지 유진산조차 제대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콰앙-!!!

둔탁한 폭음과 함께 전충의 신형이 후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돌진해올 때보다 더욱 빠른 속도였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둘의 무공 수준은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손녀가 그를 몰아붙이는 사이. 유진산은 천천히 왕사평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문관이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왕사평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이,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행패를 부리느냐.”

유진산은 그의 머리채를 확 움켜쥐었다.

“어디긴 어디야. 도축장이지.”

머리채를 붙잡힌 왕사평은 엉거주춤하며 작두를 향해 속절없이 끌려갔다.

“내,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어?”

둔황의 병사들이 집결한 도호부에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었다.

무서울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유진산은 각기 다른 모양을 지닌 세 개의 작두를 쓱 훑어보았다.

황족과 귀족을 심판하는 용작두, 일반 관리를 벌하는 호작두, 그리고 평민 이하의 신분에게 사용되는 개작두였다.

그중에서 개작두의 날 아래로 왕사평의 목을 밀어 넣었다.

그 시점에서 손녀와 싸우던 전충은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끝났으면, 어서 와서 이놈 좀 잡고 있거라.”

할아버지의 부름에 유설이 냉큼 달려와 왕사평의 몸을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일평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공포에 왕사평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개봉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하던 자신이 개작두에 끼이다니. 이보다 더한 불명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의 태도는 어느새 백팔십도 변해 있었다.

“도,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냐!?”

유진산이 개작두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네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게다. 숨을 계속 쉬고 싶다면 말이지.”

그때 문밖에서 포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괜찮으십니까?”

“저희가 들어가겠습니다!”

부하에게 이런 처참한 모습을 어찌 보인단 말인가. 게다가 포쾌들로는 어찌할 수 있는 상대들도 아니었다.

작두 밖으로 빠져나온 왕사평의 입이 다급히 움직였다.

“들, 들어오지 말고 대기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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