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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67화 (167/238)

167화 사육의 달인들 (2)

“어서 실토하지 못할까!”

유진산이 개작두의 손잡이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목으로 전해지는 작두날의 감촉에 왕사평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난, 난 창룡대가 뭔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럼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창룡대원을 풀어주라 했느냐?”

“그, 그건…….”

왕사평은 쉽게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설마 시간이라도 끌려는 수작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산의 마음도 점차 답답해졌다. 문 앞으로 모여드는 관원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그때 아래에서 등을 누르던 유설이 그의 귀때기를 비틀어 잡아당겼다.

“누가 시켰는지 빨리 말해! 어서!”

“끄아아악!!”

고위급 관료인 그에겐 처음으로 느껴보는 무지막지한 아픔이었으리라.

고통을 가하고 나서야 왕사평이 다급히 한 손을 올려 보였다.

이제야 말할 마음이 생긴 것일까? 고위관료라는 놈이 엄살은 천하제일이었다.

귀를 놓아주자 그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물었다.

“사, 사실대로 말한다면 날 살려줄 수 있느냐.”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유진산이 즉각 답했다.

“약속하겠다.”

“그걸 어찌 믿지?”

유설이 다시 한번 그의 귀때기를 붙잡았다.

“우리 할배는 거짓말 안 해!”

“끄윽! 말, 말하마! 어서 이거 놓거라!”

그가 두 손을 들자 유진산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했다. 만약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그 즉시 개작두의 맛을 보게 될 게다.”

잠시 뜸을 들이던 왕사평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내 셋째 사위가 부탁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는 신빙성이 있는 말이었다.

사위까지 팔아먹으면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변뿐.

“뭐 하는 녀석이지?”

“정창원(情廠院)에서 대원들을 이끌고 있다.”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경험이 많은 그조차 처음으로 들어본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나라에 그런 조직이 있다고?”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냐. 국외에서 수집된 첩보 내용을 분석하는 비밀조직이다.”

어느 정도는 조각이 맞춰진 듯했다.

그동안의 조사로 보면 창룡대의 목적은 천축의 침공에 대비하는 것이다.

둔황에서 서역을 감시하던 도호부의 수장 또한 창룡대원이 아니었던가.

나라의 첩보기관을 창룡대가 장악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정창원에 심어진 놈들이 한 명이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정창원의 위치는?”

“나도 모른다. 그들의 활동은 모든 것이 비밀이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군. 개봉부의 부윤이 그걸 모른다고?”

“정, 정말이다. 난 아무것도 몰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있는 고위관료였다.

아무리 첩보기관이라 할지라도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어딜 가야 네 사위를 만날 수 있는지 말하거라!”

순순히 대답할 것 같았던 왕사평이 다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와 가족을 지키겠다? 이 미련한 놈아, 너는 지금까지 그놈에게 이용당한 게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창룡대원이 순수한 의도로 왕사평의 딸에게 접근했을 리가 만무했다.

사위가 되어 그의 권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유설이 할아버지를 재촉했다.

“할배, 우리 곧 나가야 해.”

유진산은 심문하다 말고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닫혀 있는 문의 건너편으로 바글바글한 기(氣)의 흐름이 느껴졌다.

“많이도 몰려왔군.”

그의 한마디에 왕사평도 지원군이 당도한 것을 눈치챘다.

돌연 겁에 질려있던 그의 얼굴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 천하의 패륜아 놈들! 군부의 병력이 당도했으니, 너희들은 이제 끝장이다!”

유진산은 그를 무시한 채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전각의 지붕 위에서도 수많은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정말 큰일 난 것 같구나.”

한층 수그러진 유진산의 말에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왕사평이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한다면 내 선처를 해줄지…….”

그는 말을 끝마칠 수가 없었다. 유진산의 오른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그의 따귀를 날렸기 때문이다.

철썩-!

“보자 보자 하니까, 돼지가 어디서 감히 사람한테 대드는 게냐.”

이제야 왕사평이 터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가 조용해짐과 동시에 유설이 물어왔다.

“할배, 이제 어떻게 해?”

원하는 바를 다 들으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터.

손녀라면 백만대군에 포위되어도 홀로 탈출할 수 있겠지만, 자신은 얘기가 달랐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고민 끝에 유진산이 왕사평의 뒷다리를 움켜쥐며 말했다.

“이렇게까진 안 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겠구나. 앞장서거라.”

유설이 앞에서 두 손으로 왕사평의 앞가슴을 번쩍 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두 명의 꼬마가 돼지 한 마리를 들쳐 올린 듯했다.

허공에 매달린 왕사평이 발악을 했다.

“이, 이놈들! 날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시끄러우니 좀 조용히 시키거라.”

그 순간 유설의 오른발이 머리 위로 솟구쳐 올랐다.

수직으로 세워진 발끝이 정확히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조손은 기절한 왕사평을 치켜든 채 밖을 향해 뛰었다.

동시에 유설의 앞발이 닫혀 있던 전각의 문을 강타했다.

문앞에 있던 여섯 명의 관원이 문짝과 함께 튕겨 나갔다.

“으헉!”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도호부의 관원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족히 수백여 명에 이르는 무장한 병사들.

그들의 숫자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중심부에서 지휘관이 검을 내뻗으며 소리쳤다.

“이놈들, 어서 대인을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그 순간 유설의 눈앞으로 문짝의 잔해 하나가 붕 떠올랐다.

작은 나뭇조각이었지만, 찬란한 광채를 머금고 있었다.

현경의 기(氣)가 서린 것이다.

곧이어 그것은 허공을 부유하며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생명이 깃든 듯한 움직임.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선회하는 나뭇조각은 흡사 도깨비불 같았다.

병사들이 놀라기도 전에 한줄기 빛살이 그들의 사이를 후비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빠름은 눈으로조차 쫓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물에 기(氣)를 실어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은 무공이 극한에 이른 지존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대상이 검이라면 어검술(馭劍術)이 되며, 창을 이용하면 어창술(馭槍術)이 된다.

무기를 사용한다면 극강의 살상력을 뿜어낼 테지만, 아직 유설은 가벼운 물체만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가공스러운 무력을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나뭇조각이 힘을 잃고 떨어지는 그때였다.

쩌저적-! 쩌저저적-!!

병사들이 놀란 눈을 부릅떴다. 자신들의 손에 쥐여 있던 검이 균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곧이어 수십여 자루의 검날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정청의 앞마당이 공포에 휩싸였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병사들은 몸이 얼어붙었다.

그 순간 유진산이 손녀의 뒤에서 고함을 질렀다.

“지금부터 다가오는 놈들은 검날이 아니라 머리가 뚫릴 것이다!”

무공이 뛰어난 군부의 장교들조차 안색이 창백히 질려있었다.

“가자, 할배!”

그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조손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둘은 당황하는 병사들의 어깨를 짓밟고 도약했다.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 정청의 대문을 통과하는 음양쌍괴.

그리고 그들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는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군부의 지휘관이 소리쳤다.

“저, 저 무림의 마두들이 대인을 납치했다! 어서 쫓아!”

아무리 무서운 상대라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병사들이 장교들의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거기 서!”

그러나 그 시점에서 음양쌍괴는 이미 개봉부의 외문을 돌파하고 있었다.

훌쩍 멀어진 그들을 뒤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각도 지나지 않아 둘은 이미 개봉성의 성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입구를 지키는 수문병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멈추어라!”

수문병들 따위야 안중에도 없었다.

조손의 발이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붕 떠올랐다.

그들의 머리 위를 가볍게 통과한 둘은 어딘가를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인적이 드문 강기슭.

해가 저물며 노을이 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모닥불 앞에 마주 앉은 조손은 노릇하게 익은 물고기를 뜯고 있었다.

“히히. 꼬소하니 너무 맛있다. 그치?”

“응. 살이 토실토실해서 기가 막히는구나.”

유진산이 손등으로 손녀의 얼굴에 묻은 기름을 닦아주고 있을 때였다.

“너희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나를 납치했으니, 수배령이 내려질 것이다!”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기절했던 왕사평이 이제야 깨어난 것이리라.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무려 종2품의 부윤을 납치했으니, 지금쯤이면 개봉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것이리라.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음양쌍괴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유설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할배, 우리 이제 큰일 났대.”

“그러게 말이다. 여기서 쫓겨나면 서역으로 가서 살까?”

“음. 거기엔 뭐가 있어?”

유진산도 중원을 벗어나 본 적이 없기에 알지 못했다. 그가 가장 멀리 가 본 곳이 둔황이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떠오르는 대로 대충 지어냈다.

“여기선 맛보지 못하는 진귀한 음식들이 가득하단다. 거리에는 음악이 가득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건축물은 눈을 즐겁게 하지.”

“와아. 꼭 가보고 싶어!”

왕사평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둘을 응시했다.

“……이 황당무계하고 잔악한 놈들아.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유진산이 한쪽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그놈 참 말 많네. 다 먹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거라. 다시 기절시키기 전에.”

그때 불룩 튀어나온 왕사평의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족히 삼백 근은 되어 보이는 거구였다.

비대한 체중에 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선 꾸준히 먹어 줘야 할 터.

잠시 고민하던 그가 배를 움켜쥐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나도 한 마리만 줘 보거라.”

이제 남은 물고기는 단 한 마리뿐.

유설이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냉큼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어서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자 왕사평이 성을 냈다.

“이놈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그러든 말든 유설은 노릇하게 익은 생선구이를 맛있게 뜯었다.

그러더니 반쯤 남은 물고기를 그에게 보여주며 놀려댔다.

“얌~ 마이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왕사평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소갈병(消渴病)을 앓고 있어서 음식을 제때 섭취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보다 못한 유설이 먹다 남은 생선구이를 내밀었다.

“그럼 한 입만 줄게요.”

“내 명색이 개봉의 부윤이다! 천한 것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을 줄 아느냐!?”

유설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삐졌나 봐. 죽는다는데, 어떡해? 한 마리 잡아 올까?”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이 고개를 내저었다.

“높으신 나리께 우리가 먹는 천한 음식을 먹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럼?”

“음. 이번 기회에 우리 설이가 실력을 한번 발휘해 보는 게 좋겠구나.”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왕사평은 구석에 내려진 봇짐을 바라보았다.

풀어진 봇짐의 입구로 작은 노구솥과 간단한 취사도구들이 보였다.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래, 내 너희들에게도 그 정도의 양심은 있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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