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잡았다 요놈 (1)
조손은 마주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두 개의 대나무를 가지런히 놓고 그사이를 줄기로 엮어냈다.
그러자 냇가에서 낚시할 때 사용하는 족대와 비슷한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할배, 우리 지금 뭐 만드는 거야?”
“들것을 만드는 게다.”
“으응? 뭐를 들어?”
유진산이 턱으로 옆을 슬쩍 가리켰다.
“저기 낮잠 자는 저팔계 말이다. 올 때는 급하게 업고 오느라 힘들었잖아.”
비록 왕사평이 거구이긴 하지만, 무림고수들이 부담을 느낄 정도의 무게는 아니다.
하지만 먼 거리를 업고 뛰는 것이 여간 성가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어정쩡한 자세로 말이다.
체구가 작은 둘이 그를 옮기기 위해선 머리 위로 받쳐야 했으니.
“우리랑 같이 뛰면 되지. 살 좀 더 빼야 한다며.”
“음. 그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눈을 감고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왕사평이 벌떡 일어섰다.
“이놈들이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게야? 이 홀쭉해진 몸이 안 보여!?”
왕사평이 기겁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곳에서부터 목적지까지는 약 삼백 리.
조손이 경공을 펼치면 한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으나, 왕사평의 기준에서는 나흘은 걸릴 터였다.
운동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에게 나흘을 뛰라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유설이 줄기의 매듭을 묶으며 은근슬쩍 물었다.
“배고파서 그래요? 특식 만들어 줄까요?”
특식이라는 말에 성을 내던 왕사평의 표정이 백팔십도 변했다.
“……꼭,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 도착하면 관원들이 나를 못 알아볼까 봐 걱정돼서 그래.”.
처음 왕사평을 보았을 때만 해도 삼백 근이 넘는 거구였다.
지금 그는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상태였다.
짧은 기간 이렇게나 체중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더 이상 소갈병으로 고통받지 않았다. 목숨을 위협하던 지병이 사라진 것이다.
과민한 그의 반응에 유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히히히. 농담이에요. 이미 다 만들었으니까, 어서 여기 타 봐요.”
왕사평은 헛기침을 하며 임시로 만든 가마에 앉아보았다.
“흠흠! 너희들에게도 사람다운 면이 있었구나. 인정머리 없는 야차들인 줄 알았더니.”
“어때요?”
“좀 작긴 하지만 그런대로 앉을 만해.”
조손은 양쪽에서 대나무를 잡고 한 번 들어 올려 보았다.
급조해서 만든 것 치고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지지대로 쓴 대나무가 무게를 계속 버텨 줄지는 의문이었지만, 기(氣)를 사용해 강도를 높인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유진산의 얼굴에도 흡족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군. 슬슬 출발해 볼까?”
개봉성으로부터 남쪽으로 오십여 리가 떨어진 길목.
이곳에도 어김없이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목책(木柵)으로 길을 막은 병사들이 오가는 사람들을 조사했다.
이곳의 책임자는 절제도위(節制都尉) 방휼이었다.
“전부 통과!”
방휼이 손짓을 보내자,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길목을 통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급장교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와 말했다.
“도위님, 저들은 아직 확인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어지간하면 대충 시늉만 하고 통과시켜 줘. 의미 없는 짓이니까.”
“……그러다가 대인을 납치한 놈들이 빠져나가면 어떡합니까?”
방휼의 이마가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설명해 주었음에도 거듭되는 말대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리라.
이윽고 참지 못한 그가 부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정신 안 차릴래? 어른들은 조사할 필요 없으니, 그냥 보내.”
이미 음양쌍괴의 인상착의가 검문소마다 배포된 상황이었다.
한 쌍의 꼬마들이었기에 어른들은 조사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이다. 만에 하나 그 미친 마두들을 우리가 걸러낸다고 한들, 감당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방휼이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인이 납치되던 날에 나도 개봉부에 함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잘 알아.”
“그럼…… 그 소문도 사실이었습니까? 둘 중 한 놈이 어검술 비슷한 것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당시엔 공포 그 자체였지. 다들 몸이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하급장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대인 곁에는 개봉부의 제일 고수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 있었지. 교위 전충.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개떡이 되어 실신해 있더구나.”
“그토록 강한 분이 어쩌다가…….”
왕사평의 호위인 전충은 무척 유명한 인물이었다. 개봉제일검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녔으며, 하급 무관들은 그를 우상으로 삼는다.
한가락씩 하는 무림고수들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였으나, 문제는 상대가 음괴였다는 것에 있었다.
“나도 그자가 그렇게 꼴사납게 쓰러져 있을 줄은 몰랐다. 어쨌거나 쉬엄쉬엄해도 돼.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말을 마친 방휼이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돌연 그의 부하가 뒤에서 다급히 물어왔다.
“도, 도위님! 만약 저희가 대인을 찾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서라.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말씀해주십시오!”
방휼이 짜증 서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귀찮게 왜 자꾸 물어봐?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니까!?”
“찾, 찾은 것 같거든요.”
“……누굴?”
방휼은 무심코 부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야산이 있는 방향에서 누군가가 논밭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리가 멀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두 마리의 주작이 새겨진 검은 관복이었다.
“개봉부의 관복이 맞죠?”
산삼을 무더기로 발견한 심마니의 표정이 이러할까? 어느새 방휼의 얼굴은 환희에 휩싸였다.
“……확, 확실한 것 같구나. 나는 네가 해낼 줄 알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왕사평의 모습이 확실했다. 비대했던 살집이 놀라울 정도로 빠진 것만 제외한다면.
“어서 빨리 모시러 가시죠.”
“잠시 기다려 봐. 부윤 나리가 제 발로 검문소에 찾아온 것이라면, 우린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해.”
“그, 그럼 어떡해요?”
군부의 하급관원들이 왕사평 같은 고위관료를 대면할 일은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터. 방휼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수색하다 찾은 것으로 하자고. 내가 먼저 저 풀숲으로 우회해서 나타날 테니, 너는 얘들 몇 명 데리고 산개해서 따라와.”
“알겠습니다.”
논밭을 헤치며 다가오던 왕사평이 걸음을 멈추고 숨을 헐떡였다.
관절이 뻐근한지 양손으로는 무릎을 주물러 댔다.
“어후, 힘들다. 쳐 쥑일 녀석들, 감히 나를 이렇게나 부려먹다니. ”
거췬 숨을 몰아쉬던 그가 뒤를 한 번 힐끔 바라보았다.
논밭의 뒤로 우뚝 솟은 야산의 중턱 부근이었다.
자신을 보낸 두 명의 마두가 그곳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터.
‘무림에선 음양쌍괴라 불린다고 했나? 빌어먹을 노괴들, 전생에 나랑 악연이었던 게 분명해!’
한숨을 내쉬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누군가가 풀숲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며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 대인!!”
분명히 왕사평의 기억에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자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 어찌 된 일이십니까? 대인을 찾기 위해 밤낮으로 수색하고 다녔는데, 드디어…….”
“사정이 좀 있었네.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절제도위 방휼입니다. 저와 제 부하들 모두 오매불망 대인 걱정뿐이었습니다. 끄흑!”
눈물을 글썽거리던 방휼이 기어코 오열했다.
왕사평은 눈물을 닦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허허. 그래도 내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구만.”
“대인께서는 개봉의 빛이며, 기둥이십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 그래. 내 자네들의 마음은 잊지 않을 것이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희가 개봉부까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대인.”
왕사평은 이마의 땀을 닦다 말고 한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복귀할 때가 아니다. 목이 타니까 일단 물부터 좀 가져오너라.”
방휼이 눈치 빠른 부하 한 명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가 어디선가 간이의자 하나를 가지고 뛰어왔다.
의자를 건네받은 방휼은 조심스럽게 왕사평의 뒤로 쓱 밀어 넣었다.
“일단 앉으십시오. 식수도 곧 가져올 것입니다.”
왕사평의 무게에 나무 의자의 다리가 땅속 깊이 푹 파고들었다.
부러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였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대충 짐작하고 있다. 이제 괜찮으니, 전부 비상 해제하고 철수하게. 다른 검문소에도 전해주고.”
“예, 그런데 대인은 어디로 가실 건지요? 호위병력은 남겨놔야 하지 않을지요?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돕겠습니다.”
왕사평은 잠시 고민해 보았다.
군부의 병력을 해산시킨 이후 마륜산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나라의 첩보기관인 정창원이 정녕 창룡대라는 무림조직에게 장악당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사위 놈이 배신한 것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 했다.
게다가 음양쌍괴라는 위험한 놈들도 함께 가야 하지 않는가.
그러한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나도 안전장치 하나쯤은 있어야겠지.’
하지만 방휼과 그의 부하들은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저들보다는 일당백의 호위 한 명이 더 나을 터.
“방금 자네 이름이 방휼이라고 했는가.”
“예, 대인.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음. 자네 부대에서 경공이 가장 빠른 자가 누구인가.”
방휼이 가슴을 펴고는 자신의 가슴을 슬쩍 두들겼다.
“제가 가장 빠릅니다.”
알면서도 물어본 것이다.
절제도위는 전장에서 중견 지휘관의 역할을 하는 무관으로 무공이 고강한 편이다. 그의 부하들이 방휼의 경공을 능가할 리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에게 죽통을 건네받은 왕사평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후 소매로 입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자네는 권력에 대한 욕심과 야욕이 남다른 것 같군.”
“그,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왕사평이 한 손을 올려 보이며 그의 말을 끊었다.
“좋은 뜻으로 얘기한 것일세. 모름지기 사내라면 그런 포부와 의지쯤은 품고 있어야지.”
방휼은 안도와 함께 상체를 구십 도로 꺾어 포권했다.
“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세상을 살다 보면 인생을 바꿀 만한 기회가 한 번쯤 찾아오는 법이네. 자네도 한번 도전해 보겠는가.”
뜬금없이 무엇을 도전하라는 말인가.
도무지 왕사평이 내뱉은 말의 의도가 짐작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방휼은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도전하겠습니다. 뭐든 기회만 주십시오.”
“음. 내게 남은 시간이 아마 반 시진쯤 되는 것 같군. 그 안에 개봉제일검을 찾아 이곳으로 데려오시게.”
“대인의 호위 무관이신 전충 교위님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왕사평은 어딘가를 힐끔힐끔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 시진 뒤에는 다시 음양쌍괴를 만나러 가야 한다.
그전에 전충을 불러올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