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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71화 (171/238)

171화 잡았다 요놈 (2)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호위 전충의 첫마디였다.

이곳에 도착한 그는 홀쭉해진 왕사평의 모습에 연신 놀라워했다.

“설명하자면 좀 길어질 것 같네. 자세한 건 가면서 얘기하지.”

“오시자마자 또 어딜 가신다는 건지요?”

“야차 같은 두 놈이 저쪽 어딘가에서 날 지켜보고 있다. 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

약속된 시간이 조금 지난 듯했기에,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설마…… 음양쌍괴가 지금 저 산에 있는 겁니까?”

왕사평이 고개를 끄덕이자, 전충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과 다시 만나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이리라.

당연한 반응이었다. 음괴에게 두들겨 맞고 기절했던 게 바로 어제 일 같았으니까.

그의 일평생 최초의 패배이자, 가장 처절했던 기억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지금은 목적이 같으니, 우리에게 해코지하지 않을 걸세.”

“목적이라니요?”

“중대한 사건이 있어서 함께 공동수사를 하기로 했네.”

음양쌍괴와 함께 공동수사를 한다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전충의 표정엔 의문이 가득했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그때 출발할 채비를 마친 왕사평이 누군가를 지목했다.

“자네 이름이 방휼이라고 했지?”

방휼은 창백한 얼굴로 비질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반 시진 안으로 전충을 불러오기 위해 죽기 살기로 경공을 펼쳤던 탓이었다.

“내 주위엔 자네와 같은 인재가 필요하네. 생각이 있다면 열흘 후 개봉부로 찾아오게.”

“감사합니다, 대인. 꼭 찾아뵙겠습니다.”

검문소는 해체되었고, 왕사평은 호위와 함께 뒷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간의 일을 듣게 된 전충이 고개 숙여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대인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책감 가질 필요 없네.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뭐가 문제인가.”

“사실 저는 대인께서 고문을 당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강해지셔서 다시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뭐 결과적으로는 그리되었군. 소갈병도 치유되었으니까.”

그때 전충이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쩌면 음양쌍괴가 그렇게까지 악인들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사평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전충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게.”

“개봉부에서 큰 소란이 있던 날에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를 죽일 기회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기절만 시켰고요.”

“대인을 납치한 후에는 영양 가득한 특식을 끼니마다 손수 만들어줬다면서요. 세상에 그런 악인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돌연 왕사평이 정신없이 웃기 시작했다.

배꼽을 잡은 그는 한참을 웃고 나서야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다.

“허허헛!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예, 대인. 현재까지의 정황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 자네 말이 모두 맞아. 그럼 상을 주지 않을 수가 없겠군.”

“갑자기 상이라니요?”

왕사평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음괴를 만나면 자네가 특식을 먹어볼 수 있도록 부탁해두겠네. 아마 거절하지는 않을 걸세.”

“고맙습니다, 대인. 저도 무림인들이 만드는 요리를 한번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고맙긴, 뭘. 자네 입맛에는 맞을지 모르니 한번 먹어봐. 직접 먹어보면…….”

왕사평은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전충이 검집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으니, 어서 나오시오.”

십여 장이 떨어진 나무 뒤에서 꼬마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왕사평을 기다리고 있던 유진산이었다.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다가왔다.

“호위를 데리고 왔군. 우리가 믿음직스럽지 못했나 보지?”

왕사평이 당연하다는 듯 반문했다.

“너희들을 어떻게 믿고? 나도 안전장치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가 호위를 데리고 오든 말든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당장은 서로 싸울 이유가 없었으니까.

유진산이 전충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우리로선 고마운 일이지. 그럼 지금부터 부윤 나리의 안전은 자네가 챙기시게.”

자신들은 이제 왕사평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그리하겠소.”

대답을 마친 전충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앞서 자신을 제압했던 음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리라.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답을 알려주었다.

“음괴를 찾는 모양이군. 지금 자네 위에 있네.”

무심코 고개를 위로 젖힌 전충은 화들짝 놀라며 움찔거렸다.

눈앞으로 긴 머리카락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음괴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씩 웃고 있었다. 그것도 바로 자신의 머리 위에서 말이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단 말인가.

“히히. 내가 해준 요리가 먹고 싶다고요?”

전충은 마치 귀신이라도 목격한 듯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윽고 뭔가에 홀린 듯 그의 입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그, 그렇소…….”

유설의 얼굴에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알았어요. 일 끝나고 바로 먹게 해줄게요. 대신 남기면 안 돼요.”

“고, 고맙소.”

그때 왕사평이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전충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얘기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자네가 원한 것일 뿐.”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그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네 혹시…… 두더지찜 좋아하나?”

“……예에?”

전충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유진산이 그들을 불러들였다.

“모두 이쪽으로 모이시게. 시간이 없으니 바로 출발해야 해.”

이곳에서 마륜산까지는 넉넉히 반 시진이면 도착한다.

해지는 시간을 고려하면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정상이 보이는 마륜산의 산 중턱 어딘가.

가마에서 내린 왕사평이 찌뿌듯한 몸을 풀며 물었다.

“왜 여기서 내려줘? 나보고 저기까지 걸어 올라가라고?”

유진산이 턱짓으로 정상 방향을 가리켰다.

“이곳부터는 호위랑 둘이 올라가. 우리랑 같이 나타나서 좋을 건 없을 테니.”

“뭐 어쩔 수 없겠군. 내가 가서 뭘 해주면 되지?”

“사위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냥 하고 싶은 걸 해.”

“내가 저들에게 도망치라고 한다면?”

유진산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그러든지.”

왕사평은 잠시 음양쌍괴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가자.”

“예, 대인. 힘드시다면,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됐다. 요즘 하도 뛰어다녀서 그런지, 이 정도는 오를 만해.”

전충이 앞장서서 검으로 길을 넓게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던 중 그가 궁금한 것을 슬쩍 물어보았다.

“대략적인 얘기는 아까 들었습니다. 정창원이 정말 창룡대라는 조직에게 장악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라고 어찌 확신하겠나. 가서 직접 확인해봐야 알 수 있겠지.”

“만약 사실이라면…… 이미 나라 전체가 그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황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둘은 다시 입을 닫으며 침묵을 지켰다. 정상의 분지가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걷자 먼 곳으로 허름한 전각 하나가 나타났다.

국외의 첩보와 정보를 다루는 나라의 비밀 조직. 정창원의 본부이리라.

그때 전충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 손을 올려 보였다.

“잠시만요, 대인.”

“무슨 일인데?”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비릿하고 역한 혈향(血香)까지.

전충의 앞발이 전각의 문을 걷어찼다.

드러난 내부의 광경은 가관이었다.

이십여 명의 관원이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왕사평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코를 막았다.

“뭐, 뭐야? 이 녀석들이 왜 다 죽어있어?”

전충은 이미 시체를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개봉부의 포쾌들을 데리고 수사를 지휘한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사건을 훑어보는 그의 눈썰미는 작은 것도 놓치지 않았다.

“피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응고 상태의 점도로 보아 조금 전에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가 이곳을 기습했다는 말인가?”

전충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상흔으로 보면 흉수는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들이 쓰러진 자세를 보십시오.”

탁상 위에 엎어져 있거나, 의자에 기댄 채 죽은 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무기를 움켜쥔 시체는 단 한 구도 없었다.

“일방적으로 당한 건가?.”

“예. 피하려고 했던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방심하고 있던 사이 영문도 모른 채 죽은 것입니다.”

“동시다발적으로 기습이 이뤄졌다는 얘기인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기습을 가한 자들이 같은 동료들이라면. 그리고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정황으로 볼 때 전충의 추리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흉수는 이미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숨어있던 창룡대원들이 정체를 드러낸 게로군.”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는 행동을 개시한 것이겠지요.”

왕사평은 시체들의 몰골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사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손을 쓴 흉수 중 한 명일 터.

“……그 빌어먹을 새끼를 이렇게 놓쳐버리다니.”

“아직 놓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무슨 뜻이지?”

전충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천천히 두리번거렸다.

새소리만이 가득했지만, 그의 예리한 감각은 분명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있었다.

미약하지만 기분 나쁜 기운들. 그것은 분명 살기(殺氣)였다.

문제는 그 위치를 짐작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저희는 음양쌍괴가 던진 미끼였던 것 같습니다.”

“미끼라니?”

“대인께서 창룡대원들의 정체를 솎아내면, 매복하고 있다가 일망타진을…….”

그때였다. 돌연 멀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충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콰앙-!! 콰콰콰쾅-!!!

“음양쌍괴와 창룡대원들의 전투가 시작된 모양입니다.”

“어서 빨리 가보자꾸나.”

전각 밖으로 뛰쳐나온 왕사평이 둔한 몸을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전충이 그를 가까이 호위하며 만류했다.

“위험합니다. 대인께서는 그냥 남아계시는 게 어떠신지요?”

여기까지 와서 결과만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놈이 죽기 전에 물어봐야 해!”

숲속으로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거센 돌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수십 그루의 나무가 꺾여 있었다.

그 순간 왕사평은 누군가를 볼 수 있었다.

그자는 바람에 휩쓸린 연처럼 피를 토하며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무에 등을 부딪친 관원은 눈이 뒤집힌 채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왕사평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자가 날아온 방향을 살펴보았다.

주먹을 내뻗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개봉제일검을 일방적으로 때려눕혔던 무림고수.

공포의 음괴가 아쉽다는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다섯 명!”

그 말투가 흡사 맛있는 음식을 아껴서 먹을 때 내뱉는 탄식처럼 들려왔다.

이제 남아있는 관원들의 숫자는 다섯 명뿐.

그들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자신들만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 중 한 명이 다급히 중얼거렸다.

“저희가 잠시 음괴의 발목을 붙잡겠습니다. 부대주님이라도 어서 피하시지요.”

그 순간 손녀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진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창룡대의 부대주라니. 그토록 수소문하던 조직의 간부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유진산이 용살창을 움켜쥐는 그때였다.

어디선가 분노에 찬 왕사평의 고함이 뿜어져 나왔다.

“임천호, 네 이놈!!!”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들 중에서 한 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장인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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