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잡았다 요놈 (3)
왕사평의 난입으로 잠시 전투가 멈추었다.
음양쌍괴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임천호, 너 이 새끼 이리 안 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개봉부윤이었다. 어지간한 관원들은 왕사평의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지목을 받은 임천호라는 관원이 그를 향해 쭈뼛쭈뼛 다가갔다.
“장인어른께서 여긴 무슨 일로…….”
다짜고짜 두꺼운 손바닥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이놈! 이게 다 뭔지 설명해 보거라!”
“저희는 그저 천하의 해악인 음양쌍괴를 포위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뭐? 그럼 정창원의 관원들이 죽어있는 건 뭔데?”
왕사평의 사위인 임천호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손가락으로 음양쌍괴를 번갈아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저 두 놈이 살해한 것입니다.”
정말이지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왕사평은 옆에 있는 호위 전충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의 고개가 미세하게 가로로 움직이고 있었다. 임천호의 말을 믿지 말라는 뜻이리라.
“하나만 물어보마. 너도 창룡대라는 무림의 비밀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냐?”
창룡대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임천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을 눈치챈 전충은 암암리에 검을 비틀어 쥐었다. 언제든 출수할 수 있도록.
“어서 말하지 못할까!?”
왕사평의 손아귀가 다시 한번 임천호의 뺨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도 순순히 맞아주지 않았다.
임천호의 왼손이 왕사평의 손목을 여유롭게 낚아챘다.
“창룡대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기어코 음양쌍괴와 손을 잡은 것입니까?”
사위에게 손목을 붙잡힌 왕사평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내 너희들을 모두 색출하여 개작두 앞에 세울 것이다!”
임천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런.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거군요.”
그 말은 곧 의혹들을 시인한다는 의미였다.
왕사평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내 딸의 죽음에 네놈이 연관된 것도 알고 있다!”
심증만 있었을 뿐 확신할 수는 없던 부분이었다.
그저 임천호를 한번 떠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여지없이 적중했다.
“기분이 썩 좋진 않군요. 설마 돼지 같은 따님을 제가 평생 책임질 것으로 생각하셨습니까?”
“……이, 이놈이!?”
왕사평은 다음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사위의 반응이 너무나 황당하여서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장인어른. 그냥 계속 모른 상태로 사셨으면 서로 좋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임천호의 검이 움직임을 개시했다.
벼락처럼 움직이는 검날이 곡선을 그리며 왕사평의 목으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목이 잘리고 말 터.
절체절명의 순간, 그 사이를 파고드는 또 다른 검이 있었다.
카앙-!!
미리 대비하고 있던 전충이었다.
가까스로 공격을 걷어낸 그는 곧이어 임천호의 팔부터 노렸다. 그가 왕사평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천호는 손목을 놓아주며 한 발 물러섰다.
예상보다 고강한 전충의 무공에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이 정도였나? 과연 개봉부의 제일 고수라 불릴 만하구나.”
“오너라. 너는 내 손에 죽는다.”
전충과 임천호는 각자의 무기를 움켜쥔 채 틈을 노렸다.
둘의 싸움은 쉽게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
유진산이 다른 창룡대원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우리도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지?”
왕사평과 전충의 난입으로 더욱 유리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설은 자신의 몫이 줄어들어 아쉬운 모양이었다.
“어떡해……. 이제 넷밖에 안 남았어.”
네 명. 그것은 왕사평의 사위를 제외한 창룡대원의 숫자였다.
음괴의 중얼거림을 듣게 된 그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을 그저 맛있는 먹잇감으로 여기고 있었다니. 그것도 창룡대의 부대주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 합을 몇 번 겨뤄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음괴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조금도 없음을.
“어떤 공격도 음괴에게는 통하질 않습니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부대주가 경직된 얼굴로 유진산을 슬쩍 바라보았다.
유진산은 그의 눈빛에 서린 의중을 알아채고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느냐. 설마 노부를 인질로 잡아보려고?”
속내를 들킨 부대주는 내심 뜨끔했지만, 이 상황에서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그건 좀 힘들어 보이는구나.”
중간에서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손녀를 무슨 수로 돌파하겠는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을 터.
유진산은 은밀히 손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아가, 저놈이 지금 도망칠 생각을 하는 것 같구나.
이미 부대주는 슬슬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을 세 명의 창룡대원이 은근슬쩍 막아섰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선 전충과 임천호가 일대일로 결전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같이 시작할 모양이리라.
- 걱정하지 마. 내가 가서 잡아 올게.
- 그럼 할애비는? 셋은 힘들어.
유진산이 지켜본 결과 부대주와 임천호는 화경을 이룬 고수들이었으며, 나머지 셋은 자신과 같은 초절정의 반열이었다.
유설이 부대주를 뒤쫓기 시작하면, 전충이 임천호를 상대해줄 것이리라.
하지만 나머지 셋은 혼자서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 그럼 두 명은 어때?
같은 초절정이라도 엄연히 위아래가 있는 법.
상승무공을 익힌 자신이 겁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 두 명이면 해볼 만하지. 근데 그건 왜 물어?
- 내가 한 명 줄여줄게.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유설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돌풍을 일으킬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움직임이었다.
대비하고 있던 창룡대원들도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강기를 뿜어냈다.
내공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창룡대원들이 일방적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부대주는 이미 등을 돌려 달아나고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설은 한 명만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움직임.
앙증맞은 두 발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수십여 개의 환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극성의 한계를 돌파한 유가장의 선풍보법이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오직 유진산만이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오직 둘만 아는 초식이었으니까.
‘설설봉타(雪雪棒打)?’
유설이 창안한 무적설이창법의 일 초식이었다.
손녀가 실전에서 펼치는 것은 유진산도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삼십육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공세에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십 자루로 늘어난 용화창이 한 명의 창룡대원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퍼퍽-! 퍼퍼퍼퍼퍽-!!
폭우처럼 쏟아지는 타격음이 귀를 어지럽혔다.
옆에 있던 창룡대원들은 도와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눈을 어지럽히던 환영이 사라지는 그때였다.
털썩-!
설설봉타에 당한 창룡대원이 무릎을 꿇는 소리였다.
전신이 불어터져 멀쩡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몰골이었다.
두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으며, 입에서는 침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는 것은 유설이 힘을 조절했기 때문이리라.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명의 창룡대원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유설이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부대주를 뒤쫓기 위해서였다.
허공을 질주하는 유설은 콧노래를 불러댔다.
모처럼 하게 된 술래잡기에 신나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시원한 찜질이 기다려요~ 머리~ 머리부터~ 발끝~ 발끝까지~ 시원하고 시원한~ 몽둥이찜질이 기다려요~”
오 갑자 이상의 내공이 실린 노래가 마륜산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박자를 가지고 노는 음률에는 흥이 넘쳐났다.
하지만 창룡대원들은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이었다.
“……이 상황에서 노래를?”
“저건 사람이 아니다. 하늘이 세상에 야차를 내려보냈구나.”
그 순간 유진산이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이놈들이 감히 누구를 흉보느냐!”
자신의 눈앞에서 손녀를 헐뜯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유진산이 용살창을 잡아당기자, 두 명의 창룡대원도 자세를 낮추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작하려고 했다.”
“음괴에게 살해당하기 전에 네놈이라도 데려가야겠구나.”
셋은 품(品)자 형태로 마주 보며 천천히 우측으로 돌았다.
포위당하지 않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했다.
십여 장 밖에서도 격돌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전충과 임천호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리라. 허나 그들의 전황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유진산의 모든 신경은 눈앞의 적들을 향해 집중되었다.
“쉽지 않을 게다. 이래 보아도 천하제일 창술대회에서 우승하신 몸이니까.”
창룡대원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만 거창할 뿐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는 지방의 대회라는 것을.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음괴가 다시 돌아온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으니.
두 명의 창룡대원이 동시에 공세를 개시했다.
두 개의 검날이 좌우에서 쏜살같이 다가왔다.
허나 유진산은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해줄 마음이 없었다.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그는 재빨리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서 그의 신형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측면으로 돌기 시작했다.
파계승인 정혜에게 전수받은 소림의 대나이신법(大那移身法)이었다.
곧이어 붉은 강기를 머금은 용살창의 창끝이 섬전처럼 쏘아져 나갔다.
일광극섬(一光極閃). 유가살풍창의 기술 중 가장 빠른 초식이었다.
회심의 일격이 막히고 말았지만,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자세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유진산이 공세를 이어가려고 할 찰나였다.
돌연 머리 위에서 강렬한 살기(殺氣)가 느껴졌다.
또 다른 놈이 치고 들어온 것이리라.
유진산의 내력을 가득 머금은 용살창이 땅끝을 차고 솟구쳐 올랐다.
유가살풍창 구 초식, 맹룡승천세(猛龍昇天勢)였다.
그의 머리 위에서 창과 검이 부딪치며 굉음을 토해냈다.
내공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기습을 가하던 창룡대원은 충격에 삼 장을 튕겨 나갔다.
유진산의 마음은 의기양양해졌지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이번엔 전면에 있던 녀석이 공격을 개시해오고 있었으니까.
“어딜!!”
우렁차고 청량한 외침과 함께 그의 신형이 왼발을 축으로 회전했다.
회룡살참(回龍殺斬)이라는 살풍창의 초식이었다.
창룡대원의 검에서도 시퍼런 검강이 다가와 기세를 뿜어냈다.
꽈아아앙-!!
유진산은 한 걸음을 물러섰지만, 상대는 세 걸음을 후퇴했다.
이번에도 우세를 점한 것이다.
이 순간 유진산은 자신의 실력이 한층 성장했음을 느꼈다.
손녀와 대련하면서 깨닫게 된 기교와 경험들. 그리고 중후한 내공 때문이리라.
이제는 화경에 도달한 절대고수가 아니라면 누구든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이 녀석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구만?”
예상을 뛰어넘는 양괴의 무력 앞에 두 명의 창룡대원은 당황했다.
이대 일로 난전을 벌인다면 될 것도 같았지만, 유진산이 피해 다니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철저히 일대일로만 접전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신묘한 보법을 펼쳐대면서 말이다.
이대로라면 결판이 안날 터. 약이 바짝 오른 창룡대원이 이를 갈았다.
“……저 얄미운 애늙은이 새끼가.”
난데없는 욕설에 유진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에게 모욕을 당하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하지만 그의 입담 또한 어디 가서 밀릴 수준이 아니었다.
“에끼, 싸가지없는 놈들아. 너희들은 애비한테도 그리 욕하느냐!?”
창룡대원이 뭐라고 대꾸할 찰나였다.
돌연 십여 장이 떨어진 위치에서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크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