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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76화 (176/238)

176화 내가 알 게 뭐야 (1)

왕사평이 궁성으로 간 지 벌써 나흘째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궁금했지만 현재로선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늘도 허탕이군.’

유진산은 며칠째 개봉부에서 감옥만 지켜보고 있었다.

창룡대에서 부대주를 탈출시킬 것으로 예상했지만, 아무런 입질조차 없었다.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환호가 들려오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하하! 해내실 줄 알았어요.”

“강호의 떠오르는 혜성이시라더니, 소문대로 정말 최고였습니다.”

일단의 포쾌들이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아부를 건네는 모습이었다.

그 중심에는 피 묻은 곤봉을 움켜쥔 손녀가 보였다.

유진산이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유설이 곤봉의 끝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내가 잡았어. 은자 다섯 냥짜리.”

후미에서 얼굴이 퉁퉁 불어터진 누군가가 포박된 채 끌려오고 있었다.

문관인 현령의 관복을 입고 있었는데, 별다른 특이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거나, 기가 내부로 갈무리되는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도달했거나.

만약 창룡대원이라면 후자일 터.

“어떻게 찾았어?”

유설이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눈을 가리킨 후 다시 반대편으로 뻗으며 말했다.

“내 눈은 못 속여. 창고에 숨어 있더라구.”

유진산은 다시 그를 한 번 훑어보았다.

보통은 당황하거나 공포에 질려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의 상황이 무섭지 않다는 듯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수고했다. 확실한 것 같구나.”

이런 방식으로 창룡대원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정말로 누군가를 체포해 올 줄이야.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총포두 장호가 유진산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우선 옥에 가둬놓을 테니, 원하신다면 따로 만나보셔도 좋습니다.”

“그리하시게. 이따가 한번 대화를 나눠보지.”

고개를 끄덕이던 유진산이 돌연 우측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포두님!”

“뭐야? 무슨 일인데?”

다른 조에 소속된 포쾌였다.

그가 숨을 고르며 다급히 말했다.

“지원 좀 부탁드립니다. 수상한 집단을 찾았는데, 문제가 있어요.”

“몸싸움이라도 벌이고 있다는 얘긴가?”

“예. 그리되기 직전인데, 저희가 밀릴 것 같습니다.”

“어떤 놈들이 감히 공권력에 대항하는 거야? 어서 안내해!”

복귀하기 무섭게 또다시 출동이었다.

옥으로 향하는 두 명의 포쾌와 유설을 제외한 모두가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떠나지 않은 유설이 할아버지의 어깨를 토닥이듯 쓰다듬었다.

“할배, 나도 다녀올게. 돈 벌어올 테니 잘 지키고 있어.”

유진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손녀가 눈을 마주치더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벼락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홀로 남은 유진산은 멀어져가는 손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지? 이 개운치 못한 기분은?’

개봉의 외각에 자리한 장원이었다.

표국이라는 것을 말해주듯 곳곳에 마차와 적재된 화물이 보였다.

입구에서는 두 부류의 무리가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들어가려는 개봉부의 관원들과 그들을 저지하는 표사들이었다.

표사들의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진입이 어려워 보였다.

“갑자기 무슨 연유로 저희 표국을 수색하려는 겁니까?”

“제보가 들어와서 그렇소. 금방 확인하고 끝낼 테니 협조 좀 해주시오.”

“혐의가 있다면 말씀부터 좀 해주시오!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니오!?”

양측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때 현장에 도착한 총포두 장호가 곤봉을 치켜들었다.

“모두 그만!”

새로 합류한 자들은 도합 여섯 명. 유설을 포함한 인원수였다.

머릿수는 더 적었지만, 그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관원들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한 곳을 바라보았다.

“오셨군요!”

“저 녀석들입니다.”

“길을 뚫어주십시오, 대협.”

어른의 가슴팍 정도 오는 여자아이였다.

왼손에는 개봉부에서 발급한 포쾌의 명패를, 오른손에는 피 묻은 곤봉을 움켜쥐고 있었다.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모습에선 알 수 없는 중압감이 느껴졌다.

“여기에요?”

장호가 손바닥을 쭉 내뻗으며 중얼거렸다.

“예. 길만 열어주시면, 나머진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는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하급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아무도 이상하게 보는 자가 없었다.

유설은 표사들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모두 여기에서 기다려요. 알겠어요?”

그 순간 유설의 전신에서 무형의 기운이 확 뿜어져 나왔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엄청난 기세였다.

쏴아아악-!!

주위를 둘러싼 십수 명의 관원들이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숨 막히는 위압감에 주변의 공기가 싸늘히 얼어붙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을 때였다.

이곳에 먼저 와있던 포두 양정이 곤봉을 치켜들었다.

“모, 모두 물러서!”

모두가 한쪽으로 멀찍이 물러났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를 비집고 유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개 표국의 표사들이 현경의 기세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입구를 철통방어하던 그들은 파도가 갈라지듯 좌우로 옆걸음질 쳤다.

모두의 시선이 유설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말없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라니. 오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조차 소름이 돋는지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렇게 유설은 삼 층 구조로 지어진 본채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곧이어 왼손을 슬쩍 올리자 전각의 문이 스스로 열렸다.

단신으로 내부에 들어선 유설은 문부터 닫았다.

주위를 쓱 둘러보자 남녀가 뒤섞인 열댓 명이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국주를 비롯한 표국의 간부들이리라.

찰나의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한 호흡이 더 지났을 때였다.

조용히 미소짓고 있던 유설이 돌연 양팔을 벌리고 돌진했다.

“풍호 삼촌!”

가장 중앙에 있던 중년인이 유설을 번쩍 안아 들었다.

“어이쿠! 우리 설이, 왜 이렇게 무거워졌어? 이제 숙녀가 다 됐네.”

유설은 장원의 입구에 도착함과 동시에 알아챘다.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설산표국의 간판을 걸고 위장한 흑야방의 총타를 말이다.

“히히히. 보고 싶었어, 삼촌. 언니들도 반가워요!”

주변의 여인들이 다가와서 유설을 어루만지며 깔깔거렸다.

“어머 설아, 이게 얼마 만이야?”

“언제 이렇게 더 예뻐졌어?”

“머릿결 좀 봐. 엄청 부드럽네.”

전각 밖에선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본채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현희 이모도 만났었다며? 얘기 들었어.”

“응. 나 엽이도 안아 봤어. 히히힛.”

풍호가 유설을 조심스럽게 내려주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르신이랑 같이 개봉부에 머물고 있다며? 진작에 놀러 오지 그랬어.”

정보를 다루는 흑야방답게 진즉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성내가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무리해서 접선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할배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어. 근데 밖에는 왜 그런 거야?”

개봉부의 임무는 위장한 창룡대원들을 색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관원들이 흑야방으로 찾아왔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삼촌도 모르겠어.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곤란했는데, 설이 네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단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풍호가 방긋 웃으며 유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삼촌은 세상에서 우리 조카가 제일 든든해. 밥 먹고 갈래?”

“아니, 다음에 와서 내가 삼촌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밖에서 기다려서 가봐야 해.”

“그래, 그래. 다음에 조용해지면 어르신하고 꼭 놀러와.”

“응, 삼촌.”

흑야방의 간부들은 유설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잠시 후, 본채 밖으로 나오는 유설은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나름대로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얼굴을 실룩거리는 모습이 마치 화가 난 듯 보였다.

장원의 입구로 다가가자 양정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본채를 수색하다 보면 정보를 관리하는 지하 밀실이 발견될 우려가 있었고, 신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유설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내저었다.

허탕이라는 의미였다.

관원들 중 누구도 음괴에게 말대꾸를 할 용기를 가진 자는 없었다.

포두 양정이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철수한다!”

도합 십수 명으로 이루어진 두 개조가 대열을 맞추어 이동했다.

개봉부로 복귀하는 내내 유설을 향해 관원들의 아부가 끊이질 않았다.

반은 진심이었으나, 반은 전충 교위가 그들에게 충고했던 내용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는 정말 대단했어요. 기세만으로 모두를 제압하시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무림에서도 상대할 자가 없다면서요?”

“미모만큼이나 무공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분이 좋아진 유설은 턱을 올리고는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별거 아니에요.”

양정이 옆으로 다가오며 알랑방귀를 뀌었다.

“별거 아니라니요? 저는 일평생 반로환동을 한 절세고수를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문을 물어봐도 될지요?”

유설은 대답하지 않고,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곳을 향해 검지를 내뻗으며 말했다.

“근데 저기, 아저씨들 친구 아니에요?”

오십여 장이 떨어진 거리였다.

모두가 눈에 힘을 주고 그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관복을 입은 누군가가 절뚝거리며 걷는 모습이 보였다.

“쟤, 문호 아니야?”

“혼자서 어디 가는 거야?”

“다리는 왜 저래!?”

지켜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두가 그를 향해 다가가며 소리쳤다.

“문호! 무슨 일이야!?”

“조원들은 어쩌고 너 혼자 있어?”

문호라 불린 관원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총포두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울먹이듯 말했다.

“저희 조의 관원들이 모두 끌려가고 있습니다.”

“끌려가다니? 누구한테?”

도성의 행정과 사법을 담당하는 개봉부의 관원들을 누가 끌고 간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금……군입니다.”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궁궐을 수호하는 황제의 친위부대인 금군이라니.

그들과 자신들이 마찰을 일으킬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뭐, 금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놈들이 왜?”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다짜고짜 덮쳐왔는데,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저만 겨우 빠져 나왔던 터라…….”

장호가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필이면 부윤께서 자리를 비운 이 시점에…….”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가서 확인해봐야지. 어느 쪽이야?”

문호라 불린 포쾌가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았어요.”

“알았다. 너는 본청으로 돌아가서 기다려.”

개봉부로 복귀하던 일행은 방향을 틀어 그곳으로 달렸다.

그러는 와중에 장호가 유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대협.”

“왜요?”

“상대는 금군입니다. 혹여 심기가 불편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제게 맡겨주십시오.”

유설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서워요? 내가 일을 크게 만들까 봐?”

“그, 그건 아니고…….”

“나는 그렇게 막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죄, 죄송합니다, 대협.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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