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내가 알 게 뭐야 (2)
장호를 선두로 십수 명의 관원들이 정신없이 달렸다.
목적지에 도달하자 어이없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개봉부의 동료 일곱 명이 병사들에게 포박당한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삼십여 명. 중무장한 병사들은 한눈에 봐도 한 명 한 명이 무공을 익힌 정예부대였다.
행렬의 끝이 인적이 드문 길목에 도달했을 시점이었다.
“멈추시오!”
장호의 외침에 병사들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병사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투구 위에 붉은 술이 장식된 것으로 보아 일개 부대를 지휘하는 도두(都頭)급 장교이리라.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장호를 노려봤다.
“무슨 일인가.”
“어찌하여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들을 포박한 것이오!?”
“이들에게 내란에 대한 혐의가 있어 조사할 예정이다.”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란 말인가.
장호가 말까지 더듬으며 반문했다.
“내, 내란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는 거요!?”
“물러가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들도 공범으로 간주하여 포박할 테니.”
장호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왕사평이 친필로 작성해준 공첩(公牒)을 꺼내어 펼쳐 보였다.
“우리는 부윤의 명령으로 임무를 수행 중인 관원들이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소?”
왕사평은 아무리 금군이라도 건들 수가 없는 거물이었다.
그런데도 장교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다.
“아아. 왕 대인을 말하는 건가? 반역죄로 체포된 자의 공첩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황제를 알현하러 간 왕사평이 체포되었다니?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감히 개봉의 부윤을 상대로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기어코 장호의 눈이 뒤집히고야 말았다.
“뭐, 뭐 반역!? 감히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 순간 장호를 노려보던 장교가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피할 겨를도 없이 그의 발바닥이 장호의 앞가슴을 걷어차고 있었다.
장호는 일 장을 날아 볼품없이 자빠지고야 말았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병사들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챙-! 채챙-!!
두 명의 포두와 십수 명의 포쾌들은 지금의 상황에 몹시 분개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금군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며, 머릿수에서부터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그렇지 않으면 반역자로 간주하겠다.”
이어진 장교의 한마디가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꿈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금군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자신들을 겁박한다는 말인가.
무릎을 꿇자니 자존심이 용납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무시한다면 충돌이 벌어질 터.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도대체 이렇게 막무가내인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지켜보던 포두 양정이 참지 못하고 물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경고다. 꿇어.”
개봉부의 관원들은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양정이 우측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장형 뜻에 따르겠소.”
총포두 장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무릎을 꿇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교위님만 같이 있었어도.’
개봉부의 제일 고수인 전충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한이었다.
만약 그가 이곳에 있었다면, 어찌 금군이 무력으로 자신들을 겁박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왕사평과 함께 궁성으로 떠난 상황이었다. 둘 다 며칠째 소식이 없었기에,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장호가 선두에서 무릎을 꿇으려 했다.
무엇인가 이상했다.
갑자기 무릎이 왜 구부려지지 않는단 말인가.
“장형, 시간이 없으니 빨리 결정해주시오.”
“이, 이상해. 무릎이 안 움직여.”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무형의 기가 자신의 다리를 휘감아 옥죄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포두들이 머뭇거리자 금군의 장교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지며 곳곳에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관원들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꿇지 마요.”
여자아이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모두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호의 옆에서 유설이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있었다.
“대, 대협…….”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무릎을 꿇어요?”
음괴의 등장으로 상황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전충보다 더욱 든든한 지원군이었지만,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었다.
관원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금군의 장교가 유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저 계집애는 뭐지? 요즘 개봉부의 포쾌는 애들도 뽑나?”
양정이 다급히 그를 만류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오. 우리를 모욕하는 것은 괜찮으나, 저분에겐 말씀을 삼가시오.”
“저분? 포두가 왜 포쾌의 눈치를 보는 거지? 왕 대인의 친인척이라도 되는 건가?”
“사정이 있으니 도발을 그만두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장교는 마침 잘 걸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뭐? 공명정대해야 할 개봉부가 이리도 부패해 있었다니.”
“그, 그런 것이 아니오!”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체 부하 한 명을 지목했다.
“저 꼬마 년도 함께 데려가서 조사한다. 체포해!”
병사 한 명이 가슴 위로 주먹을 가져다 붙였다.
“충(忠)!”
궁궐을 지키는 정예답게 그의 움직임에는 절도와 기개가 넘쳤다.
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모습에 장호와 양정은 참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안 돼!”
말려보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병사가 유설의 머리채를 움켜쥐기 위해 손을 내뻗고 있었으니까.
그의 행동은 당연히 저지당했다.
터억-!
오른팔을 들어 머리를 방어한 유설이 쌍심지를 켰다.
“지금 나 때린 거죠?”
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엉거주춤했다.
그때 유설이 왼쪽 팔뚝을 걷어서 관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여기 할퀸 거 맞죠?”
물론 팔에는 조금의 상처도 없었다.
단지 자신이 먼저 공격당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머리채를 잡으려 했던 병사가 다시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이번엔 유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설의 발등이 곡선을 그렸다.
정강이가 꺾인 병사는 무릎을 굽히며 유설과 눈높이를 마주쳤다.
그 순간 하늘 높이 솟구친 곤봉이 그의 목 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철퍼덕 넘어진 병사는 미동조차 없었다.
돌발적인 상황에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기어이 금군의 병사를 때려눕힌 것이다.
장호와 양정은 어쩔 줄을 모르며 당황했다.
“금, 금군을 죽이시면…….”
사실 급소를 비껴서 쳤기에 병사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유설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럼 그냥 맞고만 있어요? 나는 방어를 한 거예요.”
“저, 저 그게…….”
한편 금군 장교는 안면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심각한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그의 두 눈이 점차 충혈되어갔다.
“너는 지금 폐하의 병사를 죽인 것이다. 알고 있느냐?”
보통 이러한 상황이라면 겁을 먹어야 정상이다.
그 누가 감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유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곤봉으로 손바닥을 툭툭 두들기며 대꾸했다.
“내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해요?”
도발도 이런 도발이 없었다.
분위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금군의 모두가 얼굴이 붉어졌다. 피가 거꾸로 솟는 모양이었다.
부하들은 이미 검을 뽑은 채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자신의 허리춤에서 서서히 검을 뽑기 시작했다.
“명분은 충분하니 죽여라. 내가 책임진다.”
성질이 가장 급한 병사 한 명이 앞장서서 뛰쳐나갔다.
검을 내뻗는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몸놀림이었다.
유설은 자신의 인후로 검 끝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곧이어 목이 꿰뚫리려는 찰나.
돌연 거짓말처럼 검 끝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지켜보던 모두가 놀란 눈을 부릅떴다.
유설이 엄지와 검지로 날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게 뭔…….”
“어, 어떻게 저걸……?”
금군의 병사들은 무공을 연마하여 무기에 내력을 담을 수 있다.
그 누가 손가락 두 개로 그들의 검을 낚아챌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코앞에서 말이다.
더욱이 황당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끅.”
병사가 검을 회수하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를 악다물 정도로 힘을 썼음에도 말이다.
양손의 힘이 손가락 두 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유설이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고는 장호에게 물었다.
“봤죠?”
“먼저 날 죽이려고 한 거요.”
장호는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의 얼굴에는 불안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따 우리 할배한테 아저씨가 잘 얘기해줘요.”
그렇다. 지금껏 유설은 반격의 당위성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참을 필요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유설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눈 깜짝할 사이 유설이 움켜쥔 곤봉이 병사의 복부를 후리고 있었다.
“꺼헉!”
외마디 신음과 함께 그는 삼 장 이상을 날아 바닥을 굴렀다.
그가 어떻게 공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움직임.
그리고 엄청난 괴력에 병사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몸이 얼어붙었다.
반면 개봉부의 관원들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모, 모두 한 번에 공격해!”
이제야 금군의 장교도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하나같이 고도의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었다.
공포를 이겨낸 그들이 동시에 유설을 향해 질주했다.
“죽어!”
“이 년이 감히!”
장교도 우측으로 이동하며 측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검날이 날아들고 있었으나, 유설은 눈 한 번 깜빡이질 않았다.
거센 폭음과 함께 세 명의 병사가 동시에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쩌억-! 콰직-! 쾅-!!
곤봉이 바람을 가를 때마다 어김없이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구도 일 합을 버텨내는 자가 없었다.
곤봉과 마주친 검날은 단번에 부려져 나갔고, 중무장한 금군의 갑주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순식간에 상황은 아수라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편 그곳으로부터 삼 장 정도가 떨어진 곳이었다.
포두 양정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장호를 향해 물었다.
“장, 장형.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누가? 내가? 지금 저 상황은 전충 교위님이 오셔도 말릴 수가 없어.”
“어, 어떡해요……. 우린 이제 망했습니다.”
장호는 이미 자포자기한 듯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이젠 돌이킬 수가 없어. 아마도…… 우리 전부 다 줄줄이 목이 매달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