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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78화 (178/238)

178화 내가 알 게 뭐야 (3)

곤봉의 끝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주변으로는 수십여 명의 금군 병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참사의 중심에서 유설이 당당히 물었다.

“모두 봤죠? 나는 방어만 한 거예요.”

먼저 공격한 것은 병사들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적당이라는 것이 없었을 뿐.

어쨌거나 현장을 수습해야 하는 것은 포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포두 양정이 참담하다는 표정으로 장호에게 물었다.

“장형,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후……. 일단 살아남은 자들이 있는지부터 살펴보자고.”

관원들은 끌려가던 자들까지 포함하여 세 개조의 규모로 도합 이십여 명이었다.

그들은 쓰러진 금군 병사들의 생사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래야 어떻게 대응할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 포두님,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다른 자들도 어서 살펴봐.”

병사들이 미동조차 없었기에 모두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여기도 한 명이 있습니다!”

“이자도 숨은 붙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음괴가 의도한 것인지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모두가 살아 있었다.

포두 양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최악의 사태는 피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포박에서 풀려난 포두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답해주었다.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내란 혐의의 누명을 씌우고 잡아가려 했습니다. 아무래도 궁성에서 정치적인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의 상황이 설명되질 않았다.

더군다나 왕사평이 반역 혐의로 투옥되어 있다니.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이자들을 그냥 놔두고 철수합니까?”

포두들은 잠시 고민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듬성듬성 구경하는 민간인들이 있었다.

도저히 조용히 넘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장호가 작게 속삭였다.

“우리는 떳떳하니 절차대로 진행하자고.”

“절차라니요?”

“전부 개봉부로 끌고 가자는 말이다. 저들이 돌아가서 지원군을 데리고 오기라도 하면 끝장이야.”

궁성을 지키는 금군의 병사는 수만 명에 이른다.

그들이 작정하고 움직인다면 버텨낼 수가 없을 터.

양정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시간부터 벌어놓고 고민하자고요.”

합의점이 돌출되자 장호가 포쾌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자들은 거짓 정보로 개봉부의 명예를 훼손하고, 관원들을 해하려고 했다! 모두 포박하여 끌고 간다!”

관원들이 금군을 체포하여 호송하는 기이한 행렬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직도 절반 이상의 병사가 기절해서 깨어나질 못했다. 그렇기에 상당수를 포쾌들이 업은 채로 옮겨야 했다.

마음이 급했기 때문일까? 관원들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개봉부의 정문을 들어서서 정청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앞뜰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왕 대인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장호가 그를 향해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전충 교위가 그에게 예우를 차리는 것을 알기에, 포두들도 유진산을 깍듯이 대했다.

“충돌이 좀 있었습니다.”

“그냥 충돌이 아니라 전부 박살을 내놨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금군을 다 때려눕혔는가.”

“그게 저…….”

“어서 말해보게.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이런 짓을 했는지.”

장호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곧이어 입을 열려던 그가 돌연 우측을 슬쩍 바라보았다. 갑자기 얼굴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음괴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그는 미리 언질을 받았던 대로 대답했다.

“저, 저희는 그저 방어만 한 것입니다. 절대로 먼저 공격을 했다거나 도발하지 않았어요.”

“그럼 이 미친놈들이 왜 개봉부의 관원을 공격해?”

“아무래도 왕 대인께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장호는 유진산에게 지금까지 확인된 내용에 대해서 모두 털어놨다.

내막을 전해 듣게 된 그는 얼굴이 경직되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더욱 심각하구나.”

“어찌 된 일인 것 같습니까?”

유진산이 손녀에게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관원들의 뒤에 숨어 있던 유설이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다가왔다.

예상외로 유진산은 손녀를 나무라지 않고, 등을 슬쩍 토닥였다.

그러면서 장호에게 이어서 답했다.

“우리는 그냥 떠나면 그뿐이지만, 너희들은 모두 죽게 될 게다. 왕 대인도 말이지.”

“그렇게…… 심각한 상황입니까?”

“금군을 때려눕힌 것이 문제가 아니야. 내란 혐의까지 거론된 것을 보니, 개봉부를 뒤집으려고 작정한 모양인데? 아주 윗선의 거물급에서 말이지.”

장호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으나, 왕사평과 전충이 자리를 비운 이상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유진산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앞서 대인께서 말씀하시길 어르신의 지략을 당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도움을 좀 주실 수 있으신지요?”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었다.

유진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허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모두 따라 줄 수 있겠는가?”

“예, 물론입니다.”

유진산은 그들이 걸어왔던 방향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곳에는 관문처럼 굳건히 버티고 있는 개봉부의 정문이 있었다.

“지금 즉시 정문부터 걸어 잠그시게. 아무도 출입할 수 없도록.”

“괜찮을지요? 특수상황이 아니라면, 관청은 항시 열어두게 되어있습니다. 차후 문제가 될 수 있을 텐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특수상황이란 말인가. 그리고 당장 임무를 중단하고, 포쾌들을 전부 소환하게.”

장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지 않은가.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그가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일식경 후에 다시 보지.”

“예, 어르신.”

할 말을 마친 유진산은 손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너는 이리 따라오너라.”

유설은 말없이 할아버지를 따라가며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물었다.

“왜긴 왜야. 할애비가 할 말이 있으니까 불렀지.”

“나는 잘못한 거 없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던가. 아직 얘기도 꺼내지 않았거늘, 잘못한 게 없다니.

유진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아가.”

“으응? 나?”

유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나무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잘했다니? 어리둥절한 것이 당연했다.

“오냐. 그 관원들을 금군에게 끌려가게 놔뒀으면, 전부 죽었을 게다.”

“그래, 그래. 그리고 그놈들을 제압해서 전부 잡아 온 것도 잘한 일이다. 덕분에 시간을 좀 더 벌게 되었으니까.”

유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이렇게 할아버지한테 칭찬을 받게 되니, 어안이 벙벙해진 것이다.

“어떻게 거기까지 판단을 했느냐.”

“나도 할배랑 같은 생각을 했지. 가만히 놔두면 안 될 것 같더라구.”

유진산은 손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했다. 암중모략이 가득한 무림에서는 항상 그렇게 다음 수를 내다보고 행동해야 한단다.”

“응, 알았어.”

“오냐. 그럼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 네 생각을 한번 말해 보거라.”

유설은 왼손으로 자신의 턱을 쓱 쓰다듬었다.

“으음~ 내 생각엔 말이야.”

“그래, 아가. 괜찮으니 어서 말해보거라.”

생각을 정리한 유설은 손에 쥐고 있던 곤봉을 쓱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몽둥이맛을 보여줘야지.”

“누구한테?”

“정문을 넘어오는 병사들.”

“금군들 말이냐? 수천 명이 몰려올지도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막아?”

“할 수 있어. 나한테 맡겨둬.”

이미 손녀의 얼굴엔 비장함이 가득했다.

넘어오면 누구든 다 때려눕히겠다는 확고한 자신감이 보였다.

가능성만 놓고 보자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아무리 금군의 머릿수가 많더라도 유설을 어찌할 수는 없을 터였다. 황궁의 고수들이 모조리 뛰쳐나온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렇게 무식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상책인 게지.”

“그럼 할배 생각은 뭐야?”

할아버지로서 손녀에게 지혜를 알려주는 것은 뿌듯한 일이었다.

유진산은 뒷짐을 지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어쩌면 한 놈만 잡으면 될지도 모르겠구나. 누구일 것 같으냐.”

“머리!”

“그래, 맞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계획한 놈이 궁성 어딘가에 있겠지. 그럼 그 머리가 누군지 누가 알고 있을 것 같으냐.”

“왕 아저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왕사평을 궁지에 몰아넣은 상대 세력이 있을 터였다.

유진산은 손녀가 기특하다는 듯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우리 설이는 하나를 알려 주면 둘을 아는구나.”

“히히히. 그럼 이제 우리가 왕 아저씨를 찾아야 하는 거지?”

“맞다. 왕 대인에게 머리가 누군지 알아낸 후, 그놈이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언제까지?”

“개봉부의 정문이 뚫리기 전까지?”

그 순간 유진산과 유설의 두 눈이 마주쳤다.

마음이 맞았기 때문일까?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허공에서 한쪽 손뼉을 ‘짝’ 부딪혔다.

“하하. 역시 할애비 손녀답구나. 요약하자면 시간 싸움인 게지.”

그렇게 조손이 한참을 웃고 있을 때였다.

잠시 후 유설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 손을 올려 보였다.

“할배, 잠깐만…….”

“어디서 신음하는 소리 안 들려?”

유진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포쾌들 외에는 별다른 특이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글쎄, 잘 모르겠구나. 네게 두들겨 맞은 병사들이 앓는 것은 아니고?”

“감옥은 아니야. 분명히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유설이 코를 킁킁거리며 어딘 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네가 잘못 들은 것 같구나.”

“아니야. 피 냄새도 난다구.”

냄새까지 난다면 분명 뭔가가 있는 듯했다.

유진산도 궁금했기에 말없이 손녀를 뒤따랐다.

그렇게 걷길 잠시 후.

돌연 유설의 검지가 어느 전각의 담벼락을 가리켰다.

“저기 뒤에 누가 쓰러져 있어. 고수야.”

손녀의 입에서 고수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자신보다는 강하다는 얘기였다.

그런 고수가 개봉부의 담벼락 밑에 왜 쓰러져 있단 말인가.

“어서 앞장서거라.”

조손은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드디어 그곳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 자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유진산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안아 들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어서 정신 차리시게!”

왕사평의 호위 무관인 전충이었다.

개봉부의 제일 고수인 그가 이런 곳에 홀로 쓰러져 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관복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외상은 크게 없어 보였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이라면 안색이 흙빛이 되어 있다는 것뿐.

유설이 그의 손목에 진기를 흘려보내어 상세를 살펴보았다.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니 상세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가, 어떤 것 같아?”

“내상이 심해. 기혈이 전부 뒤틀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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