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수지타산이 안 맞아 (1)
조손은 쪼그려 앉아 전충을 살펴보고 있었다.
안색을 보아하니 몹시 위급해 보였다.
이자를 살려야 사건의 경위를 들을 수 있을 터.
유진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손녀에게 물었다.
“살릴 수 있겠어?”
“한번 시도해 볼게.”
그 순간 유설의 전신이 황금빛 기운에 휩싸였다.
화아아악-!!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휘광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세상에서 단 한 명밖에 익히지 못한 희대의 절세신공.
현장법사가 서역에서 목숨을 걸고 구해온 불문사자신공(佛門獅子神功)의 기운이었다.
장엄한 휘광이 전충의 손목으로 파도처럼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이 떨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유진산이 놀라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왜 이래?”
“할배, 이 아저씨 지금 내장이 다 꼬여있어.”
돌연 유설이 손목을 놓고는 양손을 슬쩍 내밀었다.
그러자 전충의 신형이 스스로 붕 떠오르며 가부좌를 틀었다.
“뭘 하려는 거야?”
“주변의 혈을 자극하면, 장기가 원래 자리로 돌아올지도 몰라.”
곧이어 고사리 같은 유설의 양손이 그의 등을 쉼 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타탁-! 투타타탁-!!
한 호흡에 수십 번이나 혈을 누르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지켜보던 유진산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추궁과혈?”
추궁과혈(推宮過穴)은 내상을 입은 상대의 혈을 때려 원래대로 돌려놓는 치료법이다.
심력의 소모는 물론 막대한 내공이 필요하여, 절대고수가 아니라면 시도조차 불가능하다.
놀라운 것은 자신은 이것에 대해 손녀에게 알려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통해 얻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진행하는 것이리라.
한참을 두들기던 유설이 오른손을 잡아당기며 호흡을 들이마셨다.
황금빛 기운이 오른손을 감싸며 기염을 토해냈다.
그 순간 손바닥이 바람을 가르며 등의 정중앙을 때렸다.
마지막 일타(一打)였다.
“쿨럭!!”
전충의 입에서 검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울혈(鬱血)을 뱉어낸 것이다.
그의 안색이 점차 돌아오는 것을 보니 효과가 있는 듯했다.
“성공했어?”
“응.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수고했다. 역시 우리 손녀 대단하구나!”
“히히. 뭐 별거 아니야.”
기력의 소모가 큰 추궁과혈을 끝내고도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다니.
배시시 웃는 손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든든했다. 적어도 같이 다니면 내상으로 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갈 곳을 잃었던 전충의 동공이 조금씩 초점을 잡았다.
흙빛이었던 안색도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보시게. 정신이 좀 드시는가?”
“……도, 도와주십시오.”
“상황을 알아야 도와줄 것이 아닌가. 도대체 궁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전충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유설이 옆에서 진기를 보충해주고 있었기에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지운전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놈이 찾아왔습니다.”
관료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중간 절차가 필요하다.
그 복잡한 과정을 기다리는 곳이 바로 지운전이었다.
“찾아왔다니? 누가?”
“도지휘사(都指揮使) 황소천이었습니다.”
“내 주워듣기로 도지휘사면 금군의 총사령관으로 알고 있네. 그런 거물이 무슨 일로?”
금군 중에서도 도성을 지키는 전전사(殿前司)의 수장이리라. 군부의 최고 사령관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나라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가 왜 왕사평을 찾아왔다는 말인가.
유진산은 진중한 얼굴로 전충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저희가 진행하고 있는 수사를 멈추고, 창룡대의 부대주를 석방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일에서 손을 떼라는 얘기이지요.”
유진산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까지 내뱉었다.
“설마 그놈까지 창룡대원이라고?”
전충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정창원의 수장이 부대주였으니, 그보다 높은 도지휘사라면 창룡대의 대주일 것입니다.”
나라의 정보기관인 정창원이 장악당했던 것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금군이라니? 그야말로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창룡대의 대장으로 짐작되는 놈을 찾았음에도 기쁘지가 않았다.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이미 그놈들에게 나라가 반쯤 먹힌 것 같구만. 그래서 뭐라고 답하였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대인께서도 감정의 골이 깊으셨던 터라, 타협할 생각이 없으셨으니까요.”
“시늉이라도 하지 그랬는가. 그런 거물이 정체를 드러낸 이유는 다급한 것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세.”
“어차피 곧 폐하를 알현할 상황이었기에 괜찮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걸 막으려고 직접 찾아온 것이 아닌가? 당연히 차선책도 준비해놓았겠지. 아무튼, 그 이후에는 어찌 되었나.”
전충은 생각만으로도 분하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르신이 우려하신 그대로였습니다. 놈은 일식경이 지난 후 다시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말이지요.”
“그렇겠지, 어떻게든 알현을 막아야 했으니까. 반역 혐의를 뒤집어씌워 무력으로 제압한 것이로군.”
“예. 제가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전충은 죄책감에 눈시울을 붉혔다.
금군의 총사령관이라면 엄청난 무공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놈의 친위대 또한 하나같이 날고 기는 고수들일 게 분명했다.
아무리 전충이 대단하다고 한들 혼자서는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리라.
“너무 자책하지 마시게. 그래도 자네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런데 그 몸으로 어찌 여기까지 도망쳐왔는가.”
“대인께서 어르신을 찾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유진산은 곤란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나라고 무슨 방도가 있겠나. 금군의 대장이라는데 말이야.”
개봉의 부윤인 왕사평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인물이었다.
군부의 최고 권력자인 그는 수만 명의 정예 병사를 통솔한다. 게다가 휘하에는 무시무시한 맹장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무림 전체와 맞서더라도 무서울 게 없는 자였다.
그때 갑자기 전충이 유진산 앞에 양쪽 무릎을 꿇었다.
“제 일평생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허, 거참…….”
“도와주신다면 제 명예를 걸고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개봉제일검이라는 별호까지 지닌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자존심까지 버리고 이렇게 부탁을 할 줄이야.
유진산은 마지 못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대인을 빼내 주십시오. 우선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이대로라면 왕사평은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할 터였다.
급한 대로 그것부터 막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대인을 탈출시킨다면 어찌 될 것 같은가. 오히려 죄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 일이 더 꼬이게 될걸세.”
“어르신이라면 다른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유진산은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머금었다. 전충의 말투와 표정에 확신이 묻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와도 은원이 있지만, 지금은 답이 없는 놈이네. 그 녀석만 잡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예. 저를 잡기 위해 도지휘사가 직접 다섯 명의 부하를 데리고 왔습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 화경에 이른 자들이었습니다.”
“음. 그랬으니 자네가 이 지경이 되었겠지. 그리고?”
“도지휘사는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무위를 짐작할 수가 없는 고수였습니다.”
최소한 자신보다는 월등히 강하다는 얘기이리라.
역시나 예상했던 우려와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손녀라도 단신으로 그들 전체와 싸운다는 것은 무리수일 터.
“무력으로 어찌해보겠다는 생각은 버려야겠군. 그럼 방법은 한 가지뿐이네.”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직접 그놈과 만나 협상을 해보겠네.”
“도지휘사가 순순히 응하겠습니까?”
유진산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할 수밖에 없을 걸세. 인질을 잡은 건 그놈뿐만이 아니니까.”
그 순간 전충의 눈이 번쩍 떠졌다. 죽어가던 그의 눈빛에 처음으로 희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룡대의 부대주 말입니까?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만, 어르신께서 폐인을 만들어놨는데 괜찮을지…….”
앞서서 유진산이 그자의 단전을 부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인질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관없네. 한 놈을 더 묶어서 주면 되니까.”
“예? 한 명을 더 준다니요?”
“자네 옆의 음괴가 싱싱한 놈으로 한 마리 더 잡았거든.”
전충이 고개를 슬쩍 돌려보자, 유설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제 그럼 저희가 더 유리하겠군요.”
한 시대에 만들어지는 창룡대의 인원은 고작 백 명에 불과하다.
그들 중 이 할 이상이 음양쌍괴의 손에 당했으니, 이젠 한 명 한 명이 소중할 터였다.
둘을 건네준다면, 왕 대인이 풀려나는 것은 문제없을 듯했다.
“허나, 인질 교환으로 끝내선 안 되겠지. 이런 식으로 또 당하지 않으려면 뭔가를 더 얻어내야 해.”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금군과 대립하면 저희는 버틸 수가 없을 테니…….”
“그렇겠지. 어쨌거나 일단 들어가시게. 시간적인 여유가 없으니까 말이네.”
누각이 높게 솟은 거대한 개봉부의 대문 안쪽.
지금 그곳엔 포두와 포쾌들이 모여 동요하고 있었다.
부윤의 반역 혐의가 확정된다면, 그의 부하들이라고 어찌 무사하겠는가.
전충이 힘찬 목소리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 모두 대기해!”
그의 외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가. 맞은편에 금군이 몰려왔는데 말이다.
쾅-! 쾅-! 쾅-!
“문 열어!!”
“어서 이 문을 열지 못할까!”
대문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모두가 손에 땀을 쥐고 있을 때였다.
총포두 장호가 헐레벌떡 뛰어와서 전충에게 포권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교위님.”
고개를 끄덕인 전충이 검집을 올리며 소리쳤다.
“문을 열고, 모두 좌우로 물러나라!”
겁에 질린 포쾌들이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문을 열라니. 이후에 벌어질 일이 두려운 것이 당연했다.
“예?”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냥 열었다가 저희를 공격하면 어떡해요?”
시간이 지체되자 전충이 내공을 실어 고함을 질렀다.
“시끄럽고, 빨리 열어!!”
상황이 이쯤 되자 그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문에 붙어 있던 포쾌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성문의 자물쇠인 관약(管鑰)을 잡아당겼다.
그그극-!!
관약이 빠지기 무섭게 개봉부의 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긱-!!!
열린 문틈 사이로 칼과 방패로 무장한 금군이 보였다. 바글바글한 그들의 머릿수는 끝이 보이질 않았다.
좌우로 비켜선 관원들은 참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사들이 문으로 진입하려는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여자아이의 콧노래가 들려왔다.
작은 음성이었지만, 모두가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대체 소리에 어느 정도의 내공이 실려야, 이러한 중압감을 뿜어낼 수 있단 말인가.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곤봉을 움켜쥔 유설이 하늘에서 발을 구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신선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듯 했다.
“저, 저거 뭐야?”
모두가 단번에 직감했다. 눈앞의 여자아이가 포쾌로 위장한 절세의 고수임을.
놀란 병사들과는 반대로 개봉부의 관원들은 전율했다.
“……와.”
“음, 음괴 대협이 오셨어.”
“……오오.”
모두의 놀람을 뒤로한 채 유설이 개봉부의 대문을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곤봉을 사선으로 내리깔며, 금군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오싹한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면서 말이다.
“환영합니다~ 한 번에 열 명씩~ 열 명씩 입장하는 겁니다~ 시원한 찜질~ 몽둥이찜질이 여러분을 기다려요~”
그 누구도 발을 떼는 자가 없었다.
모두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래 박자에 맞춰 어깨를 흔들거리던 유설이 돌연 우측으로 쓱 물러났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며 고함을 질렀다.
“모두 비켜주시오!!”
붉은 술이 장식된 투구를 눌러쓴 그자는 금군의 장교였다.
개봉부의 감옥에서 홀로 풀려난 것이다.
대문을 통과한 그는 병사들을 헤집으며 정신없이 달렸다.
그때 병사들을 지휘하던 어느 장수가 그의 어깨를 낚아채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는 다급하다는 얼굴로 궁성이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도지휘사께 급히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