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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80화 (180/238)

180화 수지타산이 안 맞아 (2)

개봉부를 출입하는 정문의 구조는 흡사 작은 성문과도 같았다.

비좁은 그곳에서 유설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금군으로선 진입할 방도가 없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빨리 돌파하란 말이야!”

지휘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병사들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비좁은 그곳을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진입하는 족족 병사들은 곤죽이 된 채로 튕겨 날아왔다.

곤봉에 맞아 실신할 것이 확실한데 누가 앞장서려 하겠는가.

이미 널브러진 병사들이 수십 명이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지휘관이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궁수, 전진배치!”

그의 지시와 함께 백여 명의 궁수가 앞으로 나와 시위를 당겼다.

끼이이익-!!

본디 궁수들은 먼 거리에서 곡사로 사격하고 물러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근거리에서 직사로 사격한다면 그 위력이 몇 배는 강해진다.

무림인들의 호신강기를 위협할 정도로.

“발사!!”

명령과 함께 화살들이 활대를 빠져나왔다.

파팟-! 파파파팟-!!

맹렬히 돌진하는 화살들이 곧이어 상대의 전신을 덮을 듯했다.

그런데도 유설은 눈 한 번 깜빡이질 않았다. 단지 왼손을 슬쩍 들어 올렸을 뿐.

그 순간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마치 무엇인가에 가로막힌 듯 화살들이 허공에서 정지하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던 장수가 그 모습에 움찔했다.

“저, 저럴 수가…….”

유설이 피식 웃으며 왼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멈춰 있던 화살이 한쪽으로 쏠리며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지켜보던 모두가 놀란 듯 동공을 부릅떴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저, 저걸 어떻게 상대해?”

병사들의 사기는 또다시 곤두박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육탄전뿐. 허나 비좁은 문을 막고 있는 유설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지휘 장수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교두 한 명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대장님. 조금 전, 자신을 무림맹원이라고 밝힌 자가 다가와서 전해주고 간 정보가 있습니다.”

“무슨 내용인데?”

“저자는 음괴라 불리는 무림의 대마두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당해낼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알면 지원군이라도 데려오라고 하지? 무림의 고수들 말이야.”

“그자 말로는 무림맹에서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라면 상부에 지원을 요청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아무리 따져봐도 이곳의 전력만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을 듯했다.

모두가 죽을 각오로 덤벼든다고 해도 말이다.

“치욕스럽지만 우리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을 듯하구나. 그러나 따로 지원을 요청할 필요는 없다.”

“지원군이 올 거라는 말씀인지요?”

“이미 지금쯤이면 오고 있을 거다. 최소한 금룡오장이 와야 뭐라도 시도해볼 수 있을 터인데…….”

금룡오장(金龍五將)은 금군에서 가장 뛰어난 다섯 명의 장수로 도지휘사인 황소천의 수족들이었다.

말끝을 흐린 장수가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대기하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길 일식경.

돌연 후미에서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

“도지휘사께서 직접 오셨다고?”

“금, 금룡오장도 모두 함께입니다!”

장수는 물론 모든 병사가 두 다리를 붙이고 왼쪽 가슴에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충(忠)!!!”

도착한 지원군은 고작 여섯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들의 등장은 천군만마보다 더한 위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선두는 은빛 갑주에 붉은 피풍의를 펄럭이는 인물이었다. 인상은 호랑이처럼 기개가 넘쳤으며, 걸음걸이에는 위엄이 가득했다.

금군의 총사령관이자 창룡대의 대주로 짐작되는 인물, 황소천이었다.

그의 뒤로 다섯 명의 장수가 보폭을 정확히 맞춰 걷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무림의 절대고수에 비견될 정도였다.

“모두 물러나.”

나직한 그의 한마디에 병사들이 황급히 좌우로 물러섰다.

황소천은 부하들과 함께 개봉부의 정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열 걸음을 남겨두고서야 그의 발이 멈추었다.

그 순간 숨 막히는 고요가 흘렀다.

병사들도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지켜보았다.

황소천과 음괴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마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눈싸움을 하는 듯했다.

어느 순간 고요를 깨고 황소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음괴로군. 과연 명성대로 기세가 대단하시구려.”

유설이 두 눈에 힘을 잔뜩 주며 물었다.

“싸울래요?”

다짜고짜 싸움부터 하자니. 질문이 황당한지 황소천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한 번 내저으며 답했다.

“나는 이 자리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그럼 따라와요.”

곤봉을 목 뒤에 턱 걸친 유설이 등을 돌렸다. 어딘가로 안내하려는 모양이었다.

황소천이 뒤를 슬쩍 바라보며 소리쳤다.

“나와 금룡오장만 진입한다! 나머지는 모두 밖에서 대기해!”

병사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소리쳤다.

“충!!!”

청심루(清心楼). 이곳은 개봉부에서 가장 높은 누각으로 관리들의 연회로 사용되는 장소였다.

평상시엔 시끌벅적했으나, 지금은 모든 곳이 텅 비어있었다.

일 층의 문이 열리며 유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데려왔어.”

내부에는 긴 탁상을 끼고 유진산이 홀로 앉아 있었다.

유진산이 손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수고했다. 어서 와서 앉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손녀를 옆에 앉혀 놓아야 했다.

그만큼 협상의 상대가 무시무시한 인물들이었으니까.

유설이 앉기 무섭게 일단의 무리가 차례로 들어왔다.

황소천과 다섯 명의 장수들이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탁상의 맞은편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잠시 후 황소천이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는 유진산을 바라보았다.

“자,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도대체 음양쌍괴가 무슨 원한으로 우리를 그렇게 못살게 구는지.”

“우리라……. 금군의 대장이 창룡대의 일원임을 시인한다는 얘기인가?”

“맞소. 내가 창룡대의 대주고, 내 뒤의 다섯 명 또한 일원들이오.”

이렇게 직설적으로 대답할 줄이야. 배짱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도지휘사나 되는 인물이 예상외로 말투가 점잖았다. 자신이 하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무엇인가 속셈이 있을 터. 조금 더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아직 그것까진 파악하지 못했나 보군. 내 가문의 일가족이 너희들에게 몰살을 당했다.”

“정확한 사연은 모르지만, 이해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단지 우리는 규정대로만 임무를 수행할 뿐이오.”

자신들도 시키는 대로 했다는 얘기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법.

유진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 이유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네. 어차피 연관된 자들은 하나도 살려줄 생각이 없으니까.”

황소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단지 허리춤의 검집을 슬쩍 움켜쥐었을 뿐이다.

“정 끝까지 해보겠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요. 적어도 당신은 무조건 죽일 자신이 있소.”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 또한 음괴의 손에 반드시 죽을 걸세.”

유설이 탁상 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바로 달려들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양측 모두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이대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양패구상은 불 보듯 뻔할 터.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황소천이 다시 검집에서 손을 놓았다.

“하지만 오늘은 협상하는 자리로 알고 있소만.”

그가 화두를 돌리자 냉각되었던 분위기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창룡대의 대주가 눈앞에 있었지만, 지금은 싸우기 위한 만남이 아니었다. 포로를 교환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유진산도 노기를 가라앉히며 본론을 꺼내었다.

“왕 대인에게 씌운 혐의를 없애준다면, 부대주를 바로 풀어주겠네.”

“보내온 전갈에는 한 명을 더 붙잡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군. 잡고 있다고 했지, 풀어준다고 하지는 않았네.”

황소천은 기가 찬다는 듯 잠시 말문을 잃었다.

잠시 후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원하는 것이 뭔지 말씀해 보시오.”

“앞으로 금군은 개봉부의 관원들을 해코지하지 않는다고 약조하게.”

“잘 알고 있지 않소? 개봉부에서 폐하를 알현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한 반응이었다. 왕사평이 폐하를 알현하여 창룡대에 관한 문제를 상소한다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 테니.

하지만 이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물론 이제 개봉부에서도 이 일에서 손을 떼야겠지. 그럼 기존처럼 우리와 창룡대의 전쟁만 이어가는 셈이겠군.”

황소천은 탁상 위로 깍지를 끼고 목소리를 좀 더 낮추었다.

“우리는 음양쌍괴와 싸우고 싶지 않소. 이쯤에서 은원을 끝냈으면 하오.”

“그럼 너희들의 그 미친 짓거리 때문에 죽은 우리 가족은?”

“당신들 또한 이미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주지 않았소? 그래도 부족하다면 말씀하시오. 내 선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뭐든 들어주겠소.”

창룡대의 대주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우선 의도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천하의 금군을 손에 쥐고서도 그렇게까지 회피하는 이유가 뭐지?”

“더는 창룡대의 손실을 용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이미 당신들 때문에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졌소.”

그가 휴전을 제안해왔지만, 가문의 비화를 이렇게 덮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가족들의 시신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렸으니까.

“너희들을 모두 찢어놓을 때까지 휴전 따위는 없다. 그래야 내 가족들이 저승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을 테지.”

황소천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창룡대에 대한 사냥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말씀이시오?”

“이미 말하지 않았나.”

“그럼 조금만 미뤄주시오. 천축의 침공이 임박했으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왜 그래야 하지?”

“우리 또한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나라의 장수들이오. 꼭 이 시점에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오?”

유진산은 코웃음을 쳤다. 그의 의도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라니, 그럴싸하게 잘도 포장하는군. 단지 새외무림과 중원무림의 싸움에 군부의 힘까지 동원하겠다는 속셈 아닌가?”

“그렇지 않소. 놈들의 정벌은 결코 무림에서만 그치지 않을 것이오. 막아내지 못한다면 중원의 모든 사람이 고통받게 될 것이오.”

그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넘기기엔 찜찜한 부분이 있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대비책도 없이 금군의 수뇌부를 몰살시켰다간, 나라에 큰 혼란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무고한 자들이 피해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현재로선 금군과 정면에서 맞서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들의 전력은 손녀에게도 어느 정도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손녀가 더욱 강해져야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그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휴전을 제안하는 것은 무림맹을 포함해서인가?”

“나는 무림맹에 아무런 권한이 없소. 창룡대에 한해서만 적대행위를 멈춰주시오.”

“그 말은 우리가 무림맹주와는 볼일을 봐도 된다는 얘기로군.”

무림맹주야말로 유가장의 멸문에 최종적으로 책임이 있는 인물이었다.

창룡대를 먼저 공격했던 이유도 그녀의 손발부터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복수의 길이 한결 수월해질 수도 있을 듯했다.

그때 황소천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다시 사그라졌다.

“그리하셔도 좋소. 할 수 있다면.”

현재로선 조금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을 보니 무엇인가를 더 얻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을 좀 많이 했지. 그런데 보상도 없이 제안을 수락하기엔 수지타산이 좀 맞질 않는군.”

황소천이 지친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정말이지 성격 참 깔끔하시구려. 원하는 걸 말씀해보시오.”

“……음.”

이놈들에게 무엇을 더 얻어낼 것이란 말인가.

유진산은 잠시 고민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느 정도 정적이 흘렀을 때였다.

돌연 손녀에게서 전음이 들려왔다.

- 용서해주는 거야?

- 저 고얀 놈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한 놈도 빠짐없이 대가를 치러야 해.

- 그럼 뭐야?

- 지금은 나라가 혼란에 빠질 수 있으니, 조금 미루는 것뿐이다. 당장 아쉬운 건 저놈들이니 뭐라도 좀 얻어내야겠지.

- 그럼 돈으로 달라고 하자.

- 음. 그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여비로 은자 열 냥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

갑자기 유설이 손가락 세 개를 앞으로 쭉 내뻗었다.

“은자 삼백 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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