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눈만 마주쳐도 인연이오 (2)
정파의 무림인들에게 가장 위험한 자들로 알려진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음양쌍괴(陰陽雙怪).
불과 지금으로부터 이 년 전, 종남파에 침입해 도사들을 농락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소림사에 잠입하여 난장판을 만든 것도 모자라, 장경각에서 무공 비급을 훔쳐 달아나는 등 악명이 자자했다.
어디 그뿐인가. 개방의 장로를 납치한 전적이 있으며, 아미파의 장로들을 몰살시키는 등 전설적인 소문은 끝이 없을 정도였다.
“음괴가 사는 것이니 맘껏들 드시게.”
탁상 위에는 각양각색의 음식이 수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양괴가 연신 술을 따라 주고 있었다.
여섯 명의 정파인들은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따라주는 대로 연거푸 들이켤 뿐.
“고, 고맙습니다.”
“정파와 사파의 분류가 무엇이 중요한가. 마음이 맞는다면 누구든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게지. 눈치 보지 말고 실컷들 마시게.”
술을 마시지 않는 유설은 정신없이 음식을 맛보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유진산은 정파의 무림인들에게 죽엽청만 계속 따라주었다. 가장 저렴한 술인데도, 주는 대로 훌쩍훌쩍 잘 받아먹는 모습이 흐뭇했기 때문이다.
술을 세 동이나 비웠지만, 금강불괴신공을 익힌 유진산은 취하고 싶어도 취할 수가 없는 몸이었다.
그러나 정파의 무림인들은 달랐다.
그들이 취기가 올라온 듯 보이자, 유진산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자네들과 같은 복장을 본 기억이 있네. 사문이 어디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사, 사문이요?”
그들은 쉽게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그 이유를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우리가 찾아가서 해코지라도 할까 두려운 게로군. 걱정할 것 없네. 그럴 의도였다면, 이토록 점잖게 물어보진 않았을 테니.”
여섯 명의 정파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가장 배분이 높아 보이는 자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저희는 진천문의 제자들인 진천육협(振天六俠)입니다.”
“그래, 진천문. 이제야 기억이 좀 나는군. 아마 거기 용대칠이라는 친구가 있지?”
“저희 사백조님을 어떻게 아십니까? 얼마 전에 별세하셨는데…….”
유진산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십여 년 전. 자신이 무림맹에서 활동했던 당시 같은 조에 소속되었던 인물이었다.
노병으로 죽은 모양이었다. 나이가 지긋했을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전 인연이 조금 있었을 뿐이네. 헌데 진천문의 제자들이 여긴 무슨 일인가.”
갑자기 진천육협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유진산은 그들이 입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저희는 강남색마(强男色魔)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강남색마? 이름만 들어도 못된 놈인 것 같구만.”
대화는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취기에 붉어진 그의 얼굴빛이 더욱 짙어졌다. 생각만 해도 분한 모양이었다.
“천하의 몹쓸 놈입니다. 여자라면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납치한 후 강간과 살인을 일삼는데, 그렇게 당한 여인들이 수백 명이나 됩니다.”
“허. 그것참 죽일 놈이로군.”
“게다가 얼마 전에는…… 저희 문파의 여제자도 당했습니다. 마지막 희생자가 이 근방에서 발견되어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사형제까지 당했으니, 문파 차원에서 발 벗고 나서는 게 당연했다.
유진산은 이해한다는 듯 그의 술잔을 다시 채워주며 물었다.
“인상착의는 어떤가. 혹시 모르니 기억해두기 위함이네.”
“그건…….”
그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유진산이 눈빛으로 재촉했다.
“사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얼굴을 본 자는 전부 죽임을 당했다고 하여…….”
유진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친구들이 있나. 인상착의도 모르면서 어찌 잡는다는 겐가?”
“우선은 무작정 흔적만 좇고 있었습니다. 이 근방에 있는 것은 분명 확실합니다.”
드넓은 강호에서 얼굴조차 모르는 자를 어떻게 추적해서 잡는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는 일말의 확률도 없어 보였다.
“이 근방에 있는 것을 확신한다면, 유인책이라도 써보게. 미인계를 사용한다든지.”
그 순간 진천육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유인이라니, 그것참 묘책입니다!”
“저희가 그런 방법을 왜 생각 못 했을까요?”
“역시 소문대로 간계가 대단하십니다.”
간계라는 말에 유진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대체 정파에서 자신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난 것이란 말인가.
한마디를 쏘아붙일까 망설이던 그는 이내 화를 억누르며, 술 동이를 들었다.
“고지식한 정파인들이 그런 생각을 어찌하겠나. 조금만 틀에서 벗어나면 좀 더 넓게 볼 수가 있는 법이네.”
진천문의 제자들은 어느새 경계심이 허물어져 있었다. 웃음까지 나올 정도로.
거기에는 달아오른 취기가 크게 작용했다.
“오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파인들은 모두 화가 가득하고, 호전적인 줄로만 알았어요.”
“이렇게 마음이 맞는 분이 사파에 계실 줄이야.”
눈앞의 진천육협이 자신을 사파인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굳이 해명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는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우리와 같이 식사를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네들은 좀 곤란하지 않겠는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음양쌍괴였다.
소문이라도 나게 된다면, 진천문이 사파와 내통하고 있다고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진천육협은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술잔부터 들었다.
처음과는 백팔십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술 한잔 마시는 건데 뭐 어떻습니까?”
“그리고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유진산도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비밀은 지켜주겠네. 우리야 소문이 어떻게 나든 신경 안 쓰지만, 젊은 친구들이 곤란해지면 안 되겠지.”
진천육협 중 절반은 취기 탓에 이미 동공이 반쯤 풀려 있었다.
그들이 실실 웃으며 혀가 꼬인 발음으로 대꾸했다.
“에이, 괜찮다니까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요, 뭘.”
하지만 어디에나 변수는 존재하는 법.
아니나 다를까. 묵묵히 음식을 집어 먹던 유설이 빵빵해진 얼굴로 입술을 움직였다.
“와떠요, 손님.”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음괴가 기(氣)의 흐름을 느꼈다면 확실할 것이다.
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했던 진천육협의 얼굴엔 긴장이 가득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찌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만약 손님이 무림인이라면? 그래서 오늘의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뒷감당을 어찌하겠는가.
그들은 술이 확 깨는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신경 쓸 것 없네. 우리는 그냥 진천문의 막내 제자들인 것으로 하지.”
유진산이 안심을 시켜주고 나서야 그들은 긴장이 탁 풀렸다.
비록 음양쌍괴의 인상착의가 유명하다곤 하나, 정파인들과 뒤섞여 있으면 의심받지 않을 터.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객잔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익-!
찾아온 손님은 단 한 명이었다.
회색 경장에 죽립을 깊게 눌러쓴 검객으로 무림인이 확실했다.
검집을 움켜쥔 왼손과 늘어트린 오른손은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는 자세였고, 전혀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거기에 의도적으로 기(氣)를 내부로 갈무리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유설에게는 한참 전에 감지되었지만, 유진산은 의도하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고수임이 틀림없었다.
그자는 묵직한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잠시 후 그가 객잔의 구석에 자리를 잡자, 점소이가 다가가 굽신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으로 준비해 드릴지요?”
“소면 한 그릇만 내어주시오.”
무거운 목소리로 내뱉은 한마디. 그것이 전부였다.
조금 전의 왁자지껄했던 객잔의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무림인이 온 이상 음양쌍괴의 정체를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유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면 한 그릇만 먹으면 배고프지 않아요? 여기 와서 우리랑 같이 먹어요.”
그자는 내키지 않는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손녀가 무안해졌기 때문일까? 유진산이 진천육협을 향해 슬쩍 눈치를 보냈다. 그러자 그들도 거들고 나섰다.
“형씨. 적적하게 혼자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한 잔 드쇼.”
“강호에서는 눈만 마주쳐도 인연이라 했소. 어서 오시오.”
“안 오면 우리가 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술에 취한 진천육협이었다.
그들이 끈질기게 설득하고 나오자, 그자도 못 이기는 척 조용히 다가왔다.
자리에 앉은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직이 말했다.
“저는 사운검법의 전승자인 위지성이라 합니다. 진천문의 대협들이시구려.”
“알아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제가 대사형인 천운필입니다.”
“예. 근데 저 아이들은……?”
천운필이 어색한 웃음으로 말했다.
“저희 사문의 막내 제자들입니다. 세상 경험 좀 시켜주려고 데리고 나왔습니다.”
“좀 이상하군요. 이미 심법을 익혔을 나이인데, 어찌 두 아이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건지요?”
이상할 정도로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천운필이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빈 술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아직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한잔 받으시지요, 대협.”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유진산은 손녀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 아가, 왜 합석하자고 그랬어? 모두가 불편해하지 않느냐.
- 가까이서 맡아 보려고.
- 뭐를?
- 저 아저씨 몸에서 분 냄새가 나.
- 분 냄새? 여자들이 얼굴에 바르는 그것 말이더냐.
- 응. 뭔가 수상하지 않아?
유진산은 코를 킁킁거렸지만,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 할애비는 안 나는데? 그리고 자기 마누라한테 묻어올 수도 있는 거잖느냐.
- 분 냄새가 두 종류야. 그럼 저 아저씨는 부인이 두 명이야?
분명 뭔가가 수상한 부분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유진산은 돌연 손녀의 얼굴이 점차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기분이 나쁠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유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더니 죽립을 쓴 인물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저씨, 왜 계속 날 힐끔힐끔 쳐다봐요?”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유진산은 묵묵히 지켜보았고, 진천육협은 긴장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감히 음괴가 하는 일에 참견할 수가 없었으니까.
자신을 위지성이라 소개한 그가 무거운 음성으로 답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구나.”
유설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위지성의 코앞에 멈추어서는 따지듯 소리쳤다.
“죽립에 있는 구멍으로 계속 나 쳐다봤잖아요!”
둘의 거리는 고작 반보도 되지 않았다.
위지성은 대답하지 않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어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하아. 정말이지…… 최고로군.”
곧이어 죽립 아래로 드러난 그의 입꼬리에서 한 줄기 침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마치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둔 짐승의 모습과도 같았다.
모두가 그 모습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할 찰나.
돌연 위지성의 오른팔이 유설의 허리를 뱀처럼 휘감았다.
덥석-!
유설을 낚아챈 그는 다짜고짜 문밖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문을 뚫고 나간 그는 전광석화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볼품없이 걸쳐진 유설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진천육협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 설마?”
“……저, 저 새끼가?”
“강남색마?”
만취한 그들로선 쫓아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벼락같은 경공이었다.
내공으로 취기를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시간이 좀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들이 우왕좌왕할 무렵. 오직 유진산만이 평온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가 천천히 술 동이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신경 쓰지 말고, 다들 앉으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