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눈만 마주쳐도 인연이오 (3)
강남색마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으흐흐. 최고야. 정말 최고를 잡았어!”
바람을 가르며 산속을 나아가는 그의 경공은 거침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듯했다.
그의 어깨에 매달린 유설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가 신이 나서 어깨 뒤로 물었다.
“아가야, 내가 왜 강남색마(强男色魔)라 불리는 줄 모르지? 곧 알게 될 게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유설의 눈빛이 조금 더 깊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앵두 같은 입술을 달싹이며 묵직한 말투로 되물었다.
“그럼 나는 누구인 것 같아요.”
“그거야 너는 진천문의…….”
돌연 강남색마는 말끝을 흐리며 두 눈을 부릅떴다.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제야 무엇인가 이상함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한 것이 있었다.
‘뭐지? 납치당하는 애가 왜 이렇게 차분해?’
그간 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여자를 납치해봤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하는 것이 정상이다. 최소한 어깨 위에서 떨어지려고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
그런데 마치 일부러 업혀 있는 것 같은 이 반응은 무어란 말인가.
설마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그때 그는 이어지는 아이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나도 곧 알게 해줄게요. 내가 누구인지.”
기껏해야 진천문의 막내제자였다.
자기가 뭐라고 이렇게 당당하게 반응하고 있단 말인가.
내공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아이에 불과하거늘.
설마 너무 무서워서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선 입이라도 닫아 버리고,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고 싶었다.
강남색마는 고민 끝에 오른손을 왼쪽 어깨 위로 뻗었다. 점혈을 하기 위해서였다.
“도착할 때까지 입 다물고 있거라.”
혈도 중에서도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아혈(啞穴)을 눌렀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게 재밌어요?”
마치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강남색마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혈도를 눌렀는데 말을 하다니? 설마 점혈이 빗나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어깨 위로 검지와 중지를 내뻗었다.
이번에는 짚이기만 해도 깊은 잠에 빠져드는 수혈(睡穴)이었다.
손끝으로 확실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있었다.
그는 이번엔 틀림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어깨 위에서 성난 여자아이의 음성을 듣기 전까지는.
“재밌냐구요!?”
경공을 펼치던 강남색마는 화들짝 놀라며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이번에도 점혈이 통하지를 않았다니?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전신의 모든 혈도가 타통되고, 기의 흐름이 자유로운 절대고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유설은 대꾸하지 않았다. 때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은신처도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출수한다면 모든 게 허사가 될 터.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겨우 참고 있었다.
한편 강남색마는 찜찜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특이체질이라도 되는 건가? 뭐 상관없겠지. 아니, 오히려 더 좋다!’
곧이어 그의 발걸음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폭이 일 장 정도 되는 제법 큰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는 강남색마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했다. 마치 미혼약에 취한 사람처럼.
그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아…….”
동굴의 깊숙한 곳에서 여인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안으로 진입하자 처참하게 망가진 두 명의 여인이 보였다.
무림인으로 보이는 여인은 벌벌 떨고 있었으며, 또 한 명은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어찌나 시달렸는지 몰골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강남색마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보, 보내주세요. 제, 제발…….”
강남색마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야지. 이제 네년은 필요가 없으니까.”
“정, 정말 저를 보내주실 거예요?”
그 순간 그의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보내준다니까? 지옥으로 말이야.”
강남색마가 오른손에 움켜쥔 검집을 우측 어깨 뒤로 잡아당겼다.
검집째로 내리쳐서 죽일 모양이었다.
그가 행동을 개시하려던 그때였다.
“죽었어.”
자신의 왼쪽 어깨에서 들려온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강남색마는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이번엔 또박또박 들려왔다.
“넌 이제 죽었다고.”
오싹한 한마디에 강남색마는 전신의 털이 곤두서버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분명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그때 무릎을 꿇고 있던 여인의 동공이 갑자기 흔들렸다.
“……음, 음괴?”
난데없이 음괴라니? 강남색마는 그녀가 죽기 싫어서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무림십대고수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사파의 지존이었다. 그런 음괴가 자신의 어깨 위에 업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게 무슨 개수작을. 곱게 죽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강남색마가 살기를 뿜어냈지만, 무릎 꿇은 여인은 그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의 어깨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음, 음괴 대협 맞죠? 창, 창술대회에서 봤어요.”
“맞아요. 어서 집에 갈 준비나 해요.”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강남색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검집을 꽉 움켜쥐었다.
“이것들이 나를 가지고 놀아? 어디 한번…….”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하니 벌리고야 말았다. 갑자기 어깨 위가 허전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납치해온 여자아이는 어느새 일 장의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도대체 언제 내려왔단 말인가. 움직임조차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지 곧 알게 해준다고 했지?”
자신의 가슴팍 밖에 오지 않는 아이였지만, 마치 눈앞에 거인(巨人)이 서 있는 듯했다.
강남색마는 가슴이 철렁해졌다.
‘그,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음괴를 업어왔을 리가 없어!’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이 말이 되지를 않았다.
설마 자신의 은닉처를 파악하려고 일부러 납치당한 척을 한 것인가?
압도적인 존재감. 그 앞에 강남색마는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 또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명색이 하남성의 북부 일대를 주름잡는 천하의 강남색마였다.
기회는 단 한 번뿐. 불시의 기습을 노려볼 생각이었다.
“네 이년!”
외마디 외침과 함께 그의 오른손이 재빨리 검집으로 향했다.
발검술(拔劍術). 극도의 쾌검으로 일격에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남색마의 검은 검집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손아귀가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찰나.
그의 가랑이 사이로 음괴의 발등이 솟구쳐 올랐다.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히 섬전같은 속도였다.
콰직-!!!
“끄어어억!!!”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고통이 하반신에서 느껴졌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의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이 날아들었다.
밤톨 같은 주먹이었지만, 바위를 산산조각낼 정도의 힘이 담긴 일격이었다.
꽈앙-!!
충격에 붕 떠오른 강남색마는 일 장을 날아가 동굴의 벽에 사정없이 부딪혔다.
“끄헉!”
피투성이가 된 그의 입안에는 이빨이 절반도 채 남질 않았다. 단 한 방에 우수수 뽑혀나간 것이다.
그러나 음괴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유설의 신형이 한줄기 빗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 순간 흉기처럼 접힌 무릎이 그의 안면을 찍어버렸다.
강남색마의 머리가 동굴의 외벽 속으로 한 치 가량이나 파고 들어가 있었다.
그는 정신을 잃었는지 온몸이 축 늘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모든 게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여인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어서 같이 나가요.”
사태를 수습한 유설은 그녀를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떨고 있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먼저 말을 꺼냈다.
“내 이름은 설이에요. 아줌마는요?”
“저, 저는 양가장의 양소희라고 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갑자기 유설이 멍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희……. 우리 엄마 이름이랑 똑같아…….”
유진산의 막내며느리이자, 유설의 어미 이름은 진소희였다.
비록 성은 달랐지만, 이름이 같았기 때문일까? 무엇인가 뜨거운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동시에 갑자기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요.”
“예……?”
유설은 다시 동굴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홀로 남겨진 양소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구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동굴 안에서 경쾌한 타격음과 처절한 비명이 쉴 새 없이 메아리쳐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반 각이 지난 후.
안에서 다시 걸어 나오는 유설의 손에는 피풍의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 두를래요? 동굴 안에서 찾았어요.”
외투 위에 두르는 천으로, 찢어진 옷을 가리기엔 충분했다.
유설은 쑥스럽게 피풍의를 건네었다.
그러고는 다시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나름의 기준으로 강남색마에게 응징을 가했지만, 죽이지는 못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그를 이대로 그냥 놔두고 돌아가기엔 뭔가 찜찜했다.
‘어떻게 하지? 왕 아저씨한테 데려가서 작두로 댕강……?’
하지만 언제 개봉성까지 다녀온단 말인가. 그러자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결론을 내린 유설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동굴의 천장을 향해 권강을 퍼붓기 시작했다.
콰쾅-! 콰콰콰쾅-!!!
현경이 펼치는 강화된 백보신권의 위력은 엄청났다.
동굴 입구는 순식간에 무너지며 함몰되어 버렸다.
단전까지 파괴된 그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빠져나올 수 없을 터.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죽을 때까지 반성하게 할 생각이었다.
유설은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는 듯 양손을 털었다.
“소희…… 언니.”
어느새 아줌마에서 언니로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부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색마에게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유설이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우, 우리 손 잡을래요?”
“아, 네. 그래요.”
둘은 동시에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유설의 얼굴에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따듯해……. 손이 따듯해요.”
사람의 손에서 체온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어리둥절한 양소희는 우측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음괴의 얼굴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순수한 웃음을.
조금 전의 강남색마를 때려잡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알 수 없는 포근한 기운에 양소희는 긴장이 탁 풀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건지요?”
“음. 우선 우리 할배한테 갈래요? 그리고 같이 집에 데려다줄게요.”
양소희는 단번에 직감했다. 음괴가 말하는 할배가 양괴를 지칭하는 것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창술대회의 준우승전에서 양가장의 제일고수인 양소천과 싸운 인물이 바로 그자였으니까.
“네, 좋아요.”
“히히. 그럼 손 꽉 잡아요.”
“새처럼 날아갈 거니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까마득히 보이는 지상의 풍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