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첫 번째 손님들 (1)
조손은 이틀 뒤에서야 패도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사이 문파의 확장 공사가 마무리된 듯했다. 부지가 넓어졌으며, 새로운 전각이나 연무장 등 처음 보는 구조물들도 보였다.
지나가는 곳마다 활기가 가득했다.
문도들의 무공 실력은 일취월장하고 있었으며, 아미산에서 탈출시킨 아이들은 금세 어른이 될 것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발전하는 패도문의 위세는 이제 정파의 구대문파에 비견될 정도였다.
“이런 식이면 패도문이 곧 천하제일문이 되겠구만.”
유진산의 옆에는 문주 백규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당치도 않소, 형님. 같은 섬서에 있는 화산파를 따라잡기에도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오.”
“하필이면 왜 화산파와 비교를 하는가. 거기에 무시무시한 놈이 한 명 있다고 들었네. 이름이 청…… 뭐였더라?”
유진산은 갑자기 그자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백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맞소. 화산파에 앞뒤 안 가리는 광견 같은 녀석이 한 명 있는데, 꽤 유명하다오. 어쨌거나 목표는 크게 잡으라고 하지 않으셨수?”
“음, 뭐 그랬었지. 그래도 지금의 패도문 정도면 종남파 정도는 쉽게 잡겠는걸?”
종남파에 대한 비교는 백규도 부인하지 않았다.
구대문파에서도 말단인 그들 정도는 확실하게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모두 다 형님 덕분이오. 그리고 저 예쁜 조카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진작에 망했을 거요.”
“음, 아까부터 안 보이더니 저기에 있었구만.”
유진산의 시선이 우측으로 향했다.
전각의 지붕 위로 파계승 정혜를 쫓아다니며 장난치는 손녀의 모습이 보였다.
“오, 오지 마!”
“히히히. 거기 서요!”
허공을 밟으며 하늘을 휙휙 날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백규가 털털하게 웃었다.
“하하. 저분을 저렇게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설이밖에 없을 거요. 우리 애들은 무서워서 피해 다니기 바쁜데 말이오.”
“걔들이 정상인 게지. 나도 저 땡중은 무서워.”
정혜는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이지만, 정신이 온전치 않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다.
유진산도 그를 상대하다가 고전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를 힘으로 누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유설이었다.
“그런데 형님. 아까 듣자 하니 창룡대와는 잠시 휴전하기로 했다는 게 사실이오?”
“맞네. 무림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것참 좋은 소식이오. 만약 놈들이 전면전으로 나왔다면, 우리도 버티기가 힘들었을 텐데 말이오.”
“처음부터 내 목표는 최종 명령권자인 무림맹주였네. 그녀의 손발이었던 창룡대가 알아서 빠져 준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
“그들이 왜 그렇게 순순히 물러난 것입니까? 설마 맹주와 갈라서기라도 한 것일까요?”
“듣기로는 천축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하더군. 애초에 창룡대는 그들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하니, 지금은 무림의 일에 신경 쓸 수가 없겠지.”
유진산과 백규의 걸음이 화원을 지나고 있었다.
인기척이 없어지자 백규가 나직이 말했다.
“그럼 그 전에 맹주년의 멱을 따야 하지 않겠소? 날짜만 잡으시오. 그 자리에 이 아우도 함께할 것이니.”
“역시 든든하구만. 허나 창룡대가 이렇게 빠지는 것은 믿고 있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세. 모든 걸 확실히 하고 움직여야 하네.”
“우리 설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오? 사도련에서 힘을 보태고, 정혜스님도 함께 돕는다면 당장 쳐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유진산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쉽게 일이 풀릴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보기로 맹주의 무공이 몇 년 사이 급격히 성장했다고 했네. 혹시라도 그녀가 현경에 도달했다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어.”
쌍사신마를 통해 알아낸 정보였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맹주에게 당했을 때의 압박감이 음괴와 비슷했다고 했다.
만에 하나 우려가 사실이라면 손녀가 위험할 수도 있을 터. 모든 걸 확실하게 해둬야 했다.
“허점이 없는 것을 보니 역시 형님이오. 우선 련주님께 보고하여 맹주년에 대해 좀 알아보겠소. 무림맹의 쥐새끼들이라면 우리 일이기도 하니. ”
“뭐 그리해준다면 고맙고.”
백규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화두를 돌려 물었다.
“근데 말이오, 형님. 아까 설이한테 들었는데, 따로 거처를 마련하신다고 하셨소?”
“맞네. 그간 너무나도 오래 떠돌아다녔지.”
백규가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패도문이 형님 집이라 생각하시면 되지 않소? 우리 사이에 불편한 게 있는 건 아닐 테고.”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우리 손녀가 한적한 곳에 자기만의 공간이 갖고 싶다고 하는데.”
“음. 그럼 이해할 수 있소. 근데 위치는 정하신 거요?”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기왕이면 호현 근처로.”
“그럼 잠깐 기다려 보시오. 우리 애들 중에서 그쪽 방면으로 전문가가 있으니까.”
집을 알아보고 매매하는 일은 아주 귀찮고 고된 일이다.
그것을 위임할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백규가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사자후를 토해냈다.
“임전세!!!”
백규의 외침이 패도문의 장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경공을 펼쳐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백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모았다.
“부르셨습니까, 문주님.”
유진산도 얼굴을 잘 아는 문도였다.
기억하기로 사교성이 많고, 일 처리가 빨라 문파의 행정 일을 돕는 녀석이었다.
백규가 그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어르신이 근방에 장원을 매입하려고 하시는데,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시장에 나온 호현의 매물들은 제가 다 꿰차고 있습니다. 보유하신 자금과 원하는 구조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유진산이 임전세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자금은 은자 삼백 냥. 연무장과 텃밭을 꾸릴 수 있을 정도의 크기면 좋겠군.”
잠시 고민하던 임전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조금 어렵겠습니다. 최근 이 동네로 사파 세력이 몰려들면서 시세가 부쩍 올랐거든요.”
호현이 사파의 성지로서 입지가 굳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음양쌍괴의 활약이 있었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 유진산은 괜찮다는 듯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할 수 없겠구만. 자금을 좀 더 모아서 다시 부탁하겠네.”
그때 백규가 임전세의 어깨를 턱 붙잡으며 말했다.
“가격이 얼마든 일단 알아봐. 부족한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최소한 은자 오백 냥은 있어야 할 텐데요.”
“신경 쓰지 말고 알아보라니까.”
부족한 자금은 은자 이백 냥.
최근 패도문도 부지 확장으로 많은 자금을 쓴 것을 알고 있는 유진산이었다.
그들이 이만큼의 자금을 부담하기엔 큰 부담이 될 터.
무턱대고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우의 마음만 받겠네. 급할 것도 없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마시게.”
무림고수들이 자금을 모으는 방법은 다양하다.
호위 의뢰를 받는 경우가 가장 흔하며, 수배범을 잡아 현상금을 노리거나 용병이 될 수도 있다.
하물며 무림에서 유명한 음양쌍괴라면 은자 이백 냥은 쉽게 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그때.
돌연 임전세가 손뼉을 부딪치며 소리쳤다.
“아! 그러고 보니 아주 싸게 파는 장원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 외곽에 있긴 한데, 은자 삼백 냥이면 충분히 살 수 있어요.”
백규가 장하다는 표정으로 눈빛을 빛냈다.
“그래, 너라면 알고 있을 줄 알았다. 매물은 괜찮은 거지?”
“예. 그렇긴 한데, 외진 곳이라 정파로부터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신경 쓰지 마. 형님을 귀찮게 구는 쥐새끼들은 내가 다 때려죽일 테니까. 다른 문제는 없어?”
잠시 머뭇거리던 임전세가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한 가지 찜찜한 게 있긴 한데…… 소문이 조금 안 좋아요.”
“무슨 소문?”
“거기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사람들이 꽤 많았대요. 그래서인지 지금껏 한 달 이상 거주한 주인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백규의 대머리에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너 이 새끼, 지금 우리 형님한테 흉가를 소개해주려고 한 거야?”
“죄, 죄송합니다, 문주님.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유진산이 한 손으로 백규를 말리며 말했다.
“뭐 어떤가. 가격만 좋으면 그만이지. 나는 그런 미신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이네. 그곳으로 소개해주게나.”
“그래도 형님. 뭐든지 싸게 파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오. 다시 한번 생각해보슈.”
“우리 가문은 대가 세서 어지간한 기운은 그냥 누르고 살 수 있네. 하물며 일반인도 아니고, 무림인들이 무슨 해코지를 걱정하는가.”
유진산이 이렇게 나오자 백규도 더는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럼 따로 도와줄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해 주시오.”
“뭐가 필요하겠는가. 그냥 내일 저 친구나 잠시 빌리겠네.”
“알겠소, 형님.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면 그냥 돌아오슈. 내 다른 방법을 찾아볼 테니.”
조손은 손을 맞잡고 매물을 보러 가고 있었다.
유설은 벌써 신이 나는지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냐?”
“응, 할배! 우리도 이제 집이 생기는 거야~”
“그래. 앞으로 어디 가서 집 없다고 놀림 받을 일은 없겠구나.”
어디 그뿐인가. 이제부터는 봇짐을 매고 유랑생활을 하는 것도 끝이었다.
처음으로 집을 구매한다는 생각에 유설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전세 삼촌~ 우리 언제 도착해?”
임전세는 유설이 아기 때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데 어색함이 없을 정도로.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던 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응, 거의 다 왔어. 앞으로 일각이면 도착할 거야.”
“궁금해~ 궁금해~”
조손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 걷고 있었다.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드디어 목적지가 나왔다.
“자, 여기다. 설이 마음에 드는지 한번…….”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유설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쭉 둘러보고는 장원의 대문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와아~ 할배, 여기 정말 최고야.”
유진산도 마음에 드는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직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주변 경관부터가 일품이었다.
장원의 좌측으로는 맑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고, 뒤쪽으로는 알록달록한 산세가 멋스러워 보였다.
“그래, 어디 내부도 한번 살펴보자꾸나.”
내부로 들어서자 넓은 마당이 나왔다.
한쪽에는 연못과 함께 기름진 토양이 깔려 있었다. 차후 화원으로 꾸며도 될 정도로 상태가 괜찮았다.
삼 층 구조의 전각이 중심을 잡고 있었으며, 창고와 전각 등의 구조물들도 보였다.
측면으로 이동하자, 연무장으로 사용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중심부에 단상과 함께 기이한 형상의 석상이 있었지만, 제거하면 그뿐.
“저건 뭐지? 날개 달린 염소 석상은 처음 보는군.”
“저도 잘 모르겠지만, 뭔가 의식으로 사용했던 장소인가 봅니다. 저것만 치우고 연무장으로 쓰셔도 되겠습니다, 어르신.”
“음. 그게 좋겠구만.”
장원의 뒤편에는 텃밭으로 써도 될 정도로 기름진 토양이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이었다.
전각의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자 전 주인이 놓고 간 가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부분 새것처럼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전 주인이 급하게 이사 가느라 그냥 놔뒀답니다. 제가 물어보니 그냥 쓰셔도 된다고 하네요.”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유진산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 참 횡재했구만. 모든 게 다 있으니, 그냥 들어와서 살아도 되겠어.”
“예. 외진 곳이란 것만 빼면, 살기에 정말 좋은 것 같아요.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하면 반값도 안 되는 수준이고.”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둘은 장원의 내부를 모두 살펴본 후 다시 앞마당으로 나왔다.
유설까지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자, 임전세가 양손을 모으고 물었다.
“어떤 것 같습니까?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매물을 알아보겠습니다.”
어차피 현재의 자금으로 다른 곳은 무리였다.
유진산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지만, 먼저 손녀의 의사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가, 어때? 별로 마음에 안 들면 얘기하거라.”
유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나는 이미 결정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