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자네만 믿겠네 (1)
패도문으로 갔던 유진산은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돌아왔다.
장원의 입구로 들어서기 무섭게 손녀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유설이 따지듯이 물어왔다.
그간 말도 없이 손녀를 밤새 혼자 놔둔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었기에 괜찮을 줄 알았으나,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많이 늦었지? 백규 삼촌하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어젯밤 유진산은 임전세와 함께 문주 백규를 만났다.
잠시 대화만 나누고 올 생각이었으나, 그에게 붙잡혀 밤새 대작 상대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때 유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내 간식은?”
그러고 보니 어제 나가기 전에 손녀가 간식을 부탁했었다.
하지만 간식부터 찾는 모습이 괘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밤새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 녀석이 할애비 걱정은 안 하고, 간식부터 찾아?”
“계속 기다렸단 말이야. 안 사 왔어?”
“간식은 무슨 간식? 예쁜 짓을 해야 사다 주지.”
유설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거짓말~”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던 유설이 할아버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품속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놓거라! 이게 어디서 할애비의 옷을 뒤져?”
유진산은 손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도저히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곧이어 숨겨두었던 간식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어젯밤 백규와 술자리를 하면서 따로 챙겨놓은 주전부리들이었다.
종이에 곱게 쌓인 간식을 획득한 유설은 뛸 듯이 기뻐했다.
“히히히.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눈치가 아주 귀신이로구나. 애들은 아직 있어?”
“응. 밥 먹고 간대. 내가 맛있는 요리를 해줄 거야.”
“이상한 거 시도하지 말고, 기존에 성공한 것으로 만들어 주거라. 그리고 어젯밤에 별일은 없었지?”
“응, 아무 일도 없었어. 왜?”
유진산은 안도의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할애비는 텃밭에 있을 테니, 애들 가면 그리로 오너라.”
고개를 끄덕인 유설은 간식을 들고 다시 전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진산은 홀로 뒷마당을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날도 샜으니 파종 작업이나 해야겠구나.’
무림인들은 내공으로 어느 정도 수면을 조절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어젯밤 한숨도 자지 않았음에도 전혀 피곤하질 않았다.
잠시 후 유진산의 시야에 작은 항아리가 들어왔다.
거기엔 텃밭에 심을 작물의 씨앗들을 모아놓았었다.
곧이어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항아리의 뚜껑을 잡았다.
“오늘은 우리 설이가 좋아하는 호박과 가지를 심어야겠…….”
유진산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 벌렸다.
달라진 항아리의 내부 모습 때문이었다.
그의 두 눈은 쉴 새 없이 끔뻑여댔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작물의 씨앗이 전부 썩어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안에는 벌레가 가득했다.
혐오스러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이 몰래 침입하여 장난이라도 쳐놓은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유설에게 바로 붙잡혔을 테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유진산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팔짱을 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물리적으로는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무엇이든 어서 빨리 해결해야 할 터인데.’
갈 길이 멀거늘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애초의 계획은 텃밭까지만 꾸며놓고, 무공 수련에만 매진하는 것이었다. 이후 정파의 정점에 있는 무림맹주를 압박하며 은원을 정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상한 것에 발목을 잡혀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어디 한번 내 눈으로 지켜봐야겠다.’
오기가 생긴 유진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다시 씨앗을 구매해온 유진산은 묵묵히 지켜보았다.
항아리는 어제와 같은 위치에 올려두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뚜껑을 열어 두었다는 것이다.
‘멀쩡하던 씨앗들이 하루 만에 썩었으니, 지켜보면 뭔가 변화가 나타나겠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지켜보길 두 시진 째.
새로 구매한 씨앗들은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심히 지켜보던 유진산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엇인가가 머릿속에서 번뜩였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유진산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근처에는 풀이 한 포기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숲이 우거진 담벼락 밖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어째서 이 집에는 식물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항아리를 계속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조금 전에 친구들을 바래다준다고 나갔던 손녀였다.
유진산은 항아리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패도문까지 배웅한다더니, 왜 벌써 돌아왔어?”
유설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엉뚱한 반문을 해왔다.
“그렇게 쳐다본다고 그게 변할 것 같아?”
손녀의 목소리는 분명했지만, 말투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씨앗에 대한 문제는 아직 얘기하지 않았었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든 유진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보았다.
유진산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등 뒤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조금 전의 목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환청을 들었다고?’
감각이 발달한 무림고수에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손녀가 숨어서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가. 장난치지 말고 어서 나오너라. 할애비 화내기 전에.”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면 바로 나왔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주변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유진산은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멍한 얼굴로 장원의 대문이 있는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길 일각쯤 지났을 때였다.
맞은편의 담벼락에서 한줄기 빛살이 매처럼 날아들었다.
하늘을 밟고 다가오는 인영의 정체는 유설이 분명했다.
“방금 그쪽에 숨어서 할애비한테 장난친 거 맞지?”
“으잉?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지금 왔어.”
표정을 보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유설은 장난을 칠 때 웃음을 참지 못하여 금세 티가 나기 때문이다.
“별일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할배 안색이 이상해. 무슨 일 있어?”
자세한 얘기를 해봐야 걱정만 시킬 터.
잠시 고민하던 유진산은 손녀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 만호 아저씨 어디 사는지 기억나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무엇이든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어먹지 않는 선음지체의 체질이었으니까.
“응. 근데 왜?”
유진산은 준비해두었던 부적 뭉치를 손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도대체 이것들이 뭔지, 가서 물어보고 오너라.”
기억하기로 만호는 아주 용한 무속인이었다.
과거에 그는 아들이 죽은 위치를 정확히 짚어내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적어준 두 글자를 조합하여 정성 성(誠)을 만들 수 있었으며, 그것으로 사천성의 현자인 사마현을 설득할 수가 있었다.
아마도 만호라면 뭔가 알 수 있을 듯했다.
“나 혼자?”
목적지는 섬서성과 사천성의 경계인 한수강 이남의 망공산 부근이었다.
유진산이 같이 이동하면 아무리 빨라도 하루는 족히 걸릴 것이다.
하지만 손녀의 속도라면 두 시진이면 충분할 터.
“같이 가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느냐. 할애비는 정리할 게 좀 있으니, 금방 날아갔다가 와.”
“알았어. 근데 만호 아저씨도 우리 집에 초대하면 안 돼? 구경시켜주고 싶어.”
안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직접 와서 봐주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가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만호는 비록 무속인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무공을 익힌 인물이다.
그의 경공 속도라면 오는 데 최소 이틀은 걸릴 터였다.
“가까운 곳도 아닌데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억지로 부탁하진 말고. 바쁘다면 그냥 돌아와.”
“응. 물어보고 싫다면 그냥 올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설의 모습이 믿음직해 보였다.
아기였던 때가 어제 같았거늘, 벌써 이러한 심부름까지 맡길 수 있을 정도가 되다니.
마음이 뿌듯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손녀가 벌써 다 컸구나. 조심히 잘 다녀오너라.”
유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할아버지의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할배도 집 잘 지키고 있어.”
상황이 뭔가 어색했지만, 유진산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손녀는 간단한 봇짐을 챙기고는 지체하지 않고 출발했다.
그리고 홀로 남게 된 유진산은 여전히 씨앗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도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답이 없겠군.’
어차피 손녀가 돌아오게 되면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터.
굳이 이렇게까지 무리를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그때였다.
【너 혼자 남았네. 드.디.어.】
어느 여인의 기괴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느릿하게 들려왔다.
분명 전음 같은 것은 아니었다.
유진산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음산한 바람만 하염없이 불어댈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갑자기 그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생각을 해보니 자신이 겁먹을 이유는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사스러운 년이 감히 어디서 장난을 치는 게냐! 어서 썩 나오지 못할까!”
명색이 무림고수였다. 상대가 사람이든 귀신이든 나타나기만 하면 때려눕힐 작정이었다.
하지만 더는 아무런 이상 현상도 나타나질 않았다.
날이 점차 어두워지며 음산함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넓은 장원에 혼자 있으려니 적막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바퀴를 쓱 둘러보던 유진산은 처소로 들어와 침상에 몸을 눕혔다. 자신의 애병(愛兵)인 용살창을 머리맡에 세워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호 녀석과 함께 오는 모양이군.’
그는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손녀 생각에 잠겨있었다.
단순히 대화만 나누고 왔다면 충분히 돌아올 시간이었다.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만호를 동행하고 오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의 생각은 다시 조금 전 자신의 머릿속에 들렸던 말에 머물러 있었다.
‘……드디어 혼자라니? 어떤 괘씸한 것이 날 노리고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유설과 함께 있을 때는 이상한 현상이 한 번도 없었다.
우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오직 자신이 혼자 있을 때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틀 후면 알게 될 터.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있던 유진산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어젯밤 백규와 대작을 하느라 잠을 안 잤기에 잠이 솔솔 오고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꿈속으로 접어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컥!”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온 유진산은 비명을 토해냈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침상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팔다리는 거대한 바위 밑에 깔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힘겹게 눈을 떠 보니 눈처럼 흰 손목이 보였다.
목에서부터 발끝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손아귀가 자신의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떨쳐내기는커녕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도대체 이게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내공을 써 봐도 요지부동이었다.
지금껏 이토록 무기력하게 당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진산의 두 눈에는 핏대가 곤두섰으며, 온몸이 서서히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돌연 어딘가에서 뿜어진 사자후가 그의 귓가를 진동시켰다.
“할배애애애!!!”
무지막지한 내공이 담긴 유설의 사자후였다.
장원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아주 먼 거리에서 날린 음파인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진산은 다시 한번 기분 나쁜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아깝다. 데려갈 수 있었는데.】
그를 압박하던 허연 손들은 연기처럼 단번에 사그라졌다.
동시에 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어르신!”
만호의 목소리였다.
벌써 도착했다니. 아마도 유설이 허공에서 업고 날아온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