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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91화 (191/238)

191화 자네만 믿겠네 (3)

정확한 상황은 알 수는 없었으나, 석관 안에 든 사악한 것이 원흉인 듯했다.

만호의 숨이 넘어가기 전에 어서 뭐라도 해야 할 터.

법검을 움켜쥔 유진산은 오른발에 내력을 실어서 관뚜껑을 걷어찼다.

뚜껑이 날아가며 내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골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믿을 수 없게도 석관의 내부엔 시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것도 부패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도복이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짐작하건대 아마도 백영교의 교주인 듯했다.

“빨리 찔러, 할배.”

등 뒤에서 유설이 재촉했다.

어차피 시체가 아니던가. 그저 법검으로 한 번 눌러 주면 그뿐이었다.

유진산은 검이 부러지지 않도록 내기로 감쌌다. 관통시킬 작정이었다.

머리 위로 치켜세운 법검의 끝이 아래를 향하는 그때.

돌연 등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안 돼! 멈춰라!!”

눈이 뒤집힌 만호가 거품을 물며 소리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에게 빙의한 영적인 존재이리라.

유진산은 효과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발악하는 것을 보니, 확실하게 찔러 줘야겠구나.”

“안, 안 된다, 이놈!!”

“싸가지없이 어른한테 반말이나 하고 말이야. 당장 우리 집에서 꺼지거라.”

다시 시선을 돌리고는 법검을 찌르려고 하는 그때였다.

“멈추십시오, 어르신!”

만호의 말투가 또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분명 정상적인 말투였다.

그사이 빙의가 풀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눈동자까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 만호가 가까이 다가와서 어깨를 붙잡았다.

“어서 제게 돌려주십시오. 절대 찌르면 안 됩니다!”

그가 법검을 빼앗으려 했지만, 순순히 넘겨줄 유진산이 아니었다.

아무리 신체적으로 우월하다고 한들, 만호가 유진산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유진산이 손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서 제압하거라. 사악한 것이 연기하는 게다.”

“우리를 속이고 있다고?”

“그래, 지금 이놈은 만호가 아니야!”

만호가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유설의 행동이 한 발 빨랐다.

“미안해요, 아저씨.”

이미 만호의 복부에는 유설의 주먹이 쑤셔 박혀 있었다.

그는 온몸에 힘이 풀리는지 그대로 무릎을 꿇어 버렸다.

이제야 유진산의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법검으로 관에 있는 시체의 복부를 사정없이 찔러버렸다.

다시 검을 빼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상대로 피는 한 방울도 나질 않았지만, 관통된 구멍에서 희뿌연 연기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악귀의 영혼이 소멸되는 과정일까? 꽤 그럴싸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조손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됐어, 할배.”

“음. 다 끝난 것 같구나. 이렇게 간단했던 것을…….”

유진산과 유설이 서로 자축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뒤에서 자포자기한 만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난 것은 우리입니다. 이제 큰일 났습니다.”

악령을 몰아냈으니, 이제 만호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터.

유진산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에게 법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네. 자네가 빙의된 사이 우리가 다 해결했어.”

이상하게도 만호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 보이질 않았다.

아니 마치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자의 영혼이 제 몸에 들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헌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백영교는 이곳에서 강령술을 진행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오해였습니다.”

유진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네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겐가. 집 곳곳에 흔적들이 남아 있었거늘.”

“그들은 사악한 존재를 막는 의식을 했던 것입니다.”

“사악한 존재라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주시게.”

“악귀(惡鬼)보다 더욱 높은 존재…… 악마(惡魔)가 이곳에 봉인되어 있습니다.”

악마든 뭐든 유진산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뭔가가 보이기는커녕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곧이어 그가 검지로 관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도대체 저것은 뭔가.”

만호는 호흡을 고르고는 참담한 얼굴로 답했다.

“의식 도중에 뭔가가 잘못되었고, 그 여파로 교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교주는 자신을 희생하여 죽어서까지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내막이 전혀 달랐다.

의문이 많았지만, 진실은 오직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 나한테 해코지를 했던 것들은?”

“입구를 지키기 위해 쫓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가지 않으면 죽여서라도 그리 했겠지요…….”

잡귀들이 자신을 해하려 했었다니.

목적이 무엇이든 괘씸한 녀석들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교주의 시신을 찌른 것에 죄책감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헌데 그 입구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관을 한번 치워 보십시오.”

유진산이 턱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유설이 손바닥으로 관의 모퉁이를 툭 건드렸다.

슬쩍 친 것에 불과했지만 현경의 내공이 실린 손짓이었다.

무거운 석관은 퉁겨지듯이 일 장을 미끄러졌다.

놀랍게도 관이 있던 바닥에는 기괴한 문양과 함께 구멍이 있었다.

사람 한 명 정도가 통과할 수 있는 너비였다.

그리고 육안으로는 깊이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였다.

“이 구멍인가? 그냥 막아버리면 될 것을 뭘 이렇게까지 했는지 모르겠군.”

“심연의 통로는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를 봉인하지 않는 이상…….”

그때 유설이 돌멩이 하나를 구멍에 던져 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질 않자, 유진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때? 소리가 들려? 할애비는 안 들리는구나.”

“……아니. 나도 못 들었어.”

마음만 먹는다면 십 리 밖의 새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손녀였다.

그럼 도대체 어느 정도의 깊이란 말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유진산과 유설의 고개가 만호를 향해 휙 돌아갔다.

돌연 그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경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 오고 있습니다!”

“오다니? 뭐가 말인가?”

“그, 그 사악한 존재가…….”

만호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반면에 조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구멍에서 뭔가가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휘이이익-!

심연의 구덩이에서 검은 연기가 돌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저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좋지 않은 기운인 것은 확실했다.

지켜보던 유설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맹렬하게 쏘아진 백보신권의 권풍이 검은 연기를 저항 없이 통과해 버렸다.

쩌어엉-!!!

권풍은 애꿎은 맞은편의 벽면에 주먹 자국만 만들어냈다.

무공이 전혀 통하질 않는다니? 그렇다면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소용돌이치던 연기는 곧 교주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진산이 만들어낸 신체의 구멍으로 단번에 스며들어 버렸다.

“어서 물러서십시오!”

만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에 누워 있던 교주의 시신이 벌떡 일으켜졌다.

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를 치켜뜨는 그 순간, 모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설은 말까지 더듬으며 뒷걸음질 쳤다.

“귀, 귀신 들어갔어…….”

조손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 사이. 법검을 움켜쥔 만호가 돌진을 시도했다.

호기롭게 달려든 그는 교주의 심장을 향해 법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이 닿기도 전에 놈의 손등이 만호의 뺨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였다. 게다가 바위처럼 무거운 파괴력까지.

따귀를 맞은 만호는 일 장을 날아 볼품없이 널브러졌다.

만호는 미동조차 없었다.

다행히 기(氣)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기절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때. 교주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유진산을 향했다.

놈과 시선을 마주친 그는 전신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그 순간 교주의 입이 찢어질 듯 쩍 벌어지며 알 수 없는 비명을 토해냈다.

“크에에엑!”

마치 손톱으로 쇠를 긁는 것처럼 기분 나쁜 괴성이었다.

유진산은 무서워하는 손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두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래도 이제는 물리적인 힘이 통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오히려 잘되었다.’

무공이 통하는 상대라면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힘으로 때려잡으면 그뿐.

유진산과 교주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몸을 날렸다.

교주의 손바닥이 유진산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였다.

그의 몸이 넘어질 듯 휘청거렸으나, 만호처럼 날아가지는 않았다.

노련한 유진산은 두 발에 힘을 주며 겨우 몸을 지탱했다.

끼이익-!

‘내가 속도에서 밀렸다고?’

게다가 가공스러운 힘까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만약 금강불괴신공이 아니었다면 만호처럼 기절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창이라도 가지고 내려올 것을.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마주 보고 있던 교주가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

등골이 서늘해진 유진산은 반사적으로 보법을 밟았다.

상대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으니, 회피부터 개시할 수밖에.

그의 신형이 바람을 일으키며 기이한 각도로 꺾이기 시작했다.

가문의 보법인 선풍보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어디선가 손아귀가 날아들었다.

“컥!”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놈이 보법의 이동 경로를 간파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목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발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대로라면 몸이 꺾이고 말 터. 이렇게 순순히 당할 수는 없었다.

유진산의 양손이 반 바퀴를 회전하며 푸른 기운을 머금었다.

유가건곤장 구 초식 쌍룡출회(雙龍出回). 내력의 소모가 극심하여 평소엔 잘 사용하지 않는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그의 양손이 교주의 가슴을 강타했다.

얼얼한 손목의 느낌으로 보아 일격이 제대로 들어간 듯했다.

가까스로 유진산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놈은 고작 한 걸음만 물러났을 뿐, 별다른 충격은 받지 않는 듯했다.

‘이럴 수가…….’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번엔 그의 손바닥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놀랍게도 방금 자신이 사용했던 기술과 동일했다. 차이점이라면 두 손이 아니라 한 손이라는 것뿐.

두 발이 지면에서 붕 떠오른 유진산은 삼 장을 날아 벽면에 등을 부딪치고야 말았다.

그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세차게 요동쳤다.

도대체 자신이 누구랑 싸우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가문의 기술을 한 번 보고 흉내 내어 사용하다니. 악마의 재능. 아니, 악마 그 자체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금강불괴신공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중상을 입었을 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교주의 모습에 유진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놈! 허락도 없이 감히 누구의 무공을 함부로 훔쳐 사용하느냐!?”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나 대꾸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놈이 또다시 일장을 내지르고 있었다.

유진산은 다급히 양팔을 얼굴 앞으로 모아 방어 자세를 취했다.

거센 폭음만 들려왔을 뿐, 이상하게도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눈앞의 팔을 슬쩍 벌려 보자 낯익은 등짝이 보였다.

한 뼘밖에는 되지 않을 것처럼 왜소했으나, 이상하게도 마치 바다처럼 넓어 보였다.

“그만해. 우리 할배 아프잖아.”

유설의 작은 손바닥이 전면을 향해 곧게 내뻗어져 있었다.

다가오던 공격을 대신 받아준 것이리라.

귀신을 무서워하는 손녀가 자신을 위해 용기 내어 나서다니.

유진산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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