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횡재로구나 (2)
지금껏 사도련주에 관한 질문은 거의 하지 않았다. 백규 또한 사도련의 간부로서 불편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에게 미리 허락을 구하고 왔을 터.
유진산은 그간 궁금했던 부분을 허심탄회하게 물어보았다.
“예전부터 궁금했네. 무림맹주와 사도련주가 어떤 관계인지.”
둘은 정파와 사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악연 관계라는 소문만 몇 번 들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백규가 능글맞게 웃으며 답했다.
“나도 최근에 련주님께 직접 들었소. 꽤 재밌는 일화인데, 아마 들어보면 깜짝 놀랄 거요.”
“아우가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군. 어서 말해주시게.”
백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우리 련주님하고 맹주년하고는 사형제지간이라오.”
유진산은 두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정파와 사파의 수장들이 서로 사형제라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무림맹주의 사문은 아미파이며, 현재는 장문인의 신분이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 련주께서도 아미파의 비구니 출신이오.”
정말이지 말문이 막힐 정도로 황당한 말이었다.
백규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사도련의 총사인 그가 련주를 상대로 장난을 칠 리는 없었으니까.
“그럼 비구니가 사문을 배신하고, 사파를 대표하는 사도련주가 되었다고?”
“뭐 사문도 사문 나름이지 않겠소. 아미파는 아주 어렸을 때 도망쳐 나왔다고 들었소.”
유진산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백규를 재촉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백규의 얼굴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련주께서는 고아였던 어린 시절 아미파의 장로와 연이 생겨 막내항렬로 거둬졌소. 그때 당시, 현 무림맹주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오.”
유진산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 어린 제자가 오면 보살펴 주질 못할망정 괴롭히기나 하고.”
“그냥 괴롭힌 정도가 아니고, 패거리까지 끌고 다니면서 온종일 때렸다고 하더이다.”
“저런. 사부들은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나?”
백규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말도 마쇼. 문파 내에서 아무도 못 건드리는 망나니였다니까.”
“아니, 도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비구니가 그런 경박한 호칭이 붙었는가.”
“수틀리면 사숙들까지 남몰래 묵사발을 만들어놨다고 하오. 치욕스러워서 말도 못 꺼낼 만큼.”
사실이라면 제자한테 두들겨 맞았다고 말하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소문이라도 나면 감당하지 못할 수치심이 뒤따를 테니.
정확한 속사정은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을 일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선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더 남아있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윗대 항렬의 무공을 압도했다는 얘기인데?”
“아미파의 역사상 제일가는 무공의 귀재였다고 하오. 장문인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아무리 자질이 중요하다지만, 어찌 인성을 갖추지 못한 아이를…….”
“당시엔 아미파가 고수들을 배출하지 못해 쇠퇴하던 시기라 급했던 모양이오.”
문파의 위세는 얼마나 뛰어난 고수들을 배출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아무래도 장문인이 욕심을 부렸던 모양이었다.
“장문인까지 뒤를 봐줬다면 아주 승승장구했겠군.”
“불과 이대 제자였을 때 아미파의 모든 무학을 통달하고, 비전절학까지 이어받았다고 알려져 있소.”
그녀의 과거가 놀랍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특별할 것도 없었다.
자질만 놓고 보자면 유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런 잔악한 인물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니, 나 같아도 도망쳐 나왔을 걸세. 헌데 당시 련주께서 어린 나이였을 텐데, 어떻게 그러한 고수로 성장하셨는가.”
“당시에 친구 둘을 사귀어서 함께 수련했다고 하오. 그들의 정체가 누군지 아시오?”
유진산도 짐작되는 이들이 있었다. 지난번 사도련주와 만났을 때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후와 흑묘파의 문주겠군.”
셋 모두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든 쟁쟁한 고수들이었다.
무림의 제일고수로 평가받던 검후 소소는 은퇴 후 천축으로 떠났으며, 흑묘파의 문주인 백상은 전설적인 살수였다.
그들의 과거가 어땠는지. 그리고 스승이 누구였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백규도 자세히 알지 못할 듯했다.
“정답이오. 어쨌거나 그들과 맹주는 앙숙으로 계속 대립해오던 관계였소.”
과거 검후의 은퇴식 때 아미파의 문주인 화령사태를 잠시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안대로 한쪽 눈을 가리고 다닌다. 강호에는 그것이 검후에게 당한 상처 때문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럼 조사도 꾸준히 했을 테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군. 무공 수준이라든지?”
지금까지는 그저 지난 과거의 이야기였을 뿐.
이번 질문이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련주께서 말씀하시길…… 최근 그녀가 현경의 경지에 접어든 것 같다고 하셨소.”
사파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일 터. 그렇기에 쉬쉬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유진산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단지 확실히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역시 짐작대로군. 그럼 우리도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겠지.”
“나도 형님 생각에 동의하오. 무턱대고 쳐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일 테니.”
유진산은 손녀가 내어온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맛이 단 것으로 보아 꿀을 탄 모양이었다.
“우선 맹주에 대한 정보는 그 정도면 충분하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고민 좀 해봐야겠군.”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오. 근데 형님, 요즘 강호에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소.”
“이상한 소문이라니?”
“천축에서 엄청난 고수가 나타나 각지의 고수들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하오.”
천축에 무시무시한 고수들이 있다는 내용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중원의 무림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단신으로 말인가.”
“맞소. 피와 죽음을 몰고 다닌다고 하여 혈사객(血死客)이란 이름까지 붙었소.”
“그자가 그렇게 강한가? 아우가 경계해야 할 정도로 말이네.”
“흑야방에서 받은 정보에 의하면, 당문의 제일 고수인 당육천과 패력문의 문주까지도 당했소. 그뿐만이 아니오.”
백규가 그의 도전을 받고 살해당한 이들을 쭉 열거해 주었다.
그들 중에는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던 자들도 섞여 있을 정도였다.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목적이 무척 궁금했다.
갑자기 나타나 각지의 고수들을 찾아다닌다니. 그것도 단신으로 말이다.
설마 침공에 앞서 이곳의 수준을 먼저 평가하려는 것일까?
아무래도 뭔가가 있는 듯했다.
“지금 그자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출몰했던 경로를 종합해보면 아마도 곤륜산으로 향하는 것 같소.”
곤륜산에는 곤륜무제가 있다. 설마 그와 싸우려는 것일까?
비록 손녀에게 패하긴 했지만, 무림십대고수 중 일인으로 평가받는 강자였다.
만약 그마저 당한다면 정사를 막론하고 혼란에 빠질 것이리라.
비록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일이었지만, 무시하기엔 찜찜한 사안이었다.
“혹시 그자가 섬서에 나타난다면 내게도 알려주시게.”
백규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형님은 복수에 연관된 자들이 아니면 신경을 안 썼잖소?”
“맞네. 다른 일에는 엮이고 싶지 않았지. 강호에는 싫증이 났으니까.”
“그런데 왜 혈사객은 관심을 가지는 거요?”
“놈이 근처로 오면 패도문이라고 어찌 안전하겠는가. 아우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는 않네.”
백규는 감동하면서도 자신감을 내비쳤다.
“역시 우리 형님뿐이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소. 나도 그렇게 약하진 않으니까.”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도 꼭 얘기하게.”
“알겠소. 하지만 올 때는 설이랑 같이 와야 하오. 형님 혼자서 도와주겠다고 오면, 다 같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 순간 유진산과 백규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 참, 아우한테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구만.”
“하하핫! 내가 원래 인상과는 다르게 재치가 있는 사람이라오.”
유진산은 또 한 번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는 이후로도 백규와 함께 여러 잡담을 나누었다.
일 식경이 지난 후에서야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차 잘 마셨소, 형님.”
그 순간 백규 앞으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백규 삼촌, 벌써 가는 거야?”
유설이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귀신같이 알고 나타난 것이다.
그 의미를 모를 백규가 아니었다.
“가만있어 보자~”
그가 전낭을 뒤적거리더니 엽전 뭉치를 통째로 꺼내었다.
“자, 우리 조카 용돈이다!”
유설이 해맑은 미소로 백규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히히히. 고마워 삼촌~”
“오냐. 무공 수련도 좋지만, 패도문에도 자주 놀러와.”
“알았어~”
백규가 돌아간 이후에도 유설은 엽전 뭉치를 들고 좋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이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아주 삼촌 돈을 빼앗다시피 하는구나. 그러면 못써.”
“우리 집 사서 이제 돈 없잖아. 이건 그냥 빌린 거야. 나중에 벌어서 다시 줄 거니까 괜찮아.”
“네가 무슨 수로?”
“두고 봐~ 나는 부자가 될 거야.”
유진산은 하늘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네 어미랑 아비는 안 그랬는데, 도대체 누굴 닮아서…….”
“할배를 닮았나 보지.”
한마디도 지지 않는 손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화두를 돌려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우리가 은원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구나. 당분간은 힘들겠어.”
“무림맹주가 현경의 반열에 접어든 것 같다더구나.”
그 말은 곧 손녀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얘기였다.
그렇기에 확실한 승산이 있을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와아~ 정말? 빨리 만나서 싸우고 싶어.”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뻐하는 눈치라니?
반응을 보니 기가 막혔다.
“아직은 안 돼.”
“왜? 내가 질 것 같아?”
“지금은 너무 위험해. 맹주 옆에도 고수들이 많을 테니까. 적어도 네가 어창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안 된다.”
어창술(馭劍術). 어검술과 동일시되는 이 경지야말로 허공에서 무기에 기(氣)를 실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무공의 최고 경지였다.
맹주가 현경의 반열에 접어들었다면, 손녀도 최소한 어창술 정도는 터득해야 안심이 될 듯했다.
“그럼 내가 어창술을 터득하면 맹주랑 만나게 해줄 거야?”
할아버지의 말이 워낙 완고했기 때문일까? 모처럼 유설의 수련 욕구가 활활 불타올랐다.
“오냐. 한번 고려해 보마.”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이미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지만, 아직은 극히 가벼운 물체만 가능할 뿐이었다.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무공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마치 금방 된다는 듯 연무장으로 가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손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유진산도 홀로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나도 힘을 보탤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겠지.’
가문의 복수를 손녀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
그 또한 절대고수의 반열에 들 수 있도록 부지런히 정진해야 했다.
잠시 후 그가 멈춰선 곳은 장원 밖의 산으로 가는 입구였다.
‘봉인된 악마의 힘이라……. 어디 한번 그 위력 좀 볼까?’
우람한 아름드리나무 앞에 선 그가 천천히 왼쪽 소매를 걷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