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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95화 (195/238)

195화 횡재로구나 (3)

유진산은 천천히 왼손의 염주를 빼 보았다.

어김없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 그리고 이질적인 감각은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닌 듯했다.

게다가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손에 또 하나의 단전이 있는 것만 같았다.

“후.”

그는 심호흡과 함께 왼손을 잡아당겼다.

우선은 한 번 시험을 해보기 위함이었다.

만호의 경고대로 염주를 빼낸 상태로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준비를 마친 그가 곧이어 왼손을 내지르려고 했다.

단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손아귀는 어느새 전면의 나무를 때려 박고 있었다.

‘헉!?’

유진산이 내심 경악하는 것은 당연했다.

놀랍게도 마음이 가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콰아아앙-!!!

천지가 뒤흔들리며, 거대한 아름드리나무가 우지끈 부러졌다. 그것도 모자라 날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려 장정 둘이 붙어도 감싸지 못할 둘레였다.

“……이럴 수가.”

엄청난 파괴력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한참 그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소음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담벼락 건너편에서 작은 인영 하나가 벼락같이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수련하다 말고 달려온 손녀였다.

눈을 마주친 유설은 다짜고짜 미간을 좁혀 소리쳤다.

“너 누구야!”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누구냐니? 할애비한테 왜 소리를 질러?”

유설은 부러진 나무를 쓱 살펴보더니, 다시 할아버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할배 맞아? 근데 눈이 왜 그래?”

그 순간 유진산은 아차 싶었다.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이 염주를 다시 끼는 것을 잊고 있었다. 환골탈태를 겪은 자신이 치매가 있을 리도 없거늘,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왼손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유진산은 다급히 염주를 다시 손목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조금씩 손의 떨림이 멈추며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잠시 뭐 좀 시험 좀 해보고 있었다. 근데 눈이 왜?”

“할배, 방금 눈이 전부 검은색이었어.”

“뭐라고? 지금은?”

유설이 할아버지의 주변을 한 바퀴를 돌며,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지금은 괜찮아졌어. 귀신 들어간 줄 알았잖아.”

염주만 뺐음에도 눈이 검게 변했다니, 그야말로 기이한 일이었다.

“신경 안 써도 괜찮다. 별거 아니야.”

“정말 괜찮은 거지?”

“오냐. 너도 수련하고 있었을 텐데, 할애비가 방해한 모양이로구나.”

유설이 주위를 쓱 둘러보다가 부러진 나무를 보며 물었다.

“근데 저거, 할배가 한 거야?”

모처럼 만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가 없었다.

유진산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할애비가 했지. 어떤 것 같아?”

그 순간 유설이 갑자기 할아버지의 귓불을 매만졌다. 막을 겨를도 없이 벼락처럼 움직인 손놀림이었다.

“오오~”

유진산은 황당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손녀가 자신을 귀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를 쏘아붙일까 고민하던 그는 이내 포기했다. 반로환동으로 어려진 자신의 외모가 문제 일 터.

부지런히 먹고 외형적 성장을 이룬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어서 가서 수련이나 계속하거라.”

“그럼 할배는 여기서 수련할 거야? 내가 도와줄까?”

손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것을 보니 왠지 불안했다.

수락했다간 농락만 당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다. 이럴 시간 없으니, 빨리 가서 어창술이나 익혀.”

그 순간 유설이 양팔을 흔들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치~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내심 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우측을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수련 끝나면 계곡에서 시원하게 같이 헤엄이나 칠까?”

물놀이를 좋아하는 유설은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히히. 그럼 좋아~ 끝나면 연무장으로 와, 할배!”

고개를 끄덕인 손녀가 다시 연무장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한 호흡이 지났을 때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신선 같은 경공술은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쯧. 나는 언제 하늘을 날아보나.’

손녀는 고작 두 살에 화경의 깨달음을 얻었고, 아홉 살에는 불문사자신공을 익혀 현경의 반열에 들었다.

그러나 자신은 아직도 벽에 가로막혀 초절정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니.

앞으로의 갈 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기존처럼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유진산은 왼손을 살펴보며 고심했다.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화경과 싸워도 해볼 만할 터인데.’

위력만큼은 기대 이상이었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보다 빠른 반응 속도와 무지막지한 파괴력까지.

제대로 연마만 한다면 절세신공이 부럽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아직은 불안정했기에 꾸준한 연구가 필요할 듯했다.

‘허나 창술 수련도 게을리하면 안 되겠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대나무 하나를 찾아서 다듬었다.

손녀가 창안한 사상 최강의 창술.

그동안 미뤄두었던 무적설이창법 이 초식 촉수백팔타(觸手百八打)를 연마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겨우 이 초식뿐이었지만,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필살의 창술이었다.

대나무에 몸을 지탱한 그는 끝자락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러고는 제자리에서 통통 튀기 시작했다.

‘수련 방법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알려준 대로 할 수밖에.’

자세가 조금 웃기긴 했지만,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대나무에 매달린 그는 무려 두 시진을 연습했다.

수련을 마치고 손녀와도 놀아주어야 할 터. 쉴 틈이 없었다.

바쁜 일과 속에 보름이란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하루하루 대부분을 수련에만 매진해왔다.

새로 개발하고 있는 악마신공과 손녀에게 전수받은 촉수백팔타.

그리고 금강불괴신공의 화후도 높이기 위해 기공 수련도 계속했다.

그 와중에 손님들까지 계속 오가고 있었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부분 인사치레로 오고 있었기에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고. 쉴 틈이 없구나.”

늦은 밤이었다. 일과를 마무리한 유진산은 침상에 옆으로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요 며칠 쉬지 않고 움직이다 보니 피로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제대로 잠을 자는 것이 무려 나흘만이었다.

그래서일까? 바로 곯아떨어졌지만, 평소와는 수면의 깊이가 달랐다.

‘으음?’

눈앞으로 희뿌연 안개가 모여들고 있었다.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었던 기분 나쁜 느낌.

그 형체는 곧이어 긴 머리칼을 지닌 한 여인으로 변해갔다.

꿈이 분명했지만, 몹시 기분이 불쾌했다.

정상적인 성인보다 체구가 무려 두 배 이상이나 거대했다.

게다가 흉측한 얼굴까지.

‘뭐지? 귀신인가?’

여인의 시뻘건 두 눈을 마주친 유진산은 가슴이 철렁해졌다. 꿈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그 순간 눈앞에서 어이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쭉쭉 길어지더니 자신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것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곧이어 머리카락이 왼쪽 귓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끝없이 계속해서 파고 들어오는 그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마치 현실처럼.

“……끄으.”

유진산은 입에서 거품까지 물며 발악했다.

그리고 고통이 절정에 이를 무렵이었다.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귀신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드디어 꿈에서 깬 것임을.

“휴.”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왼쪽 귀가 계속 간지러운 것이 아닌가.

천천히 눈을 떠 보던 그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시야에 사람의 머리칼이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상황이지?’

설마 다시 잡귀가 들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떨리는 마음을 뒤로한 채, 고개를 천천히 좌측으로 돌려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헉!? 뭐, 뭐야?”

어이없게도 손녀가 옆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귀를 간지럽히면서 말이다.

유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폭소를 터트렸다.

“푸히히히!”

이 모든 게 손녀의 장난이었다니.

유진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녀석, 할애비 심장 멎는 줄 알았다! 야밤에 뭐 하는 거야?”

“할배, 나 심심해~”

유설이 자신의 팔을 흔들며 떼를 썼다.

오늘따라 얘가 왜 이런다는 말인가. 계속되는 명상 수련에 밤낮이 바뀐 모양이었다.

“내일 패도문에 가서 애들이랑 놀아.”

“재미없어. 할배랑 놀고 싶어~”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같이 놀아줄게.”

“뭐 할 건데?”

“일단 아침에 텃밭 좀 보고, 오랜만에 대련이나 해보자고.”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의 수련 성과를 시험해 봐야 했다.

손녀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내심 궁금했다.

“정말이지? 꼭이야.”

“오냐. 얼른 올라가서 자.”

평상시에는 잠이 없는 유진산이었지만, 모처럼 정신을 놓고 잤다.

손녀보다 늦게 일어났을 정도로 말이다.

“할배, 빨리 일어나!”

“으음. 벌써 해가 이렇게 떴나?”

“응. 빨리 나가자.”

유진산은 졸린 눈을 비비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오냐. 어서 앞장서거라.”

집 뒤의 텃밭으로 나온 조손은 작물들을 살펴보았다.

“할배, 벌써 싹이 자랐어.”

양기를 듬뿍 받아서인지 벌써 호박과 가지의 새싹이 자라나 있었다.

유진산이 뿌듯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무래도 서너 달 후면 먹을 수 있겠구나.”

“히히. 맛있겠다~”

“그럼, 할애비가 심었는데 당연히 맛있겠지. 이제 네가 심은 작물을 살펴보러 가보자꾸나.”

둘은 다시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텃밭의 절반은 지하에서 가져나온 보물상자의 씨앗을 심어두었었다.

유진산도 가장 궁금해하던 작물이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은 뿌리식물이라는 것뿐이었다.

“할배. 이건 왜 이렇게 빨리 자라?”

불과 보름 만에 잎사귀가 마디만큼 자라있었다.

호박과 가지가 새싹만 나온 것에 비교하면 성장 속도가 차원이 달랐다.

“자라나는 힘이 보통이 아니구나. 벌써 이 정도라니…….”

“하나 빼서 먹어볼까?”

어차피 심어놓은 씨앗이 수백 개였다.

하나 정도 확인해 본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무엇보다 유진산도 무척 궁금했던 참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유진산은 쪼그려 앉아서 두 손으로 흙을 조금씩 파내기 시작했다.

조금씩 뿌리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삼(蔘)의 형태였다.

그런데 생김새가 무척이나 이상했다.

하나를 꺼내본 유진산은 한참이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켜보던 유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긴 게 꼭 사람 모양이네.”

정말이지 놀랍도록 사람과 일치한 형상이었다.

팔다리는 물론 얼굴까지. 게다가 풀잎은 꼭 머리카락 같았다.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생김새야 아무려면 어때? 효과만 좋으면 최고인 게지. 자, 일단 한 번 먹어 보거라.”

만호가 영약이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을지 궁금했다.

일단은 먹어봐야 알 터.

“지금 먹어도 되는 거야? 익었어?”

“먹어도 괜찮아. 원래 삼은 설익을 때 먹어야 더 맛있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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