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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97화 (197/238)

197화 등선하는 기분 (2)

호기롭게 손녀를 도발했지만, 그러한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설이 양손을 사용하는 즉시 방어가 뚫리고야 말았다.

곧이어 훤히 드러난 앞가슴으로 손바닥이 파고 들어왔다.

유가건곤장 중 상대를 밀어내는 초식인 비연탄격(飛演彈擊)이었다.

유진산은 뒷걸음질하며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러나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손녀가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맞을 터.

유진산은 다급히 왼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손끝에서 검은 기류가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며 유설을 덮치기 시작했다.

‘……헉!?’

유진산은 공격을 가하면서도 스스로가 놀라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이 의도한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데없는 변수에 손녀가 다치진 않을까 걱정되었으나, 괜한 기우에 불과했다.

찰나의 순간. 그는 눈앞에서 황금빛 휘광이 폭발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쏴아아악-!!!

눈부신 빛무리가 검은 기류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곧이어 주먹을 움켜쥔 유설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불문사자신공?’

강적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절세의 무공이었다.

자신을 상대로 이것까지 사용하다니.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자세가 무너진 유진산은 얼굴을 막으며 복부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충격은 없었다.

어느새 아랫배에 손녀의 주먹이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타격하지 않고, 슬쩍 건드리기만 한 것은 의아한 부분이었다.

“왜 멈췄어?”

유설은 우선 자신의 전신을 감싼 황금빛 휘광부터 소멸시켰다.

이어서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할배, 괜찮아? 눈이 또 이상해졌어.”

“또 시꺼멓게 변했단 말이야?”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거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다급히 오른손으로 옮겨놨던 염주를 다시 왼손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손녀가 얼굴을 들이밀며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음. 다시 괜찮아지고 있어.”

“그래, 그럼 되었다. 할애비의 무공은 어땠어?”

내심 기대하며 물어봤지만, 손녀의 대답은 예상과는 달랐다.

“뭔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그게 무슨 소리야? 대련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유설이 한쪽 손을 들어서 보여주었다.

자신의 왼손과 집중적으로 부딪혔던 오른손이었다.

놀랍게도 손바닥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거 봐봐. 따가워.”

손녀가 따갑다고 할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기였을 때부터 키워오며,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놀란 유진산은 황급히 손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검게 물든 부분은 조금씩 연기로 증발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펼쳤던 악마신공이 독성이라도 지닌 것일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후한 내공으로 그것을 밀어내고 있는 듯했다.

“할애비가 미안하다. 앞으로 네게 이 무공은 사용하지 않으마.”

유진산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칫하면 자신이 손녀를 위험하게 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그래도 재밌었어.”

“아니다. 잠시 따라오너라.”

유진산은 손녀를 데리고 부엌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물을 받아서 손을 깨끗이 씻겨주기 시작했다.

“으잉? 왜 손을 씻겨줘? 우리 할배 맞아?”

유설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가끔 머리를 감겨주긴 했어도, 손까지 씻겨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할애비가 빙의라도 되었단 말이더냐. 잠시 가만히 있어 보거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아이였지만, 그전에 하나뿐인 자신의 핏줄이었다.

손을 씻겨준 유진산은 손녀의 머리 맵시를 조심스럽게 만져주었다.

그러자 유설이 방긋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할배. 나 이제 안 아파.”

표정을 보니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이제야 유진산의 얼굴에도 안도가 떠올랐다.

“그래, 그래. 다음번부터는 창으로 대련하자꾸나.”

“창술 대련? 그럼 지금 해줄 거야?”

맨손 격투가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로 창술 대련이라니.

말이 대련이지, 버티다가 일방적으로 맞는 행위일 뿐이었다. 물론 실력 향상에 도움은 되지만, 체력의 소모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지금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오늘은 좀 쉬어야겠으니, 내일 하는 게 좋겠구나.”

유진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붙잡히기 전에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의 뒤를 유설이 졸졸 따라다니며 확답을 요구했다.

“내일? 정말이지?”

“오냐. 할애비가 언제 거짓말한 적이 있더냐.”

무리하게 대련을 했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기운이 없었다.

오늘따라 그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유설은 그런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곧이어 밖으로 나온 유진산은 정자에 걸터앉았다.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진 이상한 힘을 손에 넣어 기뻐했지만, 계속 연마해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정말이지 사악한 무공이로구나.’

통제되지 않는 위력과 잔인함까지. 그냥 넘길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상대가 현경에 도달한 손녀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리라.

힘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었지만,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마공으로 오해받기에도 딱 좋겠지.’

마공은 무림에서 금기된 무공이다.

만약 마공을 익힌 것이 소문이라도 나면 강호에서는 공적으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지금도 정파인들에게 마두로 불리고는 있었지만, 무림공적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드디어 손녀를 상대로 조금이라도 버틸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했거늘.

희망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대안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화경이다.’

화경(化境). 절대고수를 나누는 기준점이 되는 지고한 경지였다.

이미 극에 달한 초절정의 수준이었기에 그리 먼 길은 아니었다.

한 걸음.

앞으로 고작 한 걸음만 내디딘다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하지만 마치 발목에 수만 근의 모래주머니라도 매단 것처럼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벽에 가로막힌 것이다.

‘화경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역근경을 익힐 수 있다.’

파계승 정혜가 직접 얘기했던 부분이었다. 배울 자격이 생긴다면 전수해줄 의향이 있다는 것을.

달마 조사가 남긴 역근경은 소림사의 최고 절학으로 평가되는 무공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화경의 초입을 넘어 더 높은 수준까지 도달하게 될 터였다.

‘조만간 땡중을 한 번 만나봐야겠구나.’

전혀 예측이 안 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그를 만나서 확실히 설득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혹시라도 말을 바꾸거나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화경에 도달하냐는 것이었다.

절대고수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허사였다.

답답한 마음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할배, 요즘 힘들어? 내가 안마해 줄까?”

어느새 등 뒤로 온 손녀가 양쪽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어떻게 자신의 고뇌를 알고 귀신같이 온 것일까? 어쨌거나 거절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오냐. 잘 키운 손녀 하나가 열 자식 부럽지 않구나.”

유설의 손길은 영약이 따로 없었다.

단순히 근육만 주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손끝에서부터 전달되는 따듯한 진기가 혈도까지 청소해주고 있었다.

현경이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기술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거라.”

“나는 원하는 거 없어.”

“내일 창술 대련 꼭 해줄 테니 걱정 안 해도 돼.”

“아니야. 할배가 힘들면 다음에 해도 돼.”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런단 말인가.

그렇게 좋아하는 대련까지 미루겠다니.

평소의 손녀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이냐. 어서 할애비한테 말해 보거라.”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할배?”

“오냐. 어서 말해 보거라.”

유설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 오늘 어깨가 더 좁아진 것 같아.”

한참 성장할 신체나이였다. 그런데도 넓어지긴커녕 더 좁아 보인다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자신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일까?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우리 설이는 좋겠구나. 할애비보다 어깨도 넓고, 힘도 세서.”

“아니야. 할배도 빨리 세지면 되지.”

“쉽지가 않아. 화경에 도달하고 싶은데, 벽에 가로막혀서 더는 진전이 없구나.”

어깨를 주무르던 유설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

화경은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다.

그의 상식으로는 남의 도움을 받아서 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손녀처럼 선천적으로 신선의 오감을 타고난 선음지체(仙音之體)라면 모를까.

자신 같은 일반인은 평생을 노력해도 도달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걸 어떻게 도와줘?”

“으음. 나는 할배가 진전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유진산의 얼굴에 일말의 기대감이 서렸다.

손녀이기에 앞서 무림의 지존 자리를 넘보는 절세고수였다.

무엇이든지 도움이 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터.

“어서 말해 보거라. 그것이 무엇인지.”

“할배는 마음이 좁아서 그래.”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야? 내가 속이 좁다니.”

그 순간 유진산의 어깨를 타고 손녀의 팔이 쑥 나타났다.

유설은 할아버지의 눈앞에서 손을 동그랗게 오므려 공기주머니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이 안에만 갇혀 있다구. 여길 벗어나서 우주를 봐봐. 그럼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게 보일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는 ‘아차’ 하며 손뼉을 부딪쳤다.

돌연 전대의 무림제일고수인 검후를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녀가 자신에게 해준 말이 있었다.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선 내가 만든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던가?’

조금 전 손녀가 해줬던 말과 놀랍게도 일치했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하면서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까 우주를 어떻게 보냐고?”

잠시 고민하던 유설이 나직이 답했다.

“그럼 눈을 감아봐. 내가 잠시 느끼게 해줄게.”

뭔가가 방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비록 깨달음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뭐든 도움이 될 터.

작은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알았다.”

아직까진 특별한 것은 없었다.

눈을 감자마자 손녀의 안마가 이어졌을 뿐이었다.

“알았어. 그럼 가만히 있어 봐.”

유진산은 순간적으로 어깨와 허리에서 작은 충격을 느꼈다.

그는 앉은 자세에서 옆으로 넘어가 버렸다.

손녀가 자신을 낚아채어 눕힌 것이다.

철퍼덕-!

그 순간 넘어진 그의 등 뒤로 유설이 다람쥐처럼 올라탔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목부터 허리, 그리고 등까지 전신의 기혈이 위에서부터 붕 뜨는 듯한 느낌이 이어졌다.

단순한 전신 안마가 아니었다.

“허억!”

알 수 없는 시원함에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어때?”

“마, 마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것 같구나.”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에 피로가 전부 가시는 듯했다.

정확히는 온몸이 사르륵 녹는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할게.”

“무,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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