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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199화 (199/238)

199화 등선하는 기분 (4)

유진산의 두 발이 허공을 밟으며 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로 하늘을 질주하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기존에는 꿈도 꿀 수가 없었던 경공술이었다.

“허헛!”

그때 옆으로 유설이 보폭을 맞춰 다가오며 물었다.

“재밌어?”

“오냐. 지금껏 혼자만 이런 기분을 실컷 느꼈구나.”

손녀와 함께 허공답보를 펼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모처럼 찾아온 행복함에 유진산은 심장이 뜨거워졌다.

피부를 파고드는 시원한 바람의 촉감이 무척이나 좋았다.

“할배, 나 잡아봐!”

갑자기 유설의 경공이 빨라지며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가히 섬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빠르기였다. 게다가 바람과도 같은 유연함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유진산도 발을 구르며 속도를 올려보았다.

하지만 따라잡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같은 허공답보라도 현경과 화경이 펼치는 것은 천지 차이였으니까.

자신이 허공을 밟는다면, 유설은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거기 서거라!”

유진산은 손녀를 뒤쫓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놀아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깨달음의 기연을 안겨주었으니,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둘은 단번에 호현의 시장에 도착했다.

지면에 내려선 유설이 한 노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꼬치구이는 저기가 제일 맛있어.”

가끔 자신도 모르게 혼자서 시장에 다녀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점을 꿰찰 정도일 줄이야.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긴 언제 와봤어?”

“나? 오늘 아침에도 와서 먹고 왔어.”

“할애비는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혼자 시장에 와서 꼬치를 사 먹었다고?”

유설은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내 보조개를 피워 올리며 씩 웃어 보였다.

“히히~ 금방 다녀온 거야.”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손녀의 등을 한 번 토닥였다.

“할애비가 농담한 게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먹어야 해.”

“알았어. 그럼 내가 오늘 맛있는 거 많이 사 줄게.”

“오냐. 모처럼 손녀한테 좀 얻어먹어야겠구나.”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황이 없어서 전낭을 챙겨오지 못했으니까.

눈치 빠른 유설이 그걸 알고 먼저 얘기한 것이리라.

노점 앞에 서자 중년의 부인이 포근한 인상으로 먼저 물어왔다.

“매일 먹던 것으로 드릴까요?”

확실히 단골이 맞는 모양이었다.

유설이 검지와 중지를 앞으로 내밀어 접어 보였다.

“네, 두 개 주세요.”

잠시 후 주인이 건넨 것은 닭의 염통을 숯불에 구운 꼬치였다.

후각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닷새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구나.’

자신이 무아지경에 빠져 꿈속에서 헤맸던 기간이었다.

체감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본능은 숨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배고픔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어서 먹어봐 할배. 맛있어.”

유진산은 손녀가 건넨 꼬치를 재빨리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쫄깃한 식감과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무엇보다 닷새나 굶었기 때문일까? 그의 손에 있던 꼬치는 순식간에 가벼워져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손에는 빈 꼬치만 들려져 있었다.

그 순간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손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

유설이 엄지로 할아버지의 얼굴을 쓱 닦아주며 물었다.

“많이 배고팠어?”

질문의 의미를 파악한 유진산은 헛기침을 뱉었다.

얼굴에 음식을 묻히고 먹을 정도로 허겁지겁 먹었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배고픔 앞에 장사는 없는 법.

“며칠을 굶었잖느냐. 하나 더 사거라.”

“꼬치 하나 더 사달라고?”

닷새를 굶었는데 염통 꼬치 하나로는 배가 찰 리가 없었다.

유진산은 뒷짐을 진 채 하늘을 바라봤다.

“흠흠! 그러든지.”

조금 전에 먹었던 고소한 맛이 계속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유설은 다른 생각이 있는 듯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니야, 저쪽으로 가자. 다른 거 사 줄게.”

“괜찮대도. 나는 저걸 먹는다니까?”

“안 돼. 다른 것도 골고루 먹어야 해.”

유진산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에 먹었던 꼬치를 더 먹고 싶었지만, 이렇게 거절을 당하다니.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은 돈을 가진 자의 마음이었으니까.

전낭을 챙겨오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혹시라도 얘기해두는데, 할애비는 탕후루 같은 건 안 먹는다.”

“아니야. 우리 지금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는 거야.”

유설은 신이 난다는 듯 할아버지의 팔짱을 꼈다.

그렇게 어딘가로 잠시 걷고 있을 때였다.

우측으로 오 장 거리의 노점이었다.

야외의 식탁을 끼고 네 명이 벌떡 일어나 포권을 건네고 있었다.

복장으로 보아 사파의 무림인들이 확실했다.

유설이 그들을 향해 한 손을 슬쩍 흔들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들.”

“살펴 가십시오!”

묵묵히 지켜보던 유진산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아가. 저 녀석들은 어떻게 알아?”

“저 아저씨들은 비응문의 문도들이래. 시장에서 몇 번 봤어.”

“거참. 할애비 모르게 언제 이렇게 인맥을 넓혀놨느냐.”

자유분방한 사파는 무공과 명성이 배분을 결정한다.

사파무림의 지존이자 영웅으로 평가받는 음괴였으니, 인기가 많은 것이 당연했다.

얼마 가지 못해 또 다른 무리가 아는 체를 해왔다.

“음괴 대협, 어디 가십니까!?”

맞은 편에서 다섯 명의 무림인이 일렬로 늘어서서 포권을 해왔다.

유설도 안면이 있는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우리 할배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다섯 명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말고, 나중에 같이 먹어요.”

유설이 관심을 거두려 하자 그가 다급히 불렀다.

“대, 대협!”

“언, 언제 댁으로 한번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유설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알았어요. 초대해줄 테니, 올 때 맛있는 거 사와요.”

“알, 알겠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대답이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음양쌍괴가 사라질 때까지 포권을 풀지 않았다.

유진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녀를 바라보았다.

“쟤들은 뭐야?”

조금 전의 무림인들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의 짐작으로 다섯 명 모두 최소 절정 이상의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저 아저씨들은 극살오의(極殺五依)라고 불린대. 전에 시장에서 같이 국수 먹은 사이야.”

“쟤들이랑 언제 국수까지……. 근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대?”

“아아~ 내가 우리 집에 대해서 자랑 좀 했어.”

그토록 집의 위치를 외부에 숨기려 했건만.

당당히 말하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은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무림인이 찾아와 귀찮게 할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한마디 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오늘은 무엇을 하든 모두 받아줄 수 있는 날이었으니까.

“우리 아가가 시장의 유명인사가 되었구나.”

“히힛. 저 아저씨들 되게 재밌어. 다음에 같이 놀래?”

“오냐. 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자꾸나.”

유진산은 마음을 비우고 걸었다.

시장을 걷는 내내 인사를 건네오는 무림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파의 성지인 호현에서도 중심가였으니 피할 수가 없었다.

곳곳에서 속닥거리는 무림인들의 소리는 자신들에 관한 얘기뿐이었다.

초인적인 화경의 청각은 아주 작은 소리까지도 속속들이 전달해주고 있었다.

한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잠깐 서보거라.”

유진산이 걸음을 멈추며 우측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곳엔 난화객잔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이 있었다.

발걸음을 멈춘 이유는 안에서 흥미를 끄는 속삭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야? 곤륜무제까지 당했다고?”

“그렇다니까. 지금 무림맹놈들 발칵 뒤집혀서 난리도 아니야.”

유진산도 이미 백규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혈사객(血死客)이라 불리는 자가 각지의 고수들에게 도전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허나 무림십대고수로 평가받는 곤륜무제까지 당했을 줄이야.

가볍게 흘려넘길 일이 아니었다.

유진산은 전각 내부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보았다.

“정파의 고수가 죽은 건 좋은 소식이지만, 누군가는 막아야 할 것 아냐?”

“내 말이. 다음 목표가 누굴지 궁금하구만.”

“위치로 보면 섬서로 넘어올 수도 있어.”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목적지는 화산파나 호현이나 둘 중 하나겠군.”

“만약 호현으로 온다면 패도문의 문주님을 노리는 거겠지?”

“모르지. 미친놈이라면 음괴 대협을 찾을 수도.”

“그럼 자살하러 온다는 거야?”

대화를 나누던 무림인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짐작대로 혈사객에 관한 얘기가 확실해 보였다.

자세한 내용은 조만간 패도문에 들려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유설이 보채듯 물어왔다.

“더 들을 거야?”

“아니다. 배고프니 어서 가자꾸나.”

조손은 날이 어둑해지고 나서야 귀가했다.

취침할 시간이 지났지만, 유진산은 누울 수가 없었다. 배가 너무 불렀던 탓이었다.

그는 홀로 달빛 아래의 정자에 앉아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이고 배야.”

배가 올챙이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일평생 이렇게나 많이 먹은 적은 처음이었다.

손녀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온갖 간식을 함께 먹어줬기 때문이었다.

‘이거 숨도 쉬기가 힘들구만. 어떻게든 소화를 시켜야 할 터인데.’

고민 끝에 그의 발걸음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경의 신체 능력을 점검해 보고 싶었다.

죽봉을 움켜쥔 그는 천천히 창무(槍舞)를 추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섬세해진 움직임. 그것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무희의 몸짓과도 같았다.

유진산은 달라진 자신의 무공 수준에 굉장히 흡족했다.

‘어디, 초식도 한 번?’

그의 왼발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창끝이 벼락처럼 쏘아져 나가며 돌풍을 뿜어냈다.

파아아앙-!!

예전과는 위력이 확실히 달랐다.

속도에서도. 그리고 깊이에서도.

묵직해진 기의 파동이 손아귀로 전달되는 느낌이 좋았다.

‘더는 이 사악한 것에 기대지 않아도 되겠구나.’

왼쪽 손목의 염주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을 때였다.

“오오~ 우리 할배 멋있다!”

유설이 죽봉 하나를 움켜쥐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안 잤어?”

“나랑 약속했잖아. 시장 다녀와서 대련하기로.”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니. 배가 너무 불러서 내키진 않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리고 유진산도 궁금하던 찰나였다. 이제 자신이 손녀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하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이 있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으응? 뭔데?”

유진산은 어깨를 풀어대며 나직이 답했다.

“배는 때리기 없기다. 아직 소화가 다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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