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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00화 (200/238)

200화 형이 도와줄게 (1)

콰아아앙-!!

거센 폭음과 함께 연무장에 맹렬한 돌풍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유진산이 철퍼덕 쓰러지고 있었다.

“으앗!”

이로써 바닥을 뒹군 횟수가 벌써 열두 번이었다.

그는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는 손녀에게서 버틸 줄 알았거늘. 화경이 되기 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악마가 깃든 왼손에 의지해서 싸웠을 때보다도 못한 상황이었다.

단 한 번도 손녀의 삼 초를 받아내지 못하다니. 왠지 모를 자괴감이 밀려왔다.

“할배, 괜찮아? 이제 그만할까?”

머리맡에서 약 오 장 거리.

유설이 죽봉을 머리 뒤에 ‘턱’ 걸친 채 두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손녀의 말이 농락처럼 들려오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런 굴욕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아직 안 끝났으니, 거기 가만히 서 있거라.”

누워있던 유진산의 신형이 오뚝이처럼 튕겨 올랐다.

자세를 다잡은 그는 유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예전과는 백팔십도 달라진 움직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가 움켜쥔 죽봉이 손녀의 이마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의 속도였다.

그러나 유설의 얼굴엔 여전히 여유가 가득했다.

유진산의 죽봉은 애꿎은 허공만을 뚫었다.

고개만 슬쩍 비틀어 피해낸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진 이미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죽봉을 잡아당긴 그는 팽이처럼 회전하며 손녀의 허리를 후려쳐갔다.

휘이이익-!!

매서운 강풍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유설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유진산의 눈빛에 일순간 당황이 서렸다.

초식을 마무리한 그는 창을 등 뒤로 내뻗은 채, 손녀의 위치를 찾아보았다.

곧이어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맙소사.’

믿을 수 없게도 유설이 자신의 죽봉 끝에 올라타 있었다.

참새처럼 내려앉아 한 발로 균형을 잡은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놀랍게도 깃털만큼의 무게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성장한 만큼 손녀도 한층 더 강해진 게 확실했다.

“이제 내 차례지?”

두 초식을 양보했으니 반격을 시작한다는 얘기였다.

언제나 이러한 방식이었다.

다급히 창을 회수하려 했지만, 유설의 움직임이 한발 빨랐다.

유설의 신형이 죽봉을 딛고 하늘을 꿰뚫을 듯 날아올랐다.

이어서 허공에서 몸을 거꾸로 뒤집으며 낙하할 자세를 잡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촉수백팔타?’

본인이 직접 창안한 무적설이창법의 이 초식이었다.

현재로선 유설의 창술 중 가장 강한 절초이기도 했다.

유진산은 자세를 낮추며 이를 악다물었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손녀의 신형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순순히 당해줄 유진산이 아니었다.

그의 발끝이 지면을 힘껏 박찼다.

유진산은 움켜쥔 죽봉에 십성 공력을 담으며 기성을 토해냈다.

유가살풍창 구 초식 맹룡승천세(猛龍昇天勢)였다.

곧이어 허공에서 두 개의 빛무리가 격돌하며 섬광을 일으켰다.

유진산이 움켜쥐고 있던 죽봉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늘에서 수많은 죽봉이 촉수처럼 내려와 전신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에 쥔 무기는 부러졌고, 방어할 수단은 없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금강불괴신공뿐. 그는 다급히 양팔로 얼굴과 머리를 감쌌다.

투타탁-! 타타타탁-!!

“으아악!”

허공에서 시작된 매타작은 한 호흡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그 짧은 사이 백여 번을 넘게 두들긴 것이다.

날개가 꺾인 새가 추락하듯 그의 신형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또다시 널브러진 유진산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손녀가 손속에 사정을 두었기에 다치지도 않았다.

단지 좌절감에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할배, 아파?”

유설이 다가와서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다. 그냥 좀 쉬어야겠으니, 먼저 들어가거라.”

“힝. 내가 미안해. 앞으로는 힘을 더 빼고 할게.”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이것도 봐주면서 했다는 말이냐?”

“으응. 안 그럼 할배가 죽을 수도 있어.”

조금 전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유진산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은 금세 좌절로 바뀌고야 말았다.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할 줄이야.

이래서는 무림맹주와 싸울 때 기여할 수가 없을 터였다.

‘이거 아직도 멀었구나.’

지금의 수준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다. 조금 더 강해지고 싶었다.

손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호흡은 맞출 수 있을 정도로.

현재 상황에서 가장 빠른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파계승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에게 소림사의 최고 무학인 역근경을 배우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미 대나이신법과 금강불괴신공도 전수받지 않았던가.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유진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유진산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패도문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장원을 활보하며 정혜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돌아다니길 얼마 후. 맞은편에서 낯익은 아이가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얼마 전 손녀와 함께 집에 놀러 왔던 아이 중 한 명이었다.

마침 잘된 일이었다.

“만두로구나. 땡중 좀 만나러 왔는데, 보이질 않는구나.”

“아아. 스님이요? 제가 어딨는 줄 알아요.”

이곳에서 승려복을 입은 인물은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파계를 당해 더는 승려의 신분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를 스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래, 어서 안내하거라.”

유진산은 만두를 따라 어딘가로 이동했다.

장원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새로 꾸며지고 있는 작은 화원이었다.

“요즘 매일 저곳에 계세요.”

“그래, 수고했다. 나중에 또 설이 만나러 놀러 오너라.”

꽃밭에서 한 쌍의 노인이 꽃을 다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중 한 명이 바로 파계승 정혜였다.

그리고 상대는 문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식조전의 왕이모였다.

둘 사이에 뭔가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나 관계가 발전했다니.

이제는 부부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정신이 좀 이상한 땡중이긴 해도, 세상 누구보다 순수하고 듬직한 노인이지.’

그때 정혜가 왕이모의 백발에 꽃을 꽂아주며 물었다.

“혀엉~ 우리 예쁘니 머리 어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인물이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쁘지. 꽃보다 더 예뻐.”

물론 진심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얼마 전까진 패도문에서 가장 성질이 더러운 여인으로 알려진 노파였다.

오죽하면 황혼의 나이까지 혼인도 못 하고, 왕이모라는 별명까지 붙었겠는가.

그런 그녀가 쑥스러운지 얼굴을 숙이는 모습에, 유진산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에, 에구머니나.”

“한 쌍의 백로 같구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서 미안하오.”

유진산의 낯뜨거운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저, 저는 바빠서 가봐야겠어요. 그럼 얘기들 나누세요!”

정혜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 예쁘니 잘 가! 이따 밤에 몰래 찾아갈게!”

왕이모는 얼굴을 가리며 식조전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유진산이 은근슬쩍 물었다.

“잘 어울리는데, 이참에 아예 혼인하는 것은 어때? 내가 방법을 찾아줄 수도 있는데.”

정혜는 슬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스님은 혼인 못 한다.”

“소림사에서 쫓겨났으면 이제 스님도 아니잖아.”

“안 돼. 정혜는 다시 돌아가야 해.”

유진산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파문을 당하고도 사문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다는 것을.

문제는 소림사에서 그를 받아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불상과 사리탑들을 부숴버린 그의 패악질은 용서받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러게 왜 사찰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어?”

“비급을 찾아서 얼굴 까만 새끼를 죽이려고.”

정혜가 찾던 것은 유설이 익힌 불문사자신공의 비급이었다. 자신을 패배시켰던 천축의 고수로부터 소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어쨌거나 그가 비급을 포기하는 대가로 훗날 손녀가 도와주기로 약조한 상태였다.

유진산은 이 부분을 이용해 정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형도 같이 도와줄까?”

정혜가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유진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양손을 흔들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우리 형도 이제 화경이다! 화경!”

“그래.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정혜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검지를 까딱거렸다.

“음~ 하지만 형은 아직 도움이 안 돼.”

이제 막 절대고수의 반열에 도달한 유진산과 화경의 극(極)을 이룬 정혜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무공의 질과 숙련도까지.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 동생이 날 더 강하게 만들어주면 되잖아.”

“음. 어떻게?”

“무공을 전수해줘. 전에 형한테 했던 얘기 기억하지?”

정혜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코를 후비기 시작했다.

“음~ 글쎄?”

아무리 미쳤어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유진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다시 한번 물었다.

“내가 화경에 도달하면 역근경을 전수해준다며?”

정확히는 확답을 받은 것까진 아니었다. 생각해보겠다는 느낌으로 답했을 뿐.

그래도 의중을 알기 위해서 일단 질러놓고 본 것이다.

“왜 안 되는데?”

정혜는 여전히 코를 후비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당하지 않았던가.

‘이놈이 설마 나한테 또 코딱지를 먹이려고?’

아무리 역근경이 탐이 나는 무공이라도 체면상 수락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차선책을 써야 할 터.

아무 생각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유진산이 아니었다.

“우리 사이에 조건은 무슨 조건?”

그 순간 정혜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다.

“혀엉~ 배 안 고파?”

예상대로 파계승의 검지엔 둥그스름한 물체가 올려져 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피까지 묻어 있다니.

상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나왔다.

“잠깐 기다려. 그전에 나도 할 말이 있다.”

“무슨 할 말?”

“동생이 말한 놈이 이미 중원으로 넘어온 것 같은데 말이야. 얘기 못 들었지?”

그 순간 장난기가 가득했던 정혜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싸늘함마저 느껴졌다.

“얼굴 까만 새끼가 돌아왔다고?”

“확실히 그놈인지는 몰라. 고수들을 찾아다니면서 도전을 하고 다니는데, 곤륜무제까지 당했다더군.”

“얼굴이 까매?”

“천축에서 왔다니까, 그렇겠지.”

정혜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그는 왼손을 불끈 움켜쥐고 분노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죽여버릴 거야.”

“형 생각에 놈은 선발대에 불과해. 죽이더라도 다른 동료들이 몰려오겠지.”

“괜찮아. 설이가 나랑 같이 싸워주기로 했어.”

“둘만으로는 힘들걸? 하지만 동생이 원한다면 형도 같이 도와줄 수 있어.”

정혜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유진산은 그를 향해 계속해서 설득을 이어갔다.

그리고 정혜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그가 나직이 물어왔다.

“알려줄까? 역근경.”

유진산은 내심 쾌재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래! 잘 생각했…….”

말을 이어가던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정혜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탄지공(彈指功)이라는 기술을 사용하여 코딱지를 날린 것이다.

마지막까지 장난을 치려고 하다니.

예전에는 방심한 틈에 당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유진산은 사력을 다해 허리를 비틀었다.

정혜가 날린 코딱지가 불과 한 치 차이로 콧등을 스쳐 지나갔다.

아슬아슬했지만 용케도 코앞의 기습을 피해낸 것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무렵. 정혜의 외마디 외침이 들려왔다.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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