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형이 도와줄게 (2)
유설은 연무장에서 홀로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길 반나절.
어느 순간 앞에 놓인 용화창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드드득-! 드드드득-!
영혼이라도 깃든 생명체처럼 발악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기이했다.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창이 스스로 지면에서 ‘붕’ 떠올랐다.
동시에 창날이 쉴 새 없이 진동을 일으키며, 기이한 울음을 토해냈다.
우우우웅-!
허공에서 방향을 트는 창끝은 흡사 먹잇감을 노려보는 뱀의 머리 같았다.
용화창은 곧이어 똬리를 틀 듯 천천히 유설의 주위를 선회했다.
무학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지고한 경지. 기(氣)를 사용하여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무기를 다루는 어창술(馭槍術)이었다.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용화창은 점차 반경을 넓히며 빨라졌다.
쐐에에에엑-!
바람을 찢는 기괴한 파공음이 요동쳤다.
강풍이 휘몰아치며 유설의 주변으로 회오리가 일어났다.
그렇게 섬전처럼 움직이던 용화창이 어느 순간 궤도를 바꾸었다.
하늘을 향한 창끝은 용이 승천을 하듯 끝없이 솟구쳐 올랐다.
용화창은 그렇게 수백여 장을 치솟아서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소음이 사그라지며 주변이 고요해진 그때.
구름 아래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창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떨어져 내렸다.
휘리리리릭-!!
가히 벼락이 내려꽂히듯 엄청난 기세였다.
그것은 앉아있는 유설의 코앞에서 거짓말처럼 ‘뚝’ 정지했다.
곧이어 바람결에 살랑거리듯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조금씩 느릿해졌으며, 잠시 뒤에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감겨 있던 유설의 두 눈이 처음으로 뜨였다.
“휴, 힘들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내력의 소모가 극심한 어창술을 무리해서 펼쳤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비어버린 단전은 다시 보충하면 그뿐이었다.
운기조식이 시작된 지 얼마 후. 유설의 입가가 미소를 그렸다. 무림맹주와 싸우는 상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수련하면 만날 수 있어.’
기를 쓰고 어창술에 매진한 이유였다.
작전이나 술수 따위는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힘으로 박살 낸다. 그것이 바로 유설의 정의였다.
마음은 급했지만, 어창술이 능숙해지면 할아버지가 대결을 주선해줄 터. 유설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어창술은 기로 무기를 조종하는 기술인 만큼, 정신적인 소모가 엄청나다.
하지만 유설은 지치지도 않는지 수련과 운기조식을 끝없이 반복했다.
타고난 집념과 끈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유진산조차 매번 놀랄 정도였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수련은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정상인이었으면 지치기 전에 먼저 미쳤을 것이다.
“……배고파.”
수련은 배가 고파진 시점에서야 멈추었다.
며칠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선 유설은 아랫배를 부둥켜 잡고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점차 얼굴에 심술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안 왔네. 나한테 얘기도 없이.”
잠시 패도문에 다녀온다던 할아버지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이미 체감상 며칠이나 지났거늘.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난번처럼 백규 삼촌과 술판을 벌이느라 늦게 오는 것일까? 갑자기 서러운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유설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부엌으로 향했다.
냄비들을 열어보았지만, 역시나 텅 비어있었다.
집에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다니? 억누르던 감정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부엌 맡에 선 유설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비록 요리에 취미가 있지만, 남에게 해주는 것만 좋아할 뿐이었다. 직접 만든 음식은 잘 먹지 않았다.
시장으로 나갈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눈물을 찔끔거리던 얼굴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장원의 입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 계십니까?”
긴장되고 경직된 음성.
그리고 느껴지는 기의 흐름으로 보아 다섯 명이었다.
입구를 향해 후다닥 달려가자 낯익은 인물들이 보였다.
공손히 손을 모으고 있는 그들은 시장에서 보았던 극살오의였다.
“아저씨들, 우리 집엔 무슨 일이에요?”
유설은 말을 하면서도 그들의 양손을 살펴보고 있었다. 모두가 한 보따리씩 무엇인가를 들고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까지.
우울했던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전에 한번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혹시라도 결례를 범했다면 사죄드립니다.”
이미 음식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유설은 망설임 없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와요.”
음괴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일까? 긴장이 풀어진 극살오의도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전각 옆의 정자였다. 평소 유설이 할아버지와 함께 간식을 먹는 곳이기도 했다.
“별거 아니지만, 저희의 작은 성의이오니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두리번거리던 유설은 음식이 들어있는 보따리만 귀신같이 골라서 풀어보았다.
이색적인 모양의 월병과 비싼 과일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주전부리 등이 가득했다.
분홍빛이 감도는 월병을 한입 베어 물자 꽃향기가 입안 가득히 퍼졌다.
“이건 뭐예요?”
“식용 꽃으로 만든 월병입니다. 입맛에 맞으시는지요?”
“와아~ 나 이런 거 처음 먹어봐요. 너무 맛있어!”
월병을 단번에 입으로 욱여넣은 유설은 다른 음식도 집어 들었다.
처음으로 맛보는 간식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극살오의가 흐뭇한 미소로 앞다투어 아부를 이어갔다.
“그건 자라고기를 특별한 향신료와 함께 건조해서 만든 육포입니다. 황실에서만 먹는 진귀한 음식이지요.”
“이건 서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금설차입니다. 달곰하니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유설은 그들이 건네는 죽통을 건네받아 꿀꺽꿀꺽 들이켰다.
부드러운 목 넘김과 상큼한 향까지. 지금까지 먹어본 적 없는 귀한 음료임이 확실했다.
기분이 좋아진 유설이 선심을 쓰듯 물었다.
“근데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단순한 선물치고는 과한 부분이 있었다.
이렇게 값비싼 것들을 가져왔으니, 분명 원하는 게 있을 터.
하지만 극살오의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원하는 것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단지 대협께 인사나 드리려고 왔을 뿐입니다.”
극살오의 또한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 고수들이다. 하지만 명성으로 비교하면 음괴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강호에서 인맥을 쌓기 위함이었을까?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유설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것이 우리 가문의 원칙이에요.”
유설은 설명 대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극살오의는 어리둥절하며 음괴를 기다렸다.
다시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약 반 각이 지난 뒤.
성큼성큼 다가오는 유설의 손에는 삼이 다섯 뿌리가 쥐어져 있었다.
“아저씨들, 이런 거 본 적 있어요?”
극살오의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하에서 의식을 통해 만들어진 씨앗으로 재배한 영약이었으니.
냉큼 가서 다섯 뿌리를 캐온 것이다.
“이토록 사람 형상과 일치하는 삼은 처음 보는군요.”
“이게 무엇입니까?”
유설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그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진산삼이에요. 어서 하나씩 먹어봐요.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영약이니깐.”
진산삼이라는 영약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직접 지어낸 것이었으니까.
한편 영약이라는 말에 다섯 명의 사파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 영약이라고요?”
“이런 귀한 것을 어찌 저희에게 하사해주시는 겁니까?”
유설은 선심을 쓰듯 어서 먹으라고 손짓을 했다.
“괜찮으니 먹고 부족하면 얘기해요. 많이 있으니까.”
뒷마당에서 대량으로 재배 중이었기에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그들은 복용을 머뭇거렸다.
비록 약재라는 것이 효능에 높낮이가 있다지만, 영약이라 불릴 정도라면 굉장한 보물일 터.
이 귀중한 것을 선뜻 받아먹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리라.
극살오의 중 맏형인 천우환이 감격하며 물었다.
“정, 정말 먹어도 되는 겁니까?”
“왜요? 내가 독 뿌리를 준 것 같아서 무서워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음괴가 자신들을 해할 마음이 있었다면, 뭐하러 이런 귀찮은 방법을 쓰겠는가.
감동한 천우환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깊게 포권했다.
“그, 그럴 리가요.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진산삼을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입에서 ‘오도독’ 씹는 소리가 경쾌히 들려오길 잠시 후.
그의 두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오열을 하며 입을 틀어막는 것이 아닌가.
“끄허헉!”
“왜 울어요? 맛이 없어요?”
“아, 아닙니다……. 크흐흑.”
대답하는 그의 눈이 반쯤 뒤집혀 있었다.
그 모습에 다른 형제들도 감격하며 진산삼을 복용했다.
나머지 넷의 반응도 천우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끄으윽.”
“으흐흐흑!”
통곡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운데.
유설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그들의 단전에 내기를 불어넣었다. 기혈의 순환을 도와 영약의 효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일각이 지나서야 극살오의는 하나둘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유설이 기대 서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요? 효과가 있어요?”
천우환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소매로 닦으며 답했다.
“예. 확실히 내공이 증진된 효과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협.”
유설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은근슬쩍 물었다.
“내 말이 맞죠? 한 뿌리 더 먹어볼래요?”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다급히 양손을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더는 저희가 부담스러워서…….”
예상했던 결과였기 때문일까? 유설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근데 아저씨들,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대협. 저희가 아는 거라면 뭐든 답해드리겠습니다.”
유설은 머뭇거림 없이 궁금한 것을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맹주가 어딨는지 알아요?”
뜬금없이 웬 맹주란 말인가. 극살오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했다.
“맹, 맹주라니요?”
“설, 설마 저희가 아는 그 무림맹주를 말씀하는 겁니까?”
유설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따 우리 할배 돌아오면 같이 잡으러 갈래요?”
음괴의 한마디에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무림맹주가 누구인가. 정파의 제일고수이자 무림 최고의 권력가로 하늘 같은 존재였다.
그런 절대자를 동네 강아지 때려잡듯 말하다니? 아무리 천하의 음괴라도 미친 짓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무, 무림맹주가 어디 있는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협.”
아무래도 총타에 있을 확률이 높았지만,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잘못 엮이기라도 했다간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할 터였으니.
“에휴.”
유설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이 신경 쓰였기 때문일까? 잠시 머뭇거리던 천우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신 다른 녀석들을 손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독사 같은 놈들이 모인 곳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유설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안 해요. 재미없어요.”
“그래도 자세히 들어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어딘데요?”
천우환이 유설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을 마친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