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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03화 (203/238)

203화 손님맞이 (1)

패도문의 분위기는 몹시 달라져 있었다.

물샐틈없는 경계 태세로 전에 없던 긴장감이 넘쳐 흘렀다.

문주의 집무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유진산과 마주 앉은 백규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하핫! 정말 축하하오, 형님. 헌데 어떻게 화경의 벽을 허무신 거요?”

며칠 만에 나타난 유진산이 화경의 고수가 되어 나타났으니 기쁠 수밖에.

진심으로 축하하는 모습이었다.

“얼떨결에 그리되었네. 안마를 받다가 깨달음을 얻어 각성할 수 있었지.”

“지금 안마라고 하셨소? 세상에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화경의 깨달음이란 선택받은 자들만이 얻는 천운 같은 기연이었다. 백규도 이십 년의 노력 끝에 겨우 도달하지 않았던가.

편하게 안마나 받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니 믿기지 않을 수밖에.

백규의 반응은 당연했다. 유진산이 생각해도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는 일이었으니까.

“아우가 믿든 안 믿든 분명한 사실일세. 당시의 나는 극락을 경험했네.”

“혹시 안마사가 부처님이었소?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였거나.”

그의 농담에 유진산도 피식 웃고야 말았다.

“뭐 얼추 비슷하게는 맞췄구만. 그 안마사는 바로 선녀보다 더 예쁜 내 손녀였네.”

그 순간 백규가 손뼉을 한 번 부딪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핫! 이럴 수가. 설이가 그런 재주가 있었단 말이오?”

“천부적인 재능과 감각을 지닌 아이일세. 태생부터가 우리와는 달라.”

“하하! 나도 그 말에 동의하오. 내 장담컨대 무림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거요.”

“그나저나 아우는 지금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는가.”

곧 있으면 혈사객이 패도문으로 도전하러 올 터였다.

그러나 백규의 얼굴엔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형님 말대로 이미 도전도 거부했는데, 뭐가 걱정이란 말이오?”

“그래도 놈은 분명히 이곳으로 쳐들어올 걸세.”

“음. 그건 좀 곤란한데, 어찌하면 좋겠소?”

유진산은 옆에 세워 놓은 자신의 용살창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아우와 함께 싸워주겠네.”

“이대 일로 말이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도전을 거부했음에도 싸우러 오는 것이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애들 보는 앞에서 조금 비겁하지 않소?”

“웃기는군. 사파가 언제부터 그렇게 정정당당하게만 싸워왔는가.”

백규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곤륜무제까지 당한 마당에 자신이 홀로 싸워 이길 자신은 없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요즘 정파 놈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비겁한 것도 아니오. 형님 말대로 하겠소.”

유진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잘 생각했네. 강호에서 명줄을 단축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명예에 집착하는 것이네.”

“그것참 맞는 말이오. 아마도 형님은 끝까지 살아남을 거요.”

그 순간 둘이 동시에 배꼽을 잡고 껄껄 웃었다.

잠시 뒤에서야 웃음을 멈춘 유진산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가 승자 아니겠는가. 어쨌거나 우리 둘이서 가능할지 모르겠군.”

“그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화경 둘을 당해낼 수 있겠소?”

“우린 천축의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는가. 놈들에 대해 연구해왔던 놈들은 창룡대인데, 우리와는 원수들이고.”

승산은 있었지만, 무조건 유리하다고만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다른 안배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설이도 없지 않소? 다른 애들을 끌어들이기엔 위험하고.”

유진산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직이 말했다.

“한 명 있지 않은가.”

“설마…… 스님 말이오?”

“맞네. 여차하면 땡중의 도움까지도 받을 수 있을 걸세.”

백규와 정혜. 그리고 자신까지 포함하면 무려 화경이 셋이었다.

무서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셋이 함께라면 누가 쳐들어오더라도 문제없을 거요.”

“음. 나도 아우 말에 동의하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

백규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밝아졌다.

“그런데 스님한테도 이 내용을 알려줘야 하지 않소?”

“음. 아직은 얘기하지 마시게. 원수가 천축에 있는 만큼, 자칫 폭주하여 일을 그르칠 수 있네.”

“어차피 내 말은 듣지도 않소. 형님밖에 통제할 수가 없는 분이니까.”

유진산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정혜에게 쩔쩔매는 백규의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정신이 정상은 아니었으나, 소림의 당대 제일고수인 혜광의 사부이자 엄청난 고수였다.

“땡중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아우는 문도들과 아이들을 뒤쪽으로 대피시키게. 괜히 휘말려서 다칠 수가 있으니.”

“알겠소, 형님. 나도 마침 그럴 생각이었소.”

백규와 유진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그때.

갑자기 그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방금 아우도 느꼈는가?”

백규가 집무실의 벽면에서 자신의 쌍도를 집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놈이 한발 빨리 온 것 같소.”

“어서 나가보세.”

그 순간 어딘가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왜, 왜 이러시는 거요?”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소?”

패도문의 문도들이 입구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단 한 명의 불청객 때문이었다.

승려처럼 가사를 두르고 있었으나, 그 모습이 무척이나 괴이했다.

거무튀튀한 피부에 목에는 굵은 염주를 차고 있었고, 피처럼 붉은 문양이 새겨진 얼굴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리고 양손에는 환(環)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고리 형상의 날카로운 무기로 중원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무기였다.

“도전하러 왔다. 패도문의 문주는 어디 있는가.”

어눌한 음성이었지만, 확실히 중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패도문의 문도 중 한 명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 문주께서는 대결할 마음이 없다고 하셨소. 그러니 어서 돌아…….”

그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인후에서 갑자기 핏줄기가 솟구쳤기 때문이다.

지켜본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문도들은 몸이 얼어붙어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괴승이 앞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저벅-!

그 순간 또다시 두 명의 문도가 비명과 함께 쓰러져갔다.

양손에 움켜쥔 날카로운 고리에 핏줄기가 맺혀 있을 뿐. 아무도 그의 공격 장면을 제대로 보질 못했다.

압도적인 무공의 차이에 모두가 경악했다.

문도들은 공포에 질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소란이 거세졌기 때문일까? 어디선가 무기를 움켜쥔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과 기세는 패도문의 문도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삼촌, 어서 일어나요!”

“이 나쁜 새끼!”

문도들의 시체를 본 아이들은 두 눈에 독기가 서렸다.

죽음 따위는 무섭지 않다는 지독한 눈빛이었다.

정식 문도들이 겁에 질렸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미산의 지옥 같은 훈련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탈출한 특출난 아이들이었으니까.

개중에는 실력이 가장 뛰어난 청풍도 있었다.

그때 무표정하던 괴승의 얼굴이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있었군. 창룡대라는 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단번에 아이들의 신분을 눈치챘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청풍이 중심에서 어깨 위로 검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무량살검진(無量殺劍陳)!”

아미산의 훈련장에서 배운 창룡대의 진법이었다.

아이들이 청풍의 주위로 몰려들며 기수식을 취했다.

모두의 검에서 검기가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심지어 몇 명은 검강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괴승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너희들은 오늘 모두 죽어야겠구나.”

후환을 모두 제거하겠다는 의미이리라.

당황하던 문도들은 용기를 내어 아이들의 주변에서 자세를 잡았다.

긴장감이 극에 달한 그 순간.

어디선가 분노에 사무친 고함이 뿜어져 나왔다.

“얼굴 까만 새끼!”

아이들의 후미에서 황금빛 빛살이 머리 위를 타고 넘어와 괴승을 덮쳤다.

가히 섬전처럼 빠른 속도였다.

난데없는 기습으로 괴승의 두 발이 지면을 주르륵 끌며 밀려났다.

하지만 전혀 타격은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새로 나타난 인물은 파계승 정혜였다. 그는 직선으로 주먹을 곧게 내뻗고 있었다.

그와 괴승이 서로 대치를 이어갈 찰나.

이곳으로 백규와 유진산도 연이어 도착했다.

“모두 물러나거라!”

든든한 지원군이 연이어 도착하자 모두의 얼굴에 안도가 서렸다.

반면 여유만만했던 괴승은 다소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황균!”

백규의 외침에 문도 중 한 명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문도였다.

“금방 끝날 테니 애들 데리고 모두 피해있어. 안 보이는 곳으로.”

황균이 호각을 불자 문도들과 아이들이 썰물 빠지듯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의문을 품거나 지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장원의 앞마당에는 네 명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쌍도를 움켜쥔 백규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앞으로 나섰다.

“내가 백규다. 네놈이 감히 우리 애들을 죽였겠다?”

괴승은 대답하지 않고 셋을 한 명씩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에게 승산이 있을지 탐색하는 것이리라.

그 시점에서 유진산은 은밀히 정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저놈이야? 동생이 말한 나쁜 놈이.”

그를 미치게까지 만들었던 철천지원수가 눈앞의 괴승이 맞는지 물어본 것이다.

정혜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똑같이 생겼지만, 저 새끼는 아니야. 얼굴이 더 까매야 해!”

“음. 그래도 똑같이 생겼으면 친구겠네?”

“응, 친구다! 나쁜 친구!”

“그럼 저놈을 잡아서 어딨는지 물어볼까?”

“알았어, 형아!”

화경급의 고수가 무려 셋이었다.

개중에는 무림십대고수에 비견될 만한 정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괴승은 당황하지 않았다. 조금 경직된 표정을 하고 있을 뿐.

그가 어눌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대결하러 온 것이다. 한 명씩 싸우겠다.”

문도들을 셋이나 죽여 놓고 일대일 승부를 원하다니.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백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유진산을 한번 바라보았다.

쉬운 길이 있거늘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일말의 고민도 할 필요가 없었다.

“미친놈이니, 그냥 무시하게.”

“나도 그럴 생각이었소.”

가장 강한 정혜가 괴승의 정면을 맡았다.

그리고 백규와 유진산은 살금살금 좌우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도망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단지 양손을 합장한 채 쉴 새 없이 이상한 염불을 외우고 있을 뿐이었다.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앞장서서 선공을 개시하려던 백규가 돌연 움찔거렸다.

갑자기 괴승의 전신에서 붉은 기류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흡사 전신의 모공에서 혈무(血霧)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그에게서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의 기세였다.

자세를 낮춘 백규가 돌진태세를 갖추며 물었다.

“진산 형님. 지금껏 저런 무공 본 적 있소?”

“나도 뭔지 잘 모르겠네. 일단 조심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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