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손님맞이 (2)
유진산은 백규와 함께 괴승의 측면으로 접근하는 한편, 정혜에게 전음을 보냈다.
- 우리가 싸울 동안 동생은 도망치지 못하게 퇴로를 막아줘.
이미 독 안에든 생쥐나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승기를 잡으면 바로 도망치려 할 터.
놓친다면 큰 후환이 될 것이기에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그리고 직접 합을 나눠보면서 천축의 무공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자신감인지 괴승은 조금도 물러서질 않았다. 전신으로 붉은 기류만을 뿜어내고 있을 뿐.
그때 머릿속으로 정혜의 전음이 들려왔다.
- 정혜도 같이 싸워야 해. 안 그러면 설이가 슬퍼한다!
- 우리 설이가 왜 슬퍼해?
- 형이 죽을 테니까!
자신을 놀리는 것이리라.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다니. 유진산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못 도망치게 잘 막기나 해.
초절정의 수준에서 머무르던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그때 백규가 측면에서 눈짓을 보내왔다. 먼저 선공을 개시하겠다는 의미였다.
유진산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일 찰나.
두 자루의 쌍도를 움켜쥔 백규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패도문의 상승무공인 귀두공을 대성한 인물이었다.
마치 성난 들소가 돌진하듯 그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상대와의 거리가 삼 장 이내로 좁혀진 그때.
돌연 합장하고 있던 괴승이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그의 손목에 걸려 있던 날카로운 고리 두 개가 맹렬히 쏘아져 나갔다.
환(環)이라 불리는 이 특수한 무기는 백규도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다가오는 모습이 몹시 위협적이었다.
백규는 침착하게 양손의 쌍도로 두 개의 환을 동시에 후려쳤다.
기세 좋게 쳐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백규는 당황하며 즉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튕겨 날아가던 환이 방향을 틀며 다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르고, 더욱 거센 움직임이었다.
기회를 엿보던 유진산도 몹시 놀라고 있었다.
‘설마 기(氣)로 환을 조종하고 있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어창술과 같은 지고한 경지로, 유설도 겨우 가능한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동시에 두 개라니?
어떻게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환을 움직이며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어딘가 석연치 않으면서도 찝찝했다.
카앙-! 카캉-!! 카카캉-!!
백규는 미친 듯이 움직이며 다가오는 환을 계속해서 쳐내었다.
괴승에게 접근하긴커녕 방어에도 급급한 모습이었다.
지켜만 볼 수가 없었기에 유진산도 행동을 개시했다.
용살창을 움켜쥔 그는 허공을 밟고 괴승의 측면으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백규를 압박하던 두 개의 환 중 하나가 방향을 틀며, 유진산을 향해 다가갔다.
찰나의 순간 용살창이 붉은빛을 발하며 다가오는 환과 부딪혔다.
지면에 내려선 유진산은 곧바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튕겨 날아가던 환이 방향을 틀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피한 후에 단숨에 접근한다.’
그것이 유진산의 계획이었다.
그는 다급히 상체를 뒤로 눕혀 얼굴 위로 환을 흘려보냈다.
맹렬히 회전하며 코앞을 지나치는 환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환에 연결된 모습도.
스르릉-!
자신의 머리카락 일부가 가느다란 실에 잘려나가는 소리였다.
유진산은 이제야 영문을 알아챌 수 있었다.
고리에 실을 매달아서 부리고 있었다니. 게다가 일반적인 실이 아닌 듯했다.
그 순간 뒤늦게 백규의 경고가 들려왔다.
“천잠사를 연결한 것 같으니, 조심하시오!”
천잠사(天蠶絲)가 무엇인가. 영물에게서 뽑아낸 귀중한 실로 검기에도 잘리지 않는 단단한 강도를 지닌다.
그러나 괴승의 무기에 연결된 것은 천잠사보다 더 예리하고, 강한 탄성을 지닌 듯했다. 어지간한 무기는 단번에 두 동강 낼 수 있을 만큼.
이렇게 비겁한 무기를 지니고 있을 줄이야.
유진산은 회피와 방어를 이어가면서도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이 비열한 녀석!”
두 명의 절대고수가 괴승에게 접근도 못 하고 고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골치 아픈 무기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일 터.
‘오냐, 누구 무기가 더 강한지 어디 두고 보자!’
유진산은 정면 승부를 택했다.
저것이 무엇이든 용살창이 밀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최고의 명인이 신수의 영혼을 담아 만든 명창이었으니까.
자세를 낮춘 그는 묵묵히 환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어깨 위로 창을 잡아당긴 모습이 마치 물고기를 잡기 위해 작살을 움켜쥔 모습처럼 보였다.
크게 호흡을 들이켠 그는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맹렬히 다가오는 환이 일 장 이내로 접근하는 순간. 그의 어깨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유가살풍창 오초식 이내반추(理內反錐). 상대의 무기를 낚아채는 기술이었다.
유진산이 내지른 창끝이 정확히 고리의 내부로 진입했다.
곧이어 창날에 끼인 고리가 쉼 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극-!!!
환의 내측이 불꽃을 일으키며 빠져나가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유진산은 고리를 끼워놓은 채로 창을 회전시켜 실을 통째로 휘감아버렸다.
드디어 이 괴상한 무기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곧이어 백규도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환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한 자루의 도가 환의 중심부를 파고든 채 바닥에 푹 꽂혀버렸다.
이제 남은 일은 괴승을 제압하는 것뿐.
유진산과 백규가 다시 그를 향해 좌우에서 다가갔다.
하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기를 잃었음에도 괴승이 당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보군.”
괴승은 대답하지 않고 양손을 모은 채 합장만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유진산과 백규는 눈빛을 교환하고는 동시에 돌진했다.
타탓-!!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아무런 방어태세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싸움을 포기한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이유는 없었다.
붉은 강기를 머금은 용살창의 창끝이 괴승의 옆구리를 향해 송곳처럼 파고들기 시작했다.
쏴아아앙-!
백규도 반대편에서 도강을 내뿜으며 그를 양단하고 있었다.
둘은 이번이 마지막 일격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단단한 오산이었다.
두 자루의 무기가 괴승의 몸에 적중하기 직전. 돌연 그의 전신에서 핏빛을 띤 기공의 막이 물결처럼 뿜어져 나왔다.
꽈아아아앙-!!!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충격에 유진산과 백규는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뭐지? 이 사악한 무공은?’
용살창을 쥔 양팔이 얼얼했다.
충격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오다니. 무림에서도 반탄강기라는 비슷한 무공이 있지만, 위력 자체가 달랐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괴승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기 때문이다.
자세를 다잡기도 전에 그의 신형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보법이었다.
찰나의 순간 유진산은 등골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화경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은밀한 느낌이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재빨리 등 뒤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기분 나쁜 핏빛 기운이 자신을 덮쳐오고 있었다.
자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일까? 용케도 막는 것은 성공했지만, 완벽하진 못했다.
유진산의 신형이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러나 자신의 사정을 봐줄 괴승이 아니었다.
핏빛 강기에 휩싸인 놈의 손아귀가 앞가슴을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해지는 그 순간.
전광석화처럼 달려온 백규가 도강으로 놈의 일격을 거둬냈다.
유진산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다. 괴승의 맹공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던 백규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진산도 옆에서 힘을 보탰다.
백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용살창이 바삐 움직였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리듯 핏빛 강기가 쉴 새 없이 몰아쳐 왔다.
믿을 수 없게도 이대 일의 상황에서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디 무공이란 초식이 있고, 연계 후엔 호흡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법칙을 무시한 괴상망측하고 사악한 무공이었다.
그렇다고 역근경을 실전에서 써먹기엔 아직 화후가 충분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무공들의 정체가 뭐야!?’
상상을 뛰어넘는 강함이었다.
도대체 천축에 이러한 고수가 얼마나 더 있단 말인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신없이 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지금이야, 동생!”
자신들을 압도하는 든든한 고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혜가 즉시 움직임을 개시했다.
찰나의 순간 괴승의 옆구리에 폭음이 일어났다.
정혜가 기습하여 그에게 일장을 날린 것이다.
괴승의 두 발이 지면을 끌며 주르륵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작은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조금의 표정 변화조차도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내뱉은 말은 단 한마디였다.
“너는…… 강하군.”
정혜가 그의 정면에 서서 해맑게 웃어 보였다.
“푸히히히! 얼굴 까만 새끼는 정혜한테 다 죽는다!”
괴승의 얼굴에 처음으로 긴장감이 서렸다.
정혜의 무공이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그때 숨을 돌리게 된 유진산이 공격태세를 갖추며 백규에게 말했다.
“천축의 무공이 어떤지는 확인을 마쳤으니, 이제부터 제대로 싸워보세.”
“지금부터 패도문의 무공이 뭔지 보여주겠소.”
그 순간 정혜의 전신에서 황금빛 광채가 타올랐다.
동시에 실성한 사람처럼 째진 눈과 입으로 정신없이 웃고 있었다.
“이히히히히!!!”
삼대 일의 싸움. 게다가 정혜의 역근경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
유진산은 괴승의 동공이 은밀히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예상대로 퇴각할 궁리를 하는 것이리라.
절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
“가자, 동생!”
정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괴승을 향해 돌진했다.
백규가 그를 보조했고, 유진산은 측면으로 돌며 그의 퇴로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
시작과 동시에 정혜와 괴승의 맨손 난타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쩌억-! 콰앙-! 콰직-!!
정혜의 움직임에는 오직 공격만이 존재했다. 그야말로 방어를 도외시한 무식한 공격이었다.
놀랍게도 괴승의 타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되돌려주고 있었다.
피부가 터지고, 피멍이 들어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금강불괴신공을 십 성까지 연마했다고 한들, 제정신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싸움방식이었다.
옆에서 백규가 보조하며 그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었으니, 불리할 것은 없었다.
잠시 후 놈의 후미에서 유진산이 합류하자 승패가 완전히 기울어 버렸다.
촤아악-! 쩌억-! 콰직-!!
사방에서 공격을 적중시키고 있었으나, 특이하고 요상한 호신강기 때문에 치명타를 입히질 못하고 있었다.
괴승이 궁지에 몰리자 그의 주위로 강력한 기의 응집이 느껴졌다.
그가 무엇을 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수는 없는 법.
유진산과 정혜는 대나이신법으로 거리를 벌렸으며, 백규는 이형환위를 펼쳐 물러났다.
그 순간 괴승의 주변으로 핏빛을 띤 기공의 막이 또다시 펼쳐졌다.
곧이어 장막이 사그라지는 그 순간, 놈을 포위한 셋이 또다시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쩌억-! 콰직-! 쿵-!!
유진산은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기가 질렸다.
사방에서 때리고, 베고, 찔러도 괴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껏 이렇게 지독한 상대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피해가 누적되다 보면 쓰러질 수밖에 없을 터.
잠시 후면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든 혈사객을 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