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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06화 (206/238)

206화 속죄의 기회 (2)

전각 아래에 존재하는 지하 깊숙한 공간.

종교적인 의식이 행해졌던 이곳은 지금 속죄의 방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기이한 석상 앞에 묶인 괴승이 어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 사악한 놈들. 너희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

유진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따귀를 날렸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 지가 쳐들어와서 잡혀 놓고, 누구한테 사악하다는 거야?”

“너희들은…… 전부 죽을 것이다. 죽어야 해.”

괴승은 계속해서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여러 명에게 공격당한 것이 억울한 것일까?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심문하는데 그의 감정까지 고려할 이유는 없었다.

“시끄럽고, 어서 아는 대로 실토하거라. 기회를 줄 때 말이야.”

천축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있는지? 그리고 괴승이 그들 중 어느 정도의 서열에 있는지도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충만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백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 사도련의 기술자들에게 한번 맡겨보는 게 어떻소?”

좋게 말해 기술자들이지, 고문을 전문적으로 하는 자들이리라.

사도련에 그런 자들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진산이 알기로 무림맹에도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어떤 고통을 주더라도 신음 한 번 하지 않을 터였다.

“소용없을 걸세. 고통에서는 해탈한 놈이니까.”

“형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다른 방법도 없지 않소?”

고문은 물론 설득조차 통하지 않을 터. 이토록 강한 신념을 가진 자들을 많이 봐와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백규가 괴승에게 다가가 중얼거렸다.

“일단 단전부터 전폐시켜 놓고 나서,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현재는 가느다란 실을 겹쳐서 묶어놓은 상태였다. 괴승의 무기인 환(環)에 연결되었던 것으로 엄청난 탄성과 강도를 지닌 물건이었다.

하지만 위험한 놈인 만큼 이것만으로는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때 유진산이 다급히 그를 만류했다.

“잠깐 기다리시게.”

괴승의 단전을 전폐하려던 백규가 한발 물러서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화근은 미리 제거해둬야 하지 않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얘기 좀 해보겠네.”

유진산이 괴승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물었다.

“일대일로 싸우지 못해 억울한가?”

“원한다면 기회를 한 번 주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규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절대고수가 셋이나 동원되어 제압했을 정도로 무서운 인물이었다.

힘들게 잡아놓고 다시 풀어준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형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요?”

“날 믿고 잠시 기다려주게.”

그 순간 괴승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원무림의 그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

물론 일대일의 대결을 가정하고 얘기하는 것이리라. 어쨌거나 정말 오만한 자신감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놈이 이곳의 고수들을 아주 호구로 보고 있구나.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너 자신을 시험해 볼 기회를 주마.”

“나를…… 풀어준다는 말인가?”

“그래. 다시 한번 일대일로 대결을 펼치고, 네가 이긴다면 떠날 수 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가 의구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갑자기 자신을 풀어주고, 기회까지 주겠다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믿든 안 믿든 네 자유지, 내가 그걸 어떻게 증명해줘? 어차피 손해 볼 건 없을 텐데?”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으니까.

“수락하겠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조건이 있어.”

괴승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말하라.”

“네가 몸담은 조직의 정보를 알려주기만 하면 돼. 네가 패배한다면 말이지.”

“그건 불가하다.”

유진산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비웃었다.

“조금 전에는 누구와 싸우든 무조건 이긴다고 하지 않았나. 근데 뭐가 문제지?”

괴승이 말끝을 흐리자 유진산이 그를 더욱 도발했다.

“왜 갑자기 자신감이 쪼그라드셨는가. 겁을 먹은 게로군.”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둘 중에서 누가 나와 싸울 건가.”

“뭔가 오해하고 있군. 왜 우리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그럼 누가…….”

유진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호흡을 깊게 들이켠 후 위쪽을 향해 힘껏 소리쳤다.

“아가, 잠시 밑으로 내려오너라!!”

내공을 담은 육성이었기에 지하가 쩌렁쩌렁 울렸다.

괴승이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리라.

시장에서 자신을 제압했던 절세고수를 부르는 것임을.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중원무림의 고수는 전부 이길 수 있다면서.”

괴승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승산이 있는지를.

그렇지 않아도 제대로 다시 한번 싸워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시에 자신이 방심하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몸이 녹초가 된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어이없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층에서 유설이 후다닥 내려왔다.

“할배, 나 불렀어?”

“오냐. 이 녀석하고 좀 싸워줄 수 있겠느냐.”

유설이 검지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

“그래. 요즘 몸이 근질근질해서 심심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유설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했다.

“정말? 신난다~”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서 불안함을 느낀 것일까? 괴승이 다급히 유진산을 불렀다.

“잠, 잠깐.”

“왜? 그사이 또 마음이 바뀌었더냐?”

“아니다. 나는 아직…… 부상이 회복되지 않았다.”

괴승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세 명의 절대고수에게 난타를 당했으며, 음괴에게 걸려서 기절할 때까지 맞았으니까.

만만치 않은 상대인 만큼 최상의 몸 상태로 싸우려는 것이 당연했다.

유진산은 선심을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승부는 정정당당해야 하는 법이지. 나흘이면 괜찮겠는가?”

“충분하다.”

유진산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를 포박하던 끈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도주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은 깊은 지하 광장이었으며, 출입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위층에 있을 음양쌍괴를 홀로 쓰러트리고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건은 믿어도 되는 거겠지?”

“물론이다. 내가 패배한다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주겠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문제는 그가 약속을 지킬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유진산은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

강한 신념을 지닌 자들은 본디 맹세를 중하게 여기는 법.

“맹세할 수 있겠는가.”

“소뢰음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세력의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유진산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그동안 조사하면서 알아낸 이름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혹시 천축에 또 다른 세력이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의 궁금증은 더해져만 갔다.

“창룡대 놈들은 일천교라고 부르던데, 소뢰음사는 뭐지? 믿어도 되는 맹세인지 모르겠군.”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한 번 떠본 것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괴승이 순순히 답해주었다. 아마도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리라.

“다르지 않다. 오래전 소뢰음사가 천축을 통일한 이후부터 그렇게도 불린다.”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의 한마디에서 여러 가지를 유추해낼 수가 있었다.

‘천축에도 많은 세력이 있었겠지. 그들이 통합되어 일천교가 된 것이로군.’

그리고 일천교의 중심이 소뢰음사인 듯했다. 무림세력으로 따지면 총타인 셈이리라.

나머지 내용은 나흘 후에나 알 수 있을 터.

당장 이곳에서 더는 얻을 것이 없을 듯했다.

“나흘 후에 다시 내려올 테니, 회복에 전념하게. 최후의 싸움일 테니.”

지상으로 올라온 유진산은 정자에서 백규와 마주 앉았다.

그가 찻잔을 움켜쥔 채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셋을 상대로 조금 버텼다고, 설이도 이길 줄 아나 보오.”

“요즘 세상에 자살하려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군.”

놈은 음괴의 무공 수준에 대해 짐작하지 못하는 듯했다.

정혜와 백규, 그리고 유진산까지. 이 셋이 힘을 합쳐도 당해낼 엄두를 못 내는 현경의 고수였다.

“역시 대단하오, 형님. 정말 놈이 걸려들 줄은 몰랐소.”

“운이 좋았지. 콧대 높은 놈의 자존심을 이용한 것뿐일세.”

백규는 손에 쥔 찻잔을 단번에 비우고는 탁 내려놓았다.

“근데 아까 소뢰음사니 일천교니 하던데, 생각보다 세력이 엄청난 것 같소.”

유진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 짐작으로는 세력뿐 아니라 무공의 수준도 우리를 넘어섰을 걸세.”

“이미 겪어보긴 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소. 그저 변방이라 생각했거늘, 어찌 그렇게 강한 자들이…….”

“우리 설이가 익힌 절세신공도 사실 천축의 무공일세. 이해가 되는가?”

백규가 놀란 눈을 부릅떴다.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그 말이 정말 사실이오?”

“현장이라는 승려에 대해 알고 있는가.”

“오래전 불경을 구하려고 천축을 다녀왔다던 그 삼장법사 말이오?”

“맞네. 그가 그곳에서 목숨 걸고 훔쳐온 비급이 바로 불문사자신공일세.”

그동안 중원무림은 천축과 교류가 단절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정보가 없는 상황이었다.

드러나는 사실들이 와닿지 않았기 때문일까? 백규는 한동안 말문을 이어가지 못했다.

잠시 후 그가 한층 어두워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믿기지 않소. 그들의 무공이 그렇게 대단했다니.”

“음. 아우는 중원무림의 무공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역사로 따지면 소림사의 조사인 달마 아니겠소?”

“맞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 헌데 그 달마가 천축인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는가.”

“정말 오늘 형님이 작정하고 아우를 놀라게 하는구려.”

당황하는 백규와는 달리 유진산은 태연하기만 했다.

“어쨌거나 중원무공의 시초가 천축인 만큼, 우리보다 뛰어나도 이상한 일은 아닐세.”

“그럼 지금부터 우리가 뭘 하는 게 좋겠소?”

“무슨 일이든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네. 그리고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

그때 백규가 뭔가를 눈치챈 듯 헛웃음을 집어삼키며 물었다.

“설마 혈사객과 대결을 성사시킨 것도, 설이의 경험을 쌓게 해주려는 의도였소?”

“제대로 보았네. 정보도 얻고, 경험도 쌓고. 일거양득 아니겠는가.”

손녀가 천축의 무공을 접해볼 수 있게 할 좋은 기회였다.

비록 원수는 무림맹에 있었지만, 미래에 어떤 일이 닥쳐올지 모르는 법. 그들에 대해서도 대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역시 우리 형님은 참 속도 깊으시오.”

유진산은 말없이 웃으며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했다.

손녀가 부엌과 전각을 계속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나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가, 어딜 그렇게 바쁘게 다녀? 그 음식들은 다 뭐야?”

“배불리 먹여야지. 상처가 빨리 낫게.”

그 말을 끝으로 유설은 다시 전각 안으로 쓱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규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형님. 방금 우리 조카 모습이 동물농장의 주인처럼 보였소.”

“나도 같은 생각을 했네. 돼지를 잡기 전에는 잘 먹여야 육질이 좋아진다더군.”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지 백규는 어깨를 사시나무 떨듯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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