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속죄의 기회 (3)
집 안에 틀어박힌 조손은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교대로 감시했다.
그동안 괴승은 단 한 번도 탈출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대결에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그는 회복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흘째가 되던 날.
아침부터 유설은 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왼손엔 용살창. 그리고 오른손에는 용화창을 움켜쥔 모습이었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두 자루의 쌍창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허공에 수를 놓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구석에서 지켜보던 유진산이 연신 갈채를 보냈다.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스스로가 돌풍이 되어, 죽음의 바람을 몰고 다니는 듯했다.
더는 완벽할 수가 없는 창술이었다.
잠시 후 연무장의 중심에서 유설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이제 끝난 것인 줄 알았으나, 오산이었다.
그 순간 용살창과 용화창의 손잡이 끝이 서로 맞물렸다.
두 자루의 단창이 하나로 결합되자, 무려 길이가 일장 반에 이르는 장창으로 변모했다.
쌍룡창이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엄청난 살상 반경을 과시했다.
쐐에엑-! 쐐에에엑-!!
바람을 찢는 파공음이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유진산은 넋을 놓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손녀의 수련 장면을 보는 것은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듯했다.
‘마치 적진을 질주하는 항우의 기개를 보는 것 같구나.’
무쌍처럼 강렬한 움직임은 반 각 정도 더 이어진 후에 멈추었다.
턱-!
유설은 쌍룡창을 세로로 세우고는 자신의 턱을 쓱 쓰다듬었다.
이어서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음. 이건 너무 길어서 못 쓰겠어.”
결합한 쌍룡창은 다 큰 어른의 체형으로도 부담스러운 길이였다.
아직은 사용이 불편할 수밖에.
“나중에 좀 더 크면 적응이 될 게다. 이제 몸은 다 푼 것이냐.”
쌍룡창을 해체한 유설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응, 이 순간만 기다려왔어. 나 금방 다녀올게.”
나흘 전부터 안달이 났던 손녀였다.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해 보였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니까 방심하면 안 돼.”
“알았어. 내가 부르면 밑으로 내려와.”
“그래, 조심하고.”
유진산은 멀어져가는 손녀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양손으로 두 자루의 창을 꼬나쥔 채 맹수처럼 걷는 모습이 무척 듬직했다.
이미 괴승에게도 두 개의 무기를 돌려준 상태였기에 동등한 상황이었다.
그를 생각하자 문득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애지중지 먹여 키운 가축을 잡아먹는 날이.’
손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진산은 장원 뒤쪽의 텃밭으로 이동했다.
무럭무럭 자라는 작물을 살펴보던 그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수확 시기가 다가오는 호박과 가지들.
그리고 한쪽에서 풍성히 자라나는 영약들까지.
‘진산삼이라고 이름 지었나? 이 녀석, 잘도 할애비 이름을 따서 작명하다니.’
고대의 의식을 통해 만들어진 씨앗으로 오직 이곳에만 존재하는 품종이었다.
손녀가 붙인 영약의 이름이 최초였으니,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밭에 쪼그려 앉은 그는 조심스럽게 진산삼을 한 뿌리 캐내었다.
지난번보다 크기가 더욱 커진 것이 아주 잘 익은 듯 보였다.
‘이건 수놈인가? 자랄수록 모습이 더 사람 같아 보이는구나.’
사람 형상의 뿌리를 먹는 게 조금 찜찜했지만, 어차피 생명이 없는 식물이었다.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냄새를 음미해보았다.
지난번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뭔가 싱그러운 향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맛은 어떻게 변했을까? 앞서 먹었던 고약했던 맛은 설익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지금은 충분히 자랐으니 괜찮을 수도 있을 터.
유진산은 조심스럽게 혀로 끝부분을 핥아 보았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혹시 지금은 먹을 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도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끝부분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도독-! 오도독-!
그렇게 몇 번을 씹었을 때였다.
처음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지만, 즙이 나오면서부터 한발 늦게 반응이 올라왔다.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헛구역질이 몸속의 모든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우에웩! 웨엑!!”
지난번보다 두 배는 더 고약해진 듯했다.
화경의 신체로 인해 미각이 더욱 발달했기 때문이리라.
두 눈에선 눈물까지 찔끔 흘러나왔다.
한참 뒤에서야 진정된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내공 증진에 효과가 있어서 일단 재배는 하고 있지만, 어떻게든 복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다른 음식에 섞어서 조리하는 것이었다.
뿌리를 움켜쥔 그는 성큼성큼 부엌으로 향했다.
‘모처럼 힘쓴 우리 손녀한테 영양탕이나 끓여줘야겠구나.’
모르고 먹으면 다 약이 되는 법.
아기였을 때도 버섯을 고기라고 속여서 자주 먹이지 않았던가.
탕에 중화시킨다면 맛있게 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구솥에 물을 적당히 담은 그는 손바닥을 한쪽 면에 붙였다.
내공으로 물을 데우기 위함이었다.
순식간에 솥이 붉게 달아올랐으며, 잠시 후에는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가만있어 보자. 설이가 좋아하는 재료들이 뭐가 있더라.”
한창 부엌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지면이 흔들리며 전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리라.
쿠쿵-! 쿠쿠쿠쿵-!!
난데없는 지진에 놀랄 법도 했건만 유진산은 태연하기만 했다.
아니, 모처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옳거니! 이게 적당하겠구나.”
그가 잡은 것은 말려놓은 돼지고기였다. 현재는 단단한 상태지만, 물에 불리면 식감이 살아날 터.
유진산은 식칼을 움켜쥔 채, 채를 썰기 시작했다.
타타탁-! 타타타탁-!!
말린 고기를 칼로 두들겨 쪼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식칼을 쥔 자가 무림고수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지면이 흔들리고 있음에도 유진산의 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순식간에 수백 조각으로 나뉜 고기 조각들.
그리고 유설이 좋아하는 채소들을 함께 손질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재료는 진산삼이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최대한 잘게 쪼개야겠구나.’
진산삼은 무려 수천 조각으로 분쇄되어갔다.
거의 가루로 만들어버린 그는 모든 재료를 솥에 털어 넣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간을 맞추는 것뿐.
그는 평소보다 매우 진한 양념장을 만들었다.
이윽고 탕에 섞자 꽤 그럴싸한 빛깔이 나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져만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산삼을 먹었을 때 느꼈던 고약한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거 난리 났구나.”
이래서는 손녀가 눈치챌 확률이 높았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닥치는 대로 재료를 듬뿍 추가했다. 최대한 냄새를 중화하기 위해서였다.
매우 많은 양의 향신료를 투척하고 나서야 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맛있어야 할 텐데…….”
매운 냄새가 강하게 풍기긴 했지만, 꽤 그럴싸했다.
이 방법이 성공을 거둔다면, 앞으로 상당히 많은 진산삼을 복용시킬 수 있을 터.
준비가 끝날 때쯤 마침 어디선가 손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배애애애~!!”
드디어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각으로 이동했다.
“오냐! 할애비 지금 간다!”
지하로 내려가서는 통로를 따라 속죄의 방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 편에서 유설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다 끝났어. 들어가 봐.”
실컷 놀고 왔다는 듯 얼굴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거야? 괜찮은 게지?”
“응.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니, 그 녀석 말이다. 소음이 크던데, 살아는 있겠지?”
유설은 즉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마 말은 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수고했다. 부엌에 맛있는 거 해놨으니 가서 먹고 있어.”
갑자기 유설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 안 먹을래.”
“할애비가 힘들게 만들었는데 안 먹겠다니? 조금만 먹어봐.”
그 순간 유설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거짓말하지 마, 할배. 여기까지 느껴져. 죽음의 냄새가.”
유진산은 속이 뜨끔 하고야 말았다. 여기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니.
귀신같은 손녀의 눈치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랬어?”
“응. 할배, 너무해. 나한테 진산삼 먹이려고 했지?”
“몸에도 좋고 귀한 거니 많이 먹어야 해.”
“나는 안 먹어. 절대.”
작전은 명백히 실패였다.
하지만 애써 만든 음식을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잠시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식경 후에 부엌에서 가지고 내려오너라.”
“까만 아저씨한테 먹이게?”
“그래도 우리 집에 있는 손님인데 밥은 줘야지.”
유설이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따 다시 내려올게.”
대화를 마친 유진산은 손녀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곧이어 지하 광장의 모습을 마주할 수가 있었다.
곳곳이 움푹 꺼지고, 일부는 함몰되어 초토화가 된 모습이었다.
괴승은 무너진 석상에 등을 기대어 주저앉아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과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기혈의 흐름.
적당히 끝나지 않은 것을 보니, 손녀에게 심하게 저항했던 모양이었다.
멀쩡해 보이는 것은 주둥이뿐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기에 놀랄 것도 없었다.
“쯧쯧. 중원무림의 누구도 널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괴승은 무척 억울하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가 특유의 어눌한 목소리로 힘겹게 답했다.
“어째서 그 악마가 본교에서 유실된 비전절학을 익힌 것이냐.”
“악마라니? 이게 감히 누구한테…….”
유진산은 올라가려던 손을 겨우 멈추었다. 여기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면, 뭐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은 화를 꾹 눌러 참을 수밖에.
그때 괴승이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했다.
“그것은 분명 이곳의 무공이 아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유진산이 은근슬쩍 그를 한 번 떠보았다.
“불문사자신공(佛門獅子神功)?”
“수백 년을 이어오며 찾고 있었다. 도난당했던 그것이 어째서 이곳에…….”
자신이 아는 내용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정확한 출처를 이제야 알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우린 그저 숭산에서 주웠을 뿐이네.”
“나는…… 본교의 무공에 패한 것일 뿐, 중원무림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그가 대결에서 패배하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주겠다고 했다.
설마 빠져나갈 구실을 만드는 것일까? 유진산이 미간을 좁혀 물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설마 이걸 빌미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아니다. 맹세는 반드시 지킨다.”
유진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괜히 오해하게 말이야.”
괴승은 심신이 몹시 지쳤는지 두 눈을 슬쩍 감았다.
몹시 무기력해 보였으며, 쉬고 싶은 듯한 모습이었다.
“묻거라.”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유진산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조심스럽게 첫 번째 질문을 건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