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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08화 (208/238)

208화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1)

“그동안 고수들을 찾아 도전하고 다녔던 이유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이었다.

등을 기대앉은 괴승은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이곳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정벌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전력이 필요한지.”

기우이기를 바랐지만,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다.

만약 이들의 계획이 현실화가 된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이제 남은 질문은 두 가지뿐이었다.

기회를 소진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얻어야 할 터.

“꿈도 야무지시군. 너희들 따위에게 무너질 곳이 아니다.”

괴승은 질문에만 대답하겠다는 듯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하지만 얻은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진산은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틀림없이 비웃은 것이리라.

그것은 이곳이 만만해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은 듯했다.

“두 번째 질문. 소뢰음사에서의 네 서열이 어떻게 되는가.”

눈앞의 괴승은 혈사객이란 별호가 붙었을 만큼 엄청난 고수였다.

그의 위치를 기준으로 천축의 저력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을 터.

“나는 여덟 명의 호법 중 한 명이다. 내 위에 혈뢰사천왕이 있고, 그 위에는…….”

괴승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 모습이 뭔가 두려워하는 듯도 보였다.

유진산은 그가 생각을 바꾸기 전에 얼른 재촉했다.

“그 위에는 뭐?”

“가장 높은 곳에는…… 아라한께서 계신다.”

아라한이라 불리는 자가 천축무림의 일인자인 듯했다.

어쨌거나 괴승의 말대로라면 절대고수들의 숫자가 엄청난 듯했다.

나머지 일곱 명의 호법만 몰려와도 감당하기 힘들 터인데, 그 위에 혈뢰사천왕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게다가 아라한이라 불리는 인물까지.

머릿속이 복잡해진 유진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했던 마지막 질문을 꺼내었다.

“세 번째 질문. 너희들의 침공 시기는 언제인가.”

“나도 모른다. 그것은 오직 아라한께서 결정하신다.”

아무래도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아쉽지만 질문을 바꿀 수밖에.

“대답을 안 했으니 다른 걸 물어보마. 아라한이라 불리는 그자는 얼마나 강하지?”

“감히 가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분이니까.”

그토록 강했던 눈앞의 괴승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유진산은 꺼림칙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싸우게 될지도 모르기에 확실히 해둬야 했다.

질문은 끝났지만 조금 더 그를 떠보기로 했다.

“그래 봐야 뭐 얼마나 강하겠는가. 우리에겐 불문사자신공이 있는데 말이야.”

괴승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유진산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순간 그가 정적을 깨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불문사자신공에는 여래식에 도달할 수 있는 비밀이 담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 비밀을 풀 수만 있다면, 조금은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괴승은 유설도 그를 당해내기가 힘들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도대체 천축에 얼마나 강한 존재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래식이라…….’

유설은 불문사자신공의 제8식(第八識)인 아라야식(阿羅耶識)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잠재의식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단계였다.

그리고 비급을 해독해줬던 사천성의 현자 사마현이 말하길, 아주 적은 확률로 제9식인 여래식(如來識)에 이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단계는 어디까지나 추측과 이론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설이가 도달해야 할 길이겠지.’

침공이 언제 시작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때까진 손녀와 아라한의 만남은 무조건 피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제 날 좀 쉬게 해줄 수 있겠나.”

몸이 축 늘어진 괴승은 몹시 지쳐 보였다.

손녀와의 싸움이 남긴 여파 때문이리라.

유진산도 딱히 그를 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더는 얻어낼 것도 없을 터.

그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통로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배, 탕 가져왔어.”

양손으로 노구솥을 움켜쥔 유설이 쫄래쫄래 다가오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웃음을 꾹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고했다. 어서 이리 주거라.”

“응. 맛있게 잘 익었어.”

탕을 건네받은 유진산은 그것을 천천히 괴승의 앞에 내려놓았다.

“영약을 사용해서 노부가 직접 만든 탕이네. 회복에 효과가 있을 테니, 배고프면 먹게나.”

그 순감 감겨 있던 괴승의 두 눈이 천천히 띄어졌다.

적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이런 관대함을 베풀다니. 의아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왜 나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지?”

“약속을 지킨 자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네. 상처가 회복되면 놓아줄 테니, 그리 알게.”

그것이 유진산의 원칙이었다.

지금껏 창룡대원이라 하더라도 약속을 지킨 자는 죽이지 않았다.

하물며 눈앞의 인물은 가문의 원수도 아니지 않은가.

상처가 회복되는 대로 단전을 전폐시키고 풀어줄 생각이었다.

“……알았다.”

아주 찰나였지만,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감정이라고는 없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웃을 줄도 아는구만.”

유진산은 피식 웃으며 손녀와 함께 등을 돌렸다.

이튿날, 유진산은 아침부터 기공 수련이 한창이었다.

가부좌를 튼 그의 주위로 은은한 광채가 아지랑이 치고 있었다.

틈이 날 때마다 역근경의 화후를 올려둬야 했다.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수련하길 얼마 후.

“할배, 뭐해?”

손녀가 코앞으로 다가와 큰 눈을 끔뻑여댔다.

아무래도 심심한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기공 수련을 잠시 중단하며 물었다.

“수련하고 있었지. 왜?”

“까만 아저씨 말이야. 어제 그거 먹었을까?”

괴승에게 주고 간 탕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그건 왜 물어봐? 먹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너무 궁금해. 안 먹었겠지?”

유진산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냥 혹시나 해서 한번 줘 본 거야.”

“내가 가서 보고 올게. 그릇도 가져와야 하잖아.”

“마음대로 하거라. 할애비 수련해야 하니깐, 이제 방해하지 말고.”

앞으로의 갈 길이 멀었다.

최근 부쩍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았다.

유진산은 다시 두 눈을 감고 역근경의 수련에 매진했다.

현재의 화후는 사성(四成). 이제 고작 사 할만큼 올라온 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본디 무공의 성취도는 초반에는 빠르지만, 화후가 올라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법이다. 대신 그만큼 위력도 더 강해지는 장점이 있다.

‘내일부터는 설이한테 도와달라고 해야겠구만.’

손녀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수련의 속도가 수십 배는 빨라질 터였다.

하지만 순순히 도와줄지는 의문이었다. 남의 수련을 돕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소모가 크고 지루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요즘엔 제법 자기주장도 강해지고 있어서, 예전처럼 잘 넘어오질 않았다.

‘음……. 어떻게든 잘 꼬셔봐야겠지.’

익혀야 할 무공이 많았기에 마음이 급했다. 게다가 역근경의 화후가 오르면 왼손에 봉인된 힘도 다스릴 수 있을지 확인해봐야 한다.

모처럼 고민이 많아지는 시기였다.

무공에 대한 부분도 그렇지만, 앞으로의 계획에도 선택이 필요했다.

정세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창룡대와는 잠시 휴전을 했으나, 무림맹과의 은원은 꼬일 대로 꼬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천축에서도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놈들이 넘어오기 전에 무림을 하나로 묶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현재의 무림은 정파와 사파가 양분되어 있다. 세력으로 따지면 정파가 칠 할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그런 상황에서 사파가 무림을 일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가문을 그렇게 만든 정파에게 양보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었다.

“에잇!”

본디 기공 수련은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온갖 잡생각에 도무지 수련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유진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였다.

지하에 내려갔던 손녀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올라왔다.

무슨 일인지 다소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무슨 일이야?”

유설이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할배. 그 아저씨 탕 먹고 죽었어.”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죽었단 말인가.

비록 손녀에게 상처를 입었지만, 죽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설마 진산삼을 먹고 그렇게 된 것일까? 자신도 한 뿌리를 먹어보았기에 그럴 리는 없었다.

“정말이야. 내가 그런 거 아니야.”

“알았다. 할애비가 내려가서 확인해보마.”

유진산은 속죄의 방을 향해 성큼성큼 내려갔다.

이미 수차례 오갔던 곳인데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한기가 느껴지는 통로를 지나쳐 목적지에 도착하자, 괴승의 모습이 보였다.

무너진 석상에 기대어 앉은 모습이 마지막에 봤을 때와 일치했다.

그의 앞에는 텅 빈 노구솥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놀랍게도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용케도 이걸 다 먹었다니…….’

유진산은 그의 이모저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만독불침의 경지였으니 중독사는 아닐 터. 하지만 몸에는 어떠한 상흔도 존재하지 않았다.

명확한 사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할배가 만들어준 탕 때문에 죽은 거야?”

뒤를 돌아보니 유설이 자라처럼 목을 쭉 빼고 있었다.

소리 소문도 없이 언제 뒤따라왔단 말인가.

“영양 가득한 음식을 먹고 왜 죽어? 무슨 수법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자결한 것 같구나.”

“스스로 죽은 거라고? 왜?”

“그거야 할애비도 모르지. 산에 묻어야겠으니, 창고에서 삽 좀 챙겨오너라.”

조손은 인근의 야산에 괴승을 묻었다.

나간 김에 산책도 하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설이 저녁엔 뭐 먹고 싶어?”

모처럼 함께한 나들이에 손녀의 기분은 아주 좋아져 있었다.

얼굴을 보니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음~ 할배, 동파육 만들 줄 알아?”

“그럼! 그건 내 전문이지.”

유설이 배시시 웃으며 할아버지의 팔짱을 꼈다.

먼 곳으로 거처가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유진산이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 그런데 할애비가 부탁이 있어.”

부탁은 한 가지였다. 당분간만이라도 수련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온종일 손녀의 기분을 맞춰주지 않았던가.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일부터 할애비랑 같이…….”

말을 이어가던 유진산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들의 집 앞에서 알짱거리는 무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결코, 반가운 손님들이 아니었다.

“할배가 초대했어?”

“그럴 리가 있겠느냐. 저것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휘황찬란한 황금빛 갑주들. 놀랍게도 금군을 이끄는 거물들이었다.

정확히는 창룡대주와 그를 따르는 다섯 명의 최측근들이었다.

그들도 자신이 온 것을 발견하고는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오해하지 마시오.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까.”

작은 음성이었지만, 먼 거리에서도 그 목소리가 또박또박 들려왔다.

엄청난 내공이 있어야만 가능한 수법이었다.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지?”

유진산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잠시 휴전 중이었지만, 언젠가는 본때를 보여줘야 할 녀석들이었다.

반가울 리가 없었다.

“창룡대의 정보망을 무시하지 마시오.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무림맹에서도 알고 있나?”

“그것은 나도 모르오. 최근 우리는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소.”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잘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창룡대에서 이곳의 위치를 알았다면, 무림맹에서도 파악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앞으로 벌어질 피곤할 일들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 왔다.

“더는 창룡대가 무림맹주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말인가?”

황소천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게 되었으나, 자세한 사정은 말해줄 수 없소.”

아무래도 내부에서 뭔가 사건이 있던 모양이었다.

지금으로선 알 방도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여긴 무슨 일이지? 나라를 지켜야 할 고관들이 참 한가하군.”

유진산의 도발에도 황소천은 목석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자신의 할 말을 이어갔다.

“우리 창룡대는 혈사객을 추적하고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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