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09화 (209/238)

209화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2)

도지휘사 황소천은 정체를 숨긴 창룡대의 대장이다.

그가 혈사객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창룡대의 존재 이유가 천축의 침공을 막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유진산이 협조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혈사객을 왜 우리한테 와서 찾아?”

“그자가 음양쌍괴한테 패배한 후 납치당했다는 정보를 들었소.”

“그래서 그게 뭐?”

유진산의 반응과 말투는 퉁명스럽기만 했다.

마음 같아선 전부 죽이고 싶은 놈들이었으니, 좋은 말이 안 나올 수밖에.

하지만 황소천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양손을 모으며 포권을 해왔다.

“고맙소. 뜻을 함께해주어서.”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란 말인가.

창룡대주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함께하다니? 갑자기 무슨 매미 뒷다리 빠지는 소릴 하는 거야?”

그 순간 옆에서 유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풉.”

흥분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곧이어 눈치를 받은 유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반면에 황소천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우리를 대신해 외세의 앞잡이를 잡아주었는데, 어찌 고맙지 않겠소.”

화해를 시도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음지에서 더러운 일을 일삼았던 놈들과 손을 잡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유가장의 멸문과도 연관이 있는 자들이 아니던가. 무림맹주와 순서만 바뀌었을 뿐,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군. 우리가 혈사객을 잡은 이유는 단지 거슬렸기 때문이다. 너희들과 함께할 생각은 없어.”

“아무래도 좋소. 허나 그자를 우리에게 좀 넘겨주시오.”

“알아내야 할 정보들이 있소. 모두의 안녕을 위한 일이오.”

하지만 한발 늦은 상황이었다. 그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미 죽은 자에게서 뭘 알아낸다는 건지 모르겠군.”

“설마 그를 그냥 죽인 거요?”

황소천은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유진산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진.

“오늘 아침에 야산에 묻었다. 팔대호법 중 한 명이었다더군.”

“혈사객이 호법이었다니……. 직접 자기 정체를 실토했단 말이오? 고문은 통하지 않았을 텐데?”

“뭐 그리 어렵진 않았지. 그들이 신봉하는 아라한에 대해서도 알아냈고.”

황소천이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가 아라한을 언급했다면 모든 말들이 사실이었을 것이오. 우리에게도 내용을 좀 공유해주시오”

“내가 원수들에게 왜 그래야 하지? 그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 당장 우리 집에서 썩 나가.”

사실 유진산도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호법들의 위에 네 명의 혈뢰사천왕이 있고, 아라한이라는 절대강자가 있다는 것뿐.

단호히 거절했지만, 그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반드시 우리에게 알려주어야 하오!”

그가 강압적으로 나오자 유진산은 순간 움찔했다.

창룡대에서도 최정예들로 모두 화경급의 고수들이었다. 더군다나 창룡대주인 황소천은 그 한계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자신이 혼자 있었다면 화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산은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손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유설이 주먹을 움켜쥐고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나아갔다.

“우리 할배 괴롭히지 마요. 두들겨 맞기 싫으면.”

할아버지의 명령만 떨어지면 바로 출수할 태세였다.

그러나 지금의 창룡대는 음양쌍괴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잘되어야 양패구상일 테니. 게다가 더는 희생자가 나오면 안 되는 시기였다.

유진산의 예상대로 그가 먼저 한발 물러섰다.

“그럼…… 침공 시기에 대한 단서만이라도 좀 공유해주시오.”

누그러진 황소천의 반응에 유진산은 속이 시원해졌다.

한층 기분이 풀리고 나서야 그가 선심을 쓰듯 말했다.

“그건 자기도 모른다더군. 아라한이 결정하는 거라고 말하던데?”

“왜 한숨이지? 그간 창룡대에서 침공을 대비해 오지 않았나. 미친 짓거리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참다못한 황소천이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모두 망쳐놓지 않았소? 요직의 대원들이 죽임당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막막하진 않았을 것이오.”

“이미 얘기했을 텐데. 죽을 만한 짓을 해서 죽였을 뿐이라고.”

“그뿐만이 아니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정파에서 무림을 통일했어야 하오. 하지만 지금 상황이 어떻소?”

통일은커녕 몇 년 사이 정파의 고수들이 부지기수로 죽었다.

모든 것이 음양쌍괴가 사파에 합류한 영향이었다.

설상가상 창룡대의 다음 기수들까지 모두 패도문으로 빼돌리지 않았던가.

창룡대주가 분통을 터트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유진산이 미안해할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모든 것이 의도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러게 왜 우리 가문을 건드렸나. 왜 애꿎은 내 새끼들을 죽였어?”

“그건 맹주년이…….”

황소천은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다음 내용은 발설하기가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을 놓칠 유진산이 아니었다.

“잠깐. 지금 뭐라고 했지? 창룡대는 무림맹주의 직속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내부적인 일까지 당신에게 말해 줄 의무는 없소.”

그냥 넘길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가문의 비화와도 관련된 일이었으니.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황소천이 일부러 유도한 것인 듯했다. 맹주에 관한 내용이라면 흥미를 보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좋다. 그럼 나도 혈사객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모두 말해 주지.”

황소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 무림맹과 창룡대가 긴밀히 협력해온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수직적인 관계는 아니었소. 그년에게 장악당하기 전까지는.”

“당대의 무림맹주가 창룡대를 집어삼킨 건가?”

“그렇소.”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하지만 의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리 맹주의 위세가 대단해도, 창룡대를 부리기엔 부담스러웠을 텐데?”

“힘에 굴복한 것이 아니오. 우린 여러 가지 제안들을 받았고, 그것을 수락했소.”

창룡대는 자존심이나 권력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집단이다.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할 뿐.

과연 무림맹주가 어떤 달콤한 제안을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무엇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군.”

“우리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소.”

“예를 들면?”

황소천이 목소리를 낮춰 되물었다.

“검후가 선음지체의 체질을 타고났다는 것은 알고 있소?”

신선의 오감을 타고나 높은 경지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천하제일지체였다.

검후가 그러한 체질을 타고났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게다가 손녀 또한 검후처럼 선음지체였으니 유진산이 모를 리가 없었다.

“무림에 소문이 자자한 내용이지. 어찌 모르겠나.”

“그럼 무림맹주와 검후가 원수 사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오.”

검후의 은퇴식이 거행되던 날. 맹주를 필두로 무림맹의 고수들이 그녀를 습격한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게다가 오래전 맹주의 한쪽 눈알을 파낸 자가 검후라고 했으니, 둘이 앙숙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황소천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한 가지 더 짚고 넘길 게 있소. 과거의 기록들을 추적해본 결과, 우리는 음양쌍괴의 근본이 유가장이라는 결론을 도출했소. 맞소?”

용케도 창룡대가 조손의 정체를 유추해냈지만,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었다.

“부인하지 않겠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계속 엉뚱한 질문만 해대는군.”

황소천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본론을 꺼냈다.

“유가장에 선음지체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정보를 누가 건네줬을 것 같소?”

“창룡대가 맹주의 사주를 받았다는 얘긴가?”

“맞소. 무림맹주의 지명 없이는 우린 정파 세력을 공격할 수 없게 되어있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중립이나 사파의 세력이라면 모를까. 맹주의 영향권에 있던 창룡대가 멋대로 정파를 해코지할 수는 없었을 테니.

“그년이 무엇 때문에 우리 가문을?”

“맹주는 검후 때문에 특이체질이라면 치를 떨었소. 특히 유가장의 아이는 다음 세대의 창룡대주로 키워 검후를 저격해주길 원했소.”

그 순간 유진산은 다급히 손녀의 어깨에 오른손을 툭 올렸다.

밤톨 같은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포함하여 가족들과 연관된 얘기를 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리라.

그러나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것은 유진산도 마찬가지였다.

‘정파의 수장이 같은 세력을 팔아넘겼다고? 아무리 자신의 잇속과 권력을 위해서라지만.’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질 않았다.

도대체 그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머리를 열어서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우선은 진위에 대해서 좀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맹주와 갈라선 이유는 무엇이지?”

“첫째는 음양쌍괴와의 휴전 약조를 지키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그녀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기 때문이오.”

“요구라니?”

“말해 줄 수는 없으나, 다툼이 좀 있었소. 과정에서 부하 몇 명이 맹주에게 살해를 당했고.”

설마 내분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무림맹주가 창룡대원을 죽였다는 것은 의외였다.

내막이 궁금했지만, 당장은 말해주지 않을 듯했다.

“창룡대에서 그년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얼마 전 맹주의 무공이 현경에 이르렀소. 무엇보다 우린 무림맹과 대립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오. 공동의 적을 두고 있으니.”

무림맹과는 기존보다 거리를 두는 한편, 연대는 계속 이어나간다는 얘기였다.

“무슨 상황인지 대충 이해는 되는군. 어쨌거나 우리 가문이 그렇게 된 데에는 너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황소천은 기운이 빠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한때는 가문을 잃고 납치당한 아이들이었소. 애초부터 선택할 수 있던 인생도 아니었고.”

“어쩔 수 없이 훈련받은 대로만 했다는 얘긴가? 그런다고 악행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우린 멈출 수가 없었을 뿐이오. 멈춘다면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니까.”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진산도 창룡대의 훈련장에 머문 적이 있었다.

하나같이 가여운 아이들이었다.

강제로 끌려와 지옥 같은 곳에서 지독한 훈련과 함께 세뇌 교육을 받는다. 이후엔 칼잡이가 되어 음지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한 못된 행위가 오랜 세월 대물림되어 이어져 온 것이리라.

비록 그 의도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방법과 수단이 치가 떨리도록 잔악했다.

“이해는 한다만, 노부 또한 가주의 도리로서 너희들을 용서할 수 없다.”

“언젠가는 우리의 죄를 달게 받겠소.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시간을 좀 주시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현재 상황에서 가장 죽이고 싶은 인물은 무림맹주였다.

창룡대를 벌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강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만큼, 지금 당장 이들과 대립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닐 터.

“음양쌍괴와 창룡대의 휴전은 천축의 침공을 막을 때까지로 하지. 단, 무림맹주는 예외로 한다.”

다시 한번 확실하게 못 박아 둘 필요가 있었다.

천축이고 뭐고 간에 그년과는 타협 따윈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고맙소. 때가 오면 아라한이 소뢰음사의 고수들을 이끌고, 정벌을 올 것이오.”

“우선은 무림의 싸움이라는 말인가?”

“우리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그렇소. 각지의 전역에서 주요 문파들을 신속히 점령하려 들 것이오.”

“만약 무림이 무너지면?”

“대규모의 병력이 연달아 들이닥칠 것이오. 이 땅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위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이젠 당신의 얘기를 들려줄 차례요. 소뢰음사의 호법으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는지.”

“별 내용은 없었지만, 지금부터 설명해주지.”

유진산은 그에게 했던 세 가지 질문과 답변 내용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공유하더라도 손해 볼 일은 없는 내용이었다.

얘기가 다 끝나자 황소천이 조금 실망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게 다란 말이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다 얘기했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유설이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진짜예요.”

음양쌍괴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더는 의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의 대화가 마무리될 찰나.

모두의 고개가 길가로 향했다.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규 아우로군.’

그는 다가오면서도 긴장한 모습으로 허리춤의 쌍도를 움켜쥐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고수들이 무더기로 모여있으니 그럴 수밖에.

“손님이 왔으니 이만 돌아들 가게.”

“알겠소. 혹시 우리 쪽에 볼일이 있다면 용문상회로 찾아오시오.”

“잠깐.”

유진산이 떠나려는 그를 잠시 불러세웠다.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소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진산을 응시했다.

“또다시 허락 없이 우리 집에 찾아오면, 그땐 휴전이 끝난 것으로 간주하지.”

“잘 알겠소.”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부하들과 함께 등을 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