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3)
창룡대가 물러가자, 백규가 어리둥절하며 다가왔다.
아직도 긴장이 가시지 않았는지, 양손은 여전히 허리춤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언제든 쌍도를 뽑을 수 있는 자세였다.
“형님, 저들은 누구요? 고위관원들인 거 같은데, 어찌 저런 고수들이 무더기로…….”
“아아. 아우는 처음 보는 자들이겠지. 창룡대의 간부들이네.”
백규는 상상도 못 했는지 목을 빼고 되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오? 그런 거물들이 어째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요?”
“혈사객 때문이었네. 우선 안으로 들어가지. 할 얘기가 많네.”
유진산은 백규와 함께 장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애용하는 곳은 언제나 전각 앞의 정자였다. 먼 곳으로 보이는 산의 절경이 일품이었고, 선선한 바람도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그가 약속을 지켰소?”
“맞네. 몇 가지 정보를 주고는 자결을 했더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이오?”
“이유는 나도 모르겠네.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깨끗이 비우고 죽었어.”
“그것참 희한한 놈이구려. 소득은 좀 있었소?”
유진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는 백규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말해주었다.
혈사객을 심문했던 내용과 창룡대주에게서 얻은 정보에 대해서도.
얘기를 듣는 백규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그 또한 패도문의 문주 이전에 사도련의 총사로서 책임이 막중한 인물이었다. 지금 상황이 심각한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 엄청난 놈이 고작 팔대호법 중 한 명이었다는 말이오?”
“나도 그 정도 실력이면, 최소한 서열이 한 손가락 안에는 들 줄 알았네. 창룡대주를 통해서도 확인했으니 틀림없을 걸세.”
“이거 생각보다 문제가 더 심각한 것 같소.”
“무림맹과 사도련, 그리고 창룡대까지 힘을 합쳐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걸세.”
예상대로 백규는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형님도 잘 아시지 않소? 우리 사도련은 절대로 무림맹과 함께할 수 없소.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어찌 모르겠는가. 우리도 안배가 필요하다는 얘기일세.”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유진산은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공격이 각지에서 이뤄질 거란 점일세.”
창룡대주에게 들은 정보였다. 그들이 속전속결로 무림을 정벌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오?”
“우리가 어떻게 전체를 다 방어할 수 있겠는가. 고수들이 집결한 곳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무너질 걸세.”
“형님 말대로라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겠구려.”
“맞네. 그래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그들을 격퇴할 수 있는 최고의 정예들을 양성해야 하네. 최대한 많이.”
백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최소한 절정은 넘어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소? 그런 고수들을 어떻게 뚝딱 양성한다는 말이오.”
유진산이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최고의 자질을 타고난 아이들이 지금 패도문에 모여있지 않은가. 이젠 자네 부하들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아미산에서 데려온 아이들이었다.
검기를 다루는 고수들로만 무려 삼백 명이다. 그들 중 일부는 검강도 다루며, 특출난 아이는 초절정의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다.
“맞소. 허나 지금까지는 형님의 부탁대로 방치하고 있던 상태였소.”
아이들이 준비될 때까지는 무림의 사건에 휘말리지 않게 해달라고 말한 바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풍파를 피할 수는 없는 법.
자의든 타이든 한 번 발을 디디면, 벗어날 수 없는 곳이 무림이었다.
“이제는 스스로 자신들의 길을 선택해도 될 시기가 왔네. 원하는 아이들은 정식 제자로 받아주게. 단, 강제적이어선 안 될 것이네.”
대부분이 유설보다 두세 살 정도 더 많았다.
무림의 평균으로 봐도 막내 항렬에서 벗어날 시기였으니, 이젠 어리게만 볼 수가 없는 나이였다.
“알겠소, 형님. 원하는 아이들은 모두 우리 패도문의 제자로 받아주겠소.”
정식 제자가 된다고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사문의 무공을 배울 기회가 생기고, 문파의 규정을 따르게 된다.
이미 패도문의 문화에 적응된 아이들이라 우려될 부분은 아니었다.
“아우는 틀림없이 아이들에게 좋은 문주가 되어줄 걸세.”
백규는 사파인답게 호탕하지만, 유난히 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멋쩍은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알아서 잘할 테니, 걱정하지 마소. 근데 문제가 좀 있소.”
“문제라니? 어서 말해보게.”
“정파의 심법으로 무공을 익힌 아이들이라, 사파의 귀두공을 수련할 수는 없소. 그럼 우리 패도문의 무공은 배우지 못 할거요.”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그 아이들이 익힌 무공이 패도문의 것보다 못하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훈련을 마치기 전에 도망쳐 나왔기에, 핵심적인 상승무공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유진산은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언젠가 먼 훗날. 천축의 고수들과 맞서는 상황이 오면, 어설픈 실력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을 터.
일취월장을 이루기 위해선 최고의 무공과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내가 아이들의 심법에 딱 맞는 상승 무공들을 구해주겠네.”
“형님의 가전 무공을 알려주실 참이오?”
“창을 다루는 애들도 없는데, 창술가의 무공은 알려줘서 뭐하겠는가.”
“그럼 귀하디귀한 상승무공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오?”
“내가 알아서 구해올 테니 아우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네. 허나 상승무공만 익힌다고 금세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겠지.”
“내공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그건 어찌할 방도가 없지 않소.”
“음.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네. 잠시 날 좀 따라오시게.”
유진산은 백규와 함께 잠시 걸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전각의 뒤편에 조성해놓은 텃밭이었다.
“이 밭에 있는 것들이 무슨 품종인지 알겠는가.”
“우측에는 호박하고 가지인 것 같고, 좌측의 푸르스름한 것들은 처음 보오.”
“진산삼이라 불리는 영약일세. 복용하면 내공이 증진되는 효과가 있지.”
백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한 손을 휘저었다.
“형님도 참, 오늘 농담이 과하시오. 그런 귀한 영약이 어떻게 수백 뿌리나 자라고 있다는 말이오?”
“나와 설이가 직접 심은 걸세. 한 뿌리당 오 년 공력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네.”
유진산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백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말 저것들이 전부 영약이란 말이오?”
“확실하네. 우리 집 지하에서 우연히 얻은 씨앗들이었네.”
“그럼 횡재한 것이 아니오!?”
그 순간 유진산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의 얼굴로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음. 이미 내공이 충만한 나와 설이에겐 크게 의미가 없을 걸세. 하지만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
“그럼 저 귀한 영약들을 기부하시겠다는 말이오?”
“패도문을 위해서라면 해주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수확 시기가 올 때마다 계속 보내주겠네.”
유진산의 따듯한 마음에 백규가 눈시울을 붉혔다.
“고맙소, 형님. 이런 준비까지.”
“뭘 이런 걸 가지고.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맛이 조금 고약한데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없어서 못 먹는 귀한 영약인데 맛이 뭐가 중요하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아우 몫도 같이 챙겨 보낼 테니 알아서 하시게. 뭐 참을성을 기르는 것도 수련이니. 인내할 수만 있다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걸세.”
금전으로는 환산할 수가 없는 귀중한 보물들이었다.
백규는 몹시 감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설이랑 같이 키운 거잖소? 설이한테도 허락을 받아야 내 마음이 편할…….”
그때였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푸히히.”
뒤를 돌아보자 유설이 해맑게 웃으며 보조개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우리 조카, 언제 졸졸 따라왔어?”
유설이 손가락 세 개를 동시에 내밀어 보였다.
“히히. 다 익으면 꼭 챙겨줄게. 삼촌은 세 개 먹어.”
“고맙다, 설아. 삼촌도 이제 조카 덕분에 내가고수가 되겠구나! 하하핫!”
모처럼 백규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셋은 집 주변을 산책하며 담화를 좀 더 나누었다.
그리고 헤어질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백규가 담아두었던 마지막 말을 꺼넸다.
“그리고 형님. 최근 사도련의 간부들에게만 알려진 극비정보가 하나 있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담스러우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네. 아우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니까.”
“그래도 형님은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소.”
“음……. 아우가 판단하시게.”
백규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나서 나직이 말했다.
“검후가 중원으로 돌아온 것 같소.”
유진산이 두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그 말이 정말 사실인가?”
검후가 누구인가. 은퇴하고 천축으로 떠났던 전대 무림의 지존이었다.
조손과의 인연도 깊었다.
비록 한 번뿐인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질병을 고쳐주었으며, 손녀에게는 기연을 안겨준 반가운 귀인이었다.
“련주님께 직접 들은 소식이니 확실할 것이오.”
그녀의 등장은 현재의 암울한 시황에 새로운 변수나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목적으로 다시 중원으로 온 것인지 알아봐야 했다.
어쨌거나 모처럼 희소식이었다.
그때 묵묵히 막대기를 들고 따라다니던 유설이 말문을 열었다.
“소소 언니?”
“언니라니? 네가 검후를 어떻게 알아?”
“나도 알아. 언니가 나 예쁘다고 안아줬어.”
유설이 불과 두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의 일을 기억하다니.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기억력이었다.
“틀림없이 언니도 우리 설이를 기억하고 있을 게다.”
검후 소소와 유설의 공통점은 둘 다 선음지체의 체질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 또한 정상인의 범주를 뛰어넘는 기억력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정말? 보고 싶어~”
그때 유진산이 백규를 향해 은근슬쩍 말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둘의 만남을 한번 주선해주면 좋겠군.”
“검후와 설이가 만나게 한다는 말이오?”
“보고 싶다고 하지 않는가. 어쨌거나 정말 유익한 일이 될걸세.”
물론 단순한 의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든, 필시 서로에게 도움 될 일이 있을 터.
무엇보다 꼭 만나봐야 할 것 같은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음. 핑곗거리라도 만들어 련주님께 한번 말씀드려보겠소. 하지만 장담은 하지 못하오.”
“고맙네. 허나 무리하지는 마시게.”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후 조손은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손녀가 먹고 싶다던 동파육을 직접 만들어주었다.
모처럼 가문의 비법을 이용해 실력 발휘를 한 것이다.
“천천히 먹거라, 아가. 먹을 만하지?”
“응, 너무 맛있어! 할배도 어서 먹어봐~”
유설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내밀었다.
별로 입맛은 없었지만,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냉큼 받아먹은 유진산이 흐뭇한 미소로 말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으로 맛있구나. 근데 아까 얘기 들었지?”
“할애비가 우리 설이를 위해서 소소 언니를 초대해달라고 하지 않았느냐.”
“고마워, 할배.”
“으음. 그게 다야?”
유설이 동파육을 씹다 말고 두 눈을 끔뻑였다.
“으응? 그럼 뭐가 있는데?”
유진산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손님들 때문에 하지 못했던 말을 이어갔다.
“흠흠. 할애비가 사실 부탁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