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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11화 (211/238)

211화 어서 내놔, 무공비급 (1)

손녀의 도움을 받아 역근경을 수련한 지 닷새째.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수련의 효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설의 손바닥이 등에 붙어 진기의 흐름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따스하고 웅장한 기운이 방안을 요동쳤다.

어두운 밤인데도 눈이 부시도록 환했다. 두 사람을 감싼 황금빛 광채 때문이었다.

역근경과 불문사자신공은 근원이 같은 불가의 기운으로 성질이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수련의 속도는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역근경의 화후가 막 칠성(七成)에 도달했을 때였다.

뒤에서 손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집중력이 흐트러지니, 수련 중엔 말하면 안 돼.”

“오늘은 언제까지 할 거야? 나 심심해.”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할애비가 빨리 강해져야 널 지켜주지.”

그 순간 유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푸힛!”

“이 녀석이 웃어?”

“할배가 날 지켜준다며.”

“그게 뭐 어때서?”

유설은 참지 못하고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유진산은 한마디를 하려다가 그냥 멈추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근경만 제대로 익히면 적어도 짐이 되진 않을 터였다.

“에잇!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유설이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

“할배, 어디가?”

“부엌으로 가서 음식 좀 챙겨야 해.”

“왜? 벌써 배고파?”

“아니다. 갈 데가 있어.”

부엌으로 들어간 그는 보따리에 간단한 음식과 과일 등을 챙겨 넣었다. 손녀의 친구들인 극살오의에게 선물 받은 술병까지도 챙겼다.

소풍이라도 가려는 것일까? 유설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유진산은 손녀의 등에 보따리를 메어주며 나직이 말했다.

“가보면 알게 될 게다.”

집을 나온 조손은 경공을 펼쳐 두 시진을 달렸다.

달리는 말보다 족히 두 배는 빠른 속도였다.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섬서성의 진양현이었다. 곳곳이 한적하고 평온해 보였다.

“여기가 무슨 동네인 줄 아느냐.”

“아니. 나는 처음 오는 데야.”

유진산의 얼굴이 작은 미소를 만들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으음~ 잘 모르겠어. 근데 여긴 뭔가 포근한 느낌이 들어.”

“그럴 게다. 거의 다 왔으니, 어서 가보자꾸나.”

그의 눈동자가 늘어선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깊게 가라앉았다.

‘이제 더는 미룰 수가 없겠지.’

이곳은 그가 일 갑자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동네였다.

오솔길을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자, 굳게 닫혀 있는 장원이 보였다.

대문의 현판을 보고는 유설이 입을 열었다.

“유가장?”

“그래, 아가. 이곳이 바로 네가 태어난 곳이란다.”

유진산이 평생을 보내었던 장원이었다.

익숙한 담벼락을 보고 있노라니 회한이 가득했다.

“……할배.”

유진산은 손녀의 등에 멘 보따리를 회수하며 나직이 말했다.

“들어가자꾸나. 부모님께 인사드려야지?”

대문에는 출입의 금지를 알리는 관아의 경고장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설이 발을 박차고 맞은편으로 날아올랐다.

유진산도 무거운 얼굴로 손녀의 뒤를 따라 도약했다.

담벼락을 타고 앞마당에 도착하자, 대청으로 들어가는 손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진산은 천천히 장원의 곳곳을 살펴보았다.

‘다시는 못 올 줄 알았건만.’

지금까지는 이곳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날의 기억을 다시는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녀를 위해서라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리가 풀리는지 그는 적당한 곳에 걸터앉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애비가 우리 늦둥이 데려왔다. 아주 건강히 잘 자랐어…….’

갑자기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일한 생존자인 손녀와 함께 이곳에서 도망쳤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시신조차 묻어주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다.

유기된 시체들은 관에서 화장된 후 자연으로 뿌려지기에, 이젠 유골조차 찾을 방도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시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손녀의 모습이 보였다.

자기도 나름대로 뭔가를 회상하고 있는 것일까?

유진산은 아이를 그대로 놔둔 채 보따리를 움켜쥐고 터벅터벅 걸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식솔들이 무더기로 죽어있었던 앞마당.

그곳에 자리를 깔고 음식을 꺼내고 있을 때였다.

“할배……. 나, 이거 가져도 돼?”

손녀가 나무를 조각해 만든 고운 빗을 움켜쥐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던 유진산은 무엇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막내아들이 부인에게 주려고 만들었다고 우쭐거리던 모습을.

“그래, 기억이 나는구나. 우리 막내며느리가 가장 아끼던 물건이었다. 그걸로 매번 네 머리를 빗겨주었지.”

“엄마 거……?”

유진산은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용케도 부모의 유품을 찾아내다니. 그야말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유설은 그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제 이쪽으로 와서 할애비가 시키는 대로 음식 좀 꺼내놓거라.”

“제사를 지내는 거야?”

패도문에서 몇 번 보았기 때문일까?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오냐. 네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을 위한 것이니, 정성스럽게 준비해야 한다.”

유진산은 뒷짐을 지고 손녀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모는 죽은 자식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가문의 막둥이 손녀를 제주로 삼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느새 우리 손녀가 이렇게 컸구나. 집안의 어른들에게 제를 올릴 줄도 알고.’

뿌듯하다 못해 울컥할 정도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계속 보고 있자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 했어, 할배.”

“그래. 이제 술을 따르고, 절을 올리거라. 본 적 있지?”

“응. 할 수 있어.”

장난기 가득한 손녀가 이렇게 진지한 모습을 보이다니.

절을 하는 뒷모습을 보니 기특하기가 그지없었다.

“아이고, 예쁘다. 어미한테 할 얘기 없어? 어서 해봐.”

돌연 유설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꿋꿋이 참고 있던 모양이었다.

한참을 쭈뼛쭈뼛하더니 이내 울먹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엄마……. 나 할배랑 씩씩하게 잘살고 있어요. 보고 싶어요…….”

말을 마친 유설은 소매로 눈물을 한 번 훔쳤다.

그러고는 보따리를 뒤적거리더니 종이돈인 지전(紙錢)을 꺼내었다.

저승 갈 때의 노잣돈을 보내는 전통의식이었다.

유설이 손끝으로 움켜쥔 종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삼매진화를 일으킨 것이다.

화르륵-!

유진산은 묵묵히 재가 되어 흩어지는 지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은 씁쓸하면서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았느냐. 애비가 이렇게 잘 키워놨으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편히들 가거라.’

가문의 마지막 씨앗이 세상 그 누구보다 건강하고 튼튼히 자라났다.

이제야 죽어서 자식들 볼 면목이 생긴 것이다.

유진산은 곁눈질로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서 치우고 짐 싸거라. 또 들를 곳이 있어.”

유가장의 장원이 있는 곳으로부터 오백여 장.

조손은 나무 위에 숨어서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의화당(醫化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오래된 전각이었다.

“할배, 저 아저씨는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두건을 동여맨 중년의 의원이 갓난아이를 업고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잘 알지. 평생 노총각으로 살 줄 알았더니, 짝을 찾은 모양이구만.”

석두라는 이름을 가진 의원이었다.

과거 아픈 몸을 이끌고 도망쳐다닐 때, 도움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덕분에 뇌공환으로 시간을 벌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던가.

“근데 왜 숨어서 지켜만 봐?”

“굳이 이런 모습을 보여서 뭣 하겠느냐. 잘살고 있는지 확인했으니 되었다.”

반로환동하여 어려진 모습으로 나타나면, 그가 적지 않게 당황할 터.

무림인이 아니었기에 설명하기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장사가 잘 안되나 봐.”

한눈에 봐도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해지고 낡은 옷차림까지. 아무래도 삶이 넉넉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유진산은 품속에서 전낭을 꺼내 손녀에게 내밀었다.

“저 녀석에게 좀 날려주거라.”

전낭에는 은자 다섯 냥이 들어있었다.

몇 년은 풍족히 생활할 수 있는 자금으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유설이 한 손을 쭉 내 뻗자 전낭이 허공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굉장히 먼 거리인데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 후 석두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웬 전낭이 눈앞에서 춤을 추듯 살랑거리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전낭을 잡아채 열어보았다.

그는 마치 얼음이라도 된 듯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반각이 더 지났을 때쯤이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렇게나 좋아하다니. 아무래도 삶이 궁핍했던 모양이었다.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던 유진산이 다시 손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은혜도 갚았겠다, 이제 다음 장소로 가자꾸나.”

*  *  *

조손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섬서의 용문상회였다.

창룡대주가 잠시 머무르겠다고 말한 곳이기도 했다.

“설이는 밖에서 지키고 있어.”

“금방 올 거지?”

유진산은 손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냐. 혹시라도 할애비가 부르면 재깍 달려와야 해. 끝나고 맛있는 거 사주마.”

“알겠어. 빨리 와.”

비록 휴전상태였지만, 위험한 녀석들이었다.

만일의 위험을 대비해 손녀를 밖에 대기시켜 놓아야 했다.

상회의 문을 열고 들어선 유진산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내부의 모습은 상인들의 사무를 처리하는 본부답게 꽤 그럴싸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속일 수가 없었다.

상인들의 손에 박인 굳은살들. 그리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기세로 보아 무공을 익힌 인물들이리라.

‘창룡대 휘하의 비밀 본부인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잠시 후 두건을 둘러맨 경장 차림의 중년인이 다가왔다.

양손을 모은 그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서둘러.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손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그를 따라 비밀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두 개의 문을 지나치는 동안 낯익은 창룡대원 몇 명을 마주했다. 하지만 유진산에게 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또 하나의 문을 지나치자 드디어 목적지가 나타났다.

상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방이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들과 고급스러운 탁상. 벽에는 멋스러운 화폭까지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중심에 그가 앉아있었다.

창룡대주 황소천. 그의 손이 천천히 찻주전자를 움켜쥐었다.

“하루만 더 늦게 왔으면 만나지 못할 뻔했소. 내일 개봉으로 돌아가려 했으니까.”

“여유가 넘치시는군.”

황소천은 가득 채운 찻잔을 유진산의 앞으로 쓱 내밀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소?”

유진산이 경직된 얼굴로 맞은편에 쓱 올라앉았다.

“내 자식들의 제사상을 챙기고 오는 길이네.”

“그날의 일은 유감이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오.”

유진산은 손가락으로 찻잔을 툭 쳐버렸다.

그러자 뒤집힌 잔에서 흘러내린 찻물이 탁상 위의 종이뭉치들을 흥건히 적셔갔다.

“그때를 생각하니 전부 뒤집어엎고 싶더군. 이 찻잔처럼.”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자손의 미래를 위해 잠시 참는 것뿐이었다.

앞으로 손녀가 살아갈 세상이었다. 천축에서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좌시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예상대로 창룡대주는 저자세로 나왔다.

그는 임무를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음양쌍괴와는 절대로 대립하고 싶지 않을 수밖에.

유진산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창룡대의 무공이 필요해.”

“이해할 수 없구려. 음양쌍괴의 무공은 우리의 아래가 아닐 터인데?”

“우리가 익힐 것이 아니다.”

황소천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고는 뭔가를 눈치챈 듯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설마…… 그 아이들에게 전해줄 것이오?”

“그래. 창룡대의 내공 심법과 호환율이 높은 무공비급들을 내놔.”

“다짜고짜 찾아와서 무공비급을 내놓으라니.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는 눈치였다.

창룡대 또한 다음 기수의 아이들이 호현으로 도망쳤기에 고민이 많았던 터였다.

그래도 간접적으로나마 육성할 수 있다면. 그리고 새외무림의 침공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속내를 모를 유진산이 아니었다.

“싫으면 거절해도 돼. 두 번은 요청하지 않을 테니.”

“어떤 목적인지 알려주시오.”

“왜? 아이들이 강해져서 칼을 거꾸로 돌릴까 봐 걱정되나?”

“그것은 상관없소. 임무만 완수할 수 있다면, 목숨 따위 어찌 되어도 관계없으니까.”

유진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누구에게도 너희 목숨을 양보할 생각은 없어. 단지 아이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힘을 기르게 할 생각이다. 다가올 위험으로부터.”

예상대로 창룡대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무공비급에 더해 우리가 직접 아이들을 훈련시켜 주겠소. 이번 기수의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재능이 특출나니, 최고의 정예가 될 것이오.”

맹주년의 도움으로 더욱 뛰어난 천재들을 납치해왔을 터. 패도문의 아이들이 현역의 창룡대원들보다 잠재력이 높을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그들이 수련까지 도와준다면 금상첨화일 테지만, 유진산은 단번에 거절했다.

“인륜적이지 못한 너희들의 훈련방식은 필요 없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비급만 넘겨주면 돼.”

굳이 아이들에게 괴로웠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패도문에도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백규와 정혜, 거기에 더해 자신과 손녀도 가끔 힘을 보태줄 수 있을 터.

확고한 유진산의 의지에 황소천도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무공비급은 이른 시일에 패도문으로 전달될 것이오.”

“잘 알겠다.”

유진산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용건이 끝났으니 더는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때 그는 등 뒤로 황소천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아쉽구려. 내가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되지 못한 것이…….”

황소천은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최고의 권력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불평하고 있었다.

‘가진 게 많아도, 마음이 풍족하지 못하면 가난한 게지. 조직의 이념에 영혼까지 바친 자의 공허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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