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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무사와 지존 손녀-212화 (212/238)

212화 어서 내놔, 무공비급 (2)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손녀의 기분이 우울해 보였다.

모처럼 고향에 들러 제사를 지냈기 때문일까? 부모 생각이 잊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가, 왜 우울하게 그러고 있어?”

유설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직이 물었다.

“나 맹주 언제 만나게 해줄 거야.”

“무슨 맹주? 무림맹주?”

“응. 어창술을 익히면 만나게 해준다며.”

겁 없는 손녀의 반응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현 무림의 최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냥 대책 없이 가서 때려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 할배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 그래서 언제 익힐 건데?”

유설은 대답 대신 왼손을 슬쩍 내뻗었다.

그 순간 유진산은 놀란 눈을 부릅떴다.

주변에서 수백 개의 돌멩이가 몰려들며 허공에서 소용돌이쳤기 때문이다.

“……헉!? 그건 뭐야?”

앞으로 내뻗은 유설이 한 손을 옆으로 휙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맴돌던 돌무더기가 우측을 향해 우박처럼 날아들었다.

그곳엔 거대한 바위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콰콰쾅-! 콰콰콰쾅-!!

작은 돌멩이들은 바위를 향해 끝없이 돌진하며 균열을 일으켰다. 하나하나가 유설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것이리라.

균열을 일으키던 거대한 바위는 버티지 못하고 깨져버리고야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산은 입을 떡 하니 벌리고 있었다.

“부족해?”

이 정도면 어창술이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 이 정도까지 성장했다는 말인가. 자신도 강해졌지만, 이미 손녀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줘서 우쭐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무림에서 자만심을 가지는 것은 금물이었으니까.

“제, 제법이긴 하구나. 허나 아직 멀었어.”

“그럼 얼마나 더 세져야 만날 수 있어?”

손녀가 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였다.

지금은 무림맹의 총타에 대한 정보도 전무했으며,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른다. 무턱대고 어찌 쳐들어간단 말인가.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 시간을 벌어야 할 터.

하지만 자신도 이르지 못한 무학의 경지에 대해 어떻게 지어낼 수 있겠는가.

그는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전설을 둘러댔다.

“진정한 어창술은 창을 타고 날아다닐 수 있어야 하는 게다. 할 수 있어?”

유설이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거봐. 무림맹주는 할 수 있대.”

물론 거짓말이었다. 신선이 아닌 이상 어떻게 창을 밟고 날아다닌단 말인가.

하지만 유설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창을 탈 수 있으면, 만나게 해줄 거야?”

“그럼! 당장에 쳐들어가서 혼내줘야지.”

“꼭? 약속해?”

“오냐. 할애비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유설은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니, 없어.”

“근데 맹주를 어떻게 할 건데?”

“만나기만 하면 잡아서 확…….”

유진산은 헛웃음을 내뱉고야 말았다.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떠는 손녀의 모습이 웃겼기 때문이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화났어?”

“맹주가 나 납치하라고 시켰다며.”

“그래. 그래도 다행히 네 어미가 잘 숨겨서 할애비가 발견했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 게다.”

“고마워, 할배…….”

유진산이 흐뭇한 미소로 손녀의 어깨를 한 번 토닥였다.

“그래. 그럼 할애비 말 잘 들어야 해. 알겠지?”

“으응.”

점점 의젓해지는 손녀의 모습에 유진산의 마음도 뿌듯해졌다.

“우리 손녀 예쁘다. 할애비는 패도문에 좀 들렀다가 갈 테니, 집에 가서 먼저 수련하고 있어.”

창룡대주와 나눴던 얘기를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유진산은 손녀와 인사를 나눈 뒤 방향을 틀었다.

패도문에 도착한 유진산은 당혹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아이들의 머리카락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머리가 문파의 상징이라 해도, 애들의 머리까지 밀어버릴 줄이야.

그가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때였다.

낯익은 두 명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손녀의 친구들인 만두와 청풍이었다.

“오냐. 근데 다들 머리카락이 어디 간 게냐. 마실 나갔어?”

유진산의 농담에 만두가 반들반들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헤헤. 어제 전부 같이 밀었어요.”

“쯧. 백규 아우가 괜한 짓을 했구나.”

청풍과 만두가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희가 스스로 자른 거예요.”

“문주님은 굳이 자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요.”

애들이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니, 문주가 밉보이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들 정식 문도가 되는 것으로 결정한 거야?”

“예, 너무 기뻐요!”

“이날만 기다렸다고요.”

유진산은 흐뭇한 미소로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겼다.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보자꾸나.”

아이들을 볼 때마다 기세가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다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개중에서 가장 강한 청풍의 실력은 어지간한 명문정파의 장로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그가 흐뭇한 미소로 떠나려 할 때, 청풍이 뭔가를 다급히 물어왔다.

“할아버지, 근데 설이는 어딨어요?”

“우리 설이는 왜 찾아?”

“그냥 궁금해서요.”

청풍과 만두는 손녀보다 세 살이 더 많았지만, 친구로 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그냥이라는 것은 없다. 뭐든지 다 이유가 있는 법.

유진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청풍을 떠보았다.

“너 설마? 우리 설이 좋아하는 거 아니지?”

갑자기 청풍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시처럼 붉어졌다.

“아, 아니에요! 정말 그냥 물어본 거예요.”

“당황하는 것을 보니 맞는 모양인데?”

“정, 정말이에요. 그냥 같이 놀고 싶어서…….”

모처럼 애들을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유진산은 겨우 웃음을 참으며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설이는 당분간 수련 때문에 바쁠 게다. 보고 싶으면 나중에 집으로 한번 놀러 오너라.”

“네, 안녕히 가세요.”

등을 돌린 유진산은 한 마디를 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냐. 그리고 얘기는 전해주마. 네가 좋아한다고.”

“아아! 안 돼요, 할아버지! 정말 아니란 말이에요!”

등 뒤에서 청풍의 절규가 계속 메아리쳤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있을 때였다.

낯익은 인물이 폭소를 터트리며 다가왔다.

“하하하! 여전하십니다, 어르신.”

패도문의 돌격대장인 홍기였다.

문파에서 백규 다음가는 서열이기도 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

“하하. 애들을 놀리시는 모습을 보니, 설이가 할아버지를 똑 닮았단 생각이 들었어요.”

유진산은 속이 뜨끔한지 헛기침을 했다. 손녀가 자신을 놀릴 때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조금 전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흠흠! 그나저나 아우는 자리에 있는가.”

“문주님은 잠시 외출 나가셨습니다. 기다리시겠어요?”

“아니다. 그냥 전해줄 말이 있어서 잠시 들렸어.”

유진산은 황소천과 나눴던 얘기를 요약해서 설명해주었다.

창룡대에서 패도문으로 무공비급을 전달해줄 것이란 내용이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홍기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와! 창룡대가 익히는 상승무공들이라니, 정말 엄청난데요? 너무 궁금합니다.”

“너희들은 어차피 익히지도 못해.”

사파의 심법으로 내공을 쌓은 기존의 문도들은 정파의 무공을 익힐 수가 없다.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어쨌거나 정말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큰일은 무슨. 아우가 돌아오면 내용을 전달해주게.”

“예. 어쨌거나 어르신 덕분에 조만간 패도문의 귀두대(鬼頭隊)가 무림 제일로 성장할 겁니다.”

“귀두대라니?”

홍기가 아이들이 모여있는 수련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최근 문파의 조직을 개편하고 있습니다. 귀두대는 애들만 따로 분류해서 만든 무리예요.”

“음.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 앞으로 몇 년만 더 성장하면 무적이 될 걸세.”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일부터 귀두대에서 무술대회를 열 건데, 참관하시겠습니까?”

“대회라니?”

“무공이 가장 강한 녀석이 귀두대의 대주가 될 겁니다.”

강한 자가 무리의 대장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이 사파의 법칙이었으니까.

유진산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아쉽지만 나도 요즘 바빠서 말일세. 이만 가봐야겠군.”

수련할 시간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십 할의 확률로 청풍이 귀두대의 대주가 될 터.

비록 손녀에게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열세 살의 나이에 초절정에 도달했을 정도로 천재 중에서도 천재였다.

“살펴 가십시오, 어르신!”

유진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대문 앞에 선 그는 머뭇거리며 귀를 쫑긋했다.

‘누구지? 손님이 왔나?’

손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손님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놀랍게도 자신보다 더욱 고강한 무공을 지닌 고수이리라.

대문 앞에서 귀를 기울이던 그는 대화 내용에 화들짝 놀라고야 말았다.

“소소 언니도 먹어!”

“응, 고마워 설아. 언제 이렇게 예쁘게 자랐어?”

“히히히. 언니도 예뻐…….”

어디선가 들어본 낯익은 이름이었다.

유진산이 그녀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바로 검후의 이름이었으니까.

‘검후가 우리 집에 왔다는 말인가? 게다가 언니라니…….’

분위기만 보면 자매 상봉이었다.

전대의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절세고수.

마지막에 그녀를 본 것은 양주산에서였으며, 반로환동하기 이전이었다.

고대하던 만남이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러울 줄이야.

갑작스러운 그녀의 방문에 유진산은 잠시 머뭇거렸다.

허나 이미 둘은 자신이 온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오신 것 같은데?”

“으응. 언니가 와서 쑥스럽나 봐.”

“어서 같이 나가보자.”

유진산이 헛기침을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손녀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 분명했다.

검후는 가벼운 경장 차림에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을 뿐이었다.

특별히 꾸미지 않았음에도 꽃을 보는듯한 화사함. 그리고 은은히 느껴지는 품격은 마치 봉황을 보는 듯했다.

“오랜만이에요, 할아버지. 그동안 잘 지내셨죠?”

“덕분에 이렇게 잘 살아 있습니다.”

비록 나이는 자신이 훨씬 많지만, 검후의 배분은 명문정파의 장문인급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자신의 병을 치료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유진산이 검후에게 예우를 갖추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그녀가 방긋 웃으며 허리를 슬쩍 굽혔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귀여워지셨어요.”

손녀 못지않게 장난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 둘이 그렇게 친해질 수밖에.

“흠흠! 사연이 있었습니다. 헌데 이 누추한 곳은 어찌…….”

“영영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한달음에 달려왔답니다.”

영영은 사도련주의 이름이다.

그녀 또한 사파인들에게는 하늘 같은 존재였지만, 검후에게는 그저 거리감 없는 친구인 모양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차를 내올 테니,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적어도 무림에서만큼은 만인지상의 위치라 할 수 있을 만한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예의 바른 그녀의 모습은 충분히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간 그는 서둘러 차를 준비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손녀를 시켰겠지만, 귀한 손님인 만큼 손수 준비하려는 것이다.

“할배, 나는 꿀차!”

부엌 밖에서 우렁찬 손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저 녀석이 할애비를 이렇게 부려먹는구나.”

유진산은 투덜대면서도 꿀물까지 한 잔 더 준비했다.

곧이어 준비를 마친 그는 다과상을 들고 야외의 정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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